[미래 정산 기록 제1호 원본 복구 중]
휴대전화에 동그란 진행 표시가 나타났다. 민석은 휴대전화를 충전기에 연결했다. 방전으로 끊기면 어쩌나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그러나 전원을 충전하면서도 복구 진행률은 1퍼센트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서윤은 병원 주차장 안쪽에 차를 세웠다. 사람들 시선이 닿지 않는 자리였다. 민석은 전화로 회사에 반차를 신청했다. 팀장은 짜증을 냈지만 더 따지지는 않았다.
"지금 뭐부터 해야 할까요?"
서윤이 물었다.
"서명이 진짜인지 확인하고 싶어요. 십 년 전 문서라면 도장을 찍었을 때 원본이 남았을 겁니다."
"당장 확인할 수 있는 곳이 있어요. 폐쇄된 법인 등기와 금융감독원 공시 자료는 공개 기록이니까요."
두 사람은 도서관 열람실로 향했다. 신문사와 가까운 건물이라 서윤은 이곳을 자주 이용했다. 민석은 검색창에 한빛자산신탁을 입력했다. 결과에는 오래된 폐업 공시와 투자자 피해 관련 기사들이 나왔다. 손실 금액은 백억 원보다 컸지만 기사마다 액수가 달랐다. 어떤 기사에는 980억 원, 어떤 기사에는 1,100억 원이었다.
"여기 '특정 미확인 거래 100억 원'이라고 돼 있네요."
"도현 씨도 그 부분을 추적하고 있었어요." 서윤이 말했다.
"사망한 직원도 한빛자산신탁하고 관계가 있었나요?"
"직접 근무한 건 아니에요. 청산 작업을 맡은 투자회사에서 장부를 정리했죠. 그러다 사라진 돈의 수취 계좌를 찾아냈다고 했어요."
민석은 기사를 확대했다. 사진 속 회의실은 낡은 형광등이 달린 곳이었다. 바닥의 줄무늬 카펫이 이상하게 눈에 익었다. 그는 머리를 누르며 눈을 감았다. 한순간 전화기 울리는 소리와 누군가의 고함이 들리는 듯했다.
'숫자 7이 왜 여기에 있어?'
목소리는 낯설었다. 그가 알던 사람의 목소리인지도 구분되지 않았다.
"괜찮아요?" 서윤이 물었다.
"이 장소에 가 본 것 같습니다."
"기억이 났어요?"
"아뇨. 느낌만요."
민석은 신문 기사에 찍힌 사진을 저장했다. 사진이 정상적으로 저장됐다. 그러자 그의 은행 앱 복구 진행률이 2퍼센트로 올라갔다.
"기억을 찾을 때마다 복구가 되나?"
서윤이 의아해했다. "직접적인 인과관계라고 단정할 순 없어요. 다른 단서도 찾아봅시다."
그들은 당시 회계 자료를 감사한 법인의 직원 명단을 검색했다. 등록부에 나온 이름 가운데 강민석은 없었다. 대신 도현의 이름이 있었다. 민석은 오래된 명단에 손가락을 댔다.
"그렇다면 출입증이 위조일 가능성이 더 높겠네요."
서윤이 화면을 보며 말했다. "아니면 정식 명단에 올리지 않은 외부 인력일 수도 있어요. 대학생 아르바이트면 계약서를 별도로 보관했겠죠."
민석은 열람실을 나와 준성에게 전화했다. 이번에는 준성이 바로 받았다.
"한빛자산신탁 기록 찾는 중이지?"
"왜 네가 먼저 알아?"
"내 폰에도 알림이 떠. 누가 원본을 복구하려고 하면 권리자에게 통보하는 모양이더라."
"너도 권리자야?"
"예전에는. 지금은 아니야."
"그럼 넌 어떻게 권리를 잃었는데?"
준성은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백억 원을 번 날, 계좌에 찍힌 잔액이 실제 현금이 된 적이 있어. 그 돈을 한 달 만에 다 썼지. 투자도 하고, 빚도 갚고, 사람도 샀어. 그러고 나서 정산일이 왔어."
"어떻게 됐는데?"
"내 이름으로 보증한 사람 열한 명의 계좌가 멈췄어. 한 사람은 집을 잃었고, 두 사람은 치료를 미뤘어. 시스템은 내게 아무 벌도 내리지 않았어. 대신 누군가의 선택지를 가져갔지."
민석은 할 말을 잃었다.
"나도 몰랐어. 돈이란 게 통장에서 사라지면 끝인 줄 알았거든. 그런데 내가 쓴 돈에 사람의 내일이 붙어 있었어. 그때부터는 안 써."
"네가 나를 수락시키려고 했잖아."
"해야 할 말이 있어서 그랬어. 네가 백억 원을 승인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고 믿었거든. 하지만 넌 약관을 읽어 버렸지."
"이제라도 이유를 말해."
"네가 서명한 원본을 찾으면 알게 될 거야."
민석은 전화를 끊었다. 준성에게서 들어 본 말 가운데 가장 오래 남는 것은 '사람의 내일이 붙어 있었다'는 문장이었다. 예지 능력으로 큰돈을 벌 수 있다는 상상은 그 문장 하나로 바뀌었다. 누군가의 내일을 저당 잡히고 사는 생활. 그건 부자라기보다 채권자에 가까웠다.
그가 서윤에게 말했다. "십 년 전 저한테 있었던 일부터 다시 확인하고 싶어요. 제가 그 회계법인에서 일한 게 사실이라면, 왜 아무 기억도 없는 걸까요?"
"당시 어디에서 살았는지 기억나요?"
"서울에서 자취했어요. 대학 졸업반이었고요. 아르바이트를 하긴 했는데 회계법인 정식 인턴은 아니었습니다. 외부 감사를 도울 자격도 없었죠."
"학생 아르바이트도 자료 정리는 할 수 있어요. 하지만 출입증이 있다고 정식 감사 업무를 맡았다는 뜻은 아니에요."
민석은 대학 동기들의 오래된 사진을 뒤졌다. 졸업 전 여름에 찍은 단체 사진에는 방학 아르바이트 장소가 적혀 있었다. 주차장 관리실과 작은 회계 사무소. 한빛자산신탁과 직접적인 관계는 없었다. 그 시기에는 발목을 다쳐 병원에 다녔던 기록도 있었다. 적어도 출입증 사진의 날짜에 자기가 어디에 있었는지는 더 확인해 볼 수 있었다.
"문서에 내 이름이 있다는 것만으로 내가 거기 있었다고 믿을 필요는 없겠네요."
"그렇죠. 저는 그 사진이 진짜라고도, 가짜라고도 아직 말하지 않을 겁니다."
서윤은 서랍에서 투명한 파일 하나를 더 꺼냈다. 과거 투자 사기 사건을 취재할 때 만든 질문 목록이었다. '실제 입금은 있었는가' '법적 수취인은 누구인가' '계약 당시 서명자의 소재를 확인할 수 있는가'.
민석은 세 번째 질문에 동그라미를 쳤다.
"그날 제 출석 기록이나 병원 진료 기록이 나오면, 적어도 제가 서명할 수 있었는지 확인할 수 있겠어요."
"네. 확인 가능한 현재의 기록을 먼저 찾아야 해요. 미래 장부가 사람을 속이는 이유는 그럴듯한 세부 정보가 많기 때문일지도 모르니까요."
그들은 도서관 복사기 앞에서 각자 찾은 자료를 정리했다. 사용 날짜와 출처를 쓴 종이를 맨 위에 놓고, 복사본과 인쇄물을 뒤섞지 않았다. 자료마다 번호를 붙이는 작업은 지루했다. 그러나 민석은 그 지루함이 좋았다. 예고 숫자는 순식간에 사람을 겁먹게 했지만, 번호표 하나 붙인 기록은 겁을 주지 않았다.
민석은 오래된 사진을 비교하다가 이상한 점을 더 발견했다. 출입증 사진 속 자신은 오른쪽 눈썹에 지금과 같은 흉터가 있었다. 그 흉터는 몇 년 전 회사에서 넘어지며 생긴 것이었다. 십 년 전 사진이라면 있을 수 없었다.
"여기요." 민석이 서윤을 불렀다. "이 흉터는 2021년에 생겼어요. 친구가 이마 꿰맨 날 찍은 사진도 있어요."
서윤은 출입증과 얼굴을 비교했다. "그러면 출입증 자체가 가짜거나, 오래된 사진을 최근 사진으로 교체했을 가능성이 있어요. 실제 카드가 존재한다는 것과 그 카드에 적힌 발급일이 맞다는 건 별개의 문제죠."
민석은 가슴속의 돌덩이가 조금 내려가는 기분을 느꼈다. 이상한 시스템은 이미 지난 과거까지 멋대로 보여 줄 수 있는 듯했다. 그러나 그 속에도 허점이 있었다. 미래의 모든 거래를 계산한다고 해서 사람의 흉터가 생긴 연도까지 완벽히 계산하는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여섯 번의 거절도 제 기억이 지워진 게 아니라, 일어나지 않은 일을 일어난 것처럼 써 놓은 기록일 수 있겠네요."
서윤은 고개를 들었다. "가능한 가설이에요. 확인해 보죠."
민석은 복구 진행 표시를 바라봤다. 99퍼센트였다. 그 숫자는 어쩌면 본인이 뭘 알아냈는지와 무관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화면에 적힌 퍼센트를 믿지 않았다. 대신 눈앞에 쌓인 인쇄물의 무게를 믿었다.
오후 다섯 시 오십 분. 휴대전화의 진행률은 갑자기 99퍼센트로 뛰었다. 민석은 서윤과 나란히 앉아 화면을 지켜봤다.
[미래 정산 기록 제1호 복구 완료]
나타난 것은 동영상이 아니었다. 짧은 문장 일곱 개였다.
[1차 거절: 서류 원본 미확인]
[2차 거절: 위임자 불명]
[3차 거절: 수익자 불명]
[4차 거절: 대리인 자격 불명]
[5차 거절: 채권 귀속 오류]
[6차 거절: 정산 대상 실종]
[7차 수락: 기록 잠금 해제 조건부]
민석은 문장들을 소리 내어 읽었다. 거절 이유가 모두 계약서의 오류를 지적하고 있었다. 미지의 능력을 가진 사람이 돈을 거절한 기록이라기보다는 회계 담당자가 결재를 반려한 흔적에 가까웠다.
"전 돈을 여섯 번 거절한 게 아니었어요. 서류를 여섯 번 반려한 거네요."
서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일곱 번째에는 조건부로 수락할 예정이라고 적혀 있어요."
"예정이라는 말이 중요해요. 아직 일어난 일이 아니니까."
민석은 일곱 줄을 다시 읽었다. 여섯 번의 거절 사유 중 다섯 개는 회계 서류만 제대로 검토해도 발견할 수 있는 오류였다. 마지막 하나만 달랐다. '정산 대상 실종'.
"도현 씨가 실종됐다가 사망한 사건과 연결될까요?" 서윤이 물었다.
"가능성은 있지만, 이 기록에 적힌 대상이 도현 씨인지조차 모릅니다. 우선 여섯 번째 반려 시각을 확인해야겠어요."
그는 각 기록의 상세 정보를 눌렀다. 날짜 대신 '분기 A'부터 '분기 F'까지 알파벳이 붙어 있었다. 분기는 서로 다른 시간대가 아니라 서로 다른 선택 결과를 뜻하는 듯했다. 첫 번째 분기에서는 민석이 원본을 요구했고, 두 번째에서는 위임자를 찾았다. 세 번째 분기에서는 수익자를 확인하지 못해 중지됐다.
"반려 절차가 순서대로 진행된 게 아니라, 병렬로 계산된 것 같아요." 민석이 말했다.
서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시스템에 적힌 '과거 여섯 번'이라는 말은 사실과 다를 수도 있어요. 기록한 쪽의 기준에서 과거이지, 실제로 당신이 경험한 과거가 아닐 수 있다는 거죠."
민석은 손에 들고 있던 오래된 출입증을 다시 내려놓았다. 누군가가 자신에게 잃어버린 기억이 있다고 반복해서 말하면, 없는 기억까지 찾아내려 할 수 있었다. 그는 그런 방향으로 끌려가지 않기로 했다. 사건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증빙과 일어나도록 계산됐다는 전표를 반드시 구분할 것이다.
복구 기록 아래에는 사진 파일이 하나 더 있었다. 그것은 한빛자산신탁 회의실 사진이었다. 십 년 전의 날짜가 찍혀 있었다. 사진 안에는 다섯 사람이 있었고, 가장자리에는 젊은 민석이 고개를 숙인 채 서 있었다. 하지만 몇 초 뒤 사진이 흐려졌다. 민석이 눈을 깜박이자 사람의 숫자가 여섯 명으로 늘었다.
"서윤 씨, 몇 명 보여요?"
"여섯 명이요. 왜요?"
"저는 처음에 다섯 명이었어요."
민석은 사진을 다시 봤다. 여섯 번째 사람은 창가에 서 있었고 얼굴이 역광에 가려졌다. 은색 시계가 보였다.
화면 하단에는 설명이 붙었다.
[기록 상태: 미확정 선택으로 인한 다중 원본]
"원본이 여러 개일 수도 있다는 건가요?"
서윤은 천천히 답했다. "미래를 먼저 기록해 놓고 그중 하나를 현실로 만든다면, 폐기된 기록도 남을 수 있겠죠."
"그 기록을 폐기하면 사람들 기억도 없어지는 걸까요?"
"그건 아직 확인하지 못했어요."
민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적을 것이다. 그가 배운 회계의 첫 번째 원칙은 증빙 없는 거래를 신뢰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상한 장부 앞에서도 그 원칙만큼은 버리지 않기로 했다.
민석은 복원된 문장들을 종이에 그대로 옮겨 적었다. 알파벳으로 나뉜 미래의 분기와 실제 과거의 날짜를 구분하기 위해 다른 색의 펜을 썼다. 이 작은 차이가 앞으로 사건의 진실을 찾는 열쇠가 될 것 같았다.
정확히 여섯 시, 휴대전화에 원본 발급 알림이 떴다.
[위임 원본 발급 완료]
[발급인: 강민석]
[발급 시각: 2026.10.25 18:00]
민석은 알림을 눌렀다. 파일은 서명이 아니라 음성 녹음이었다. 재생 버튼을 누르자 자신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 정산을 수락하면 안 된다. 기록이 사람보다 먼저 존재하는 한, 누구도 진짜 수익자가 될 수 없다."
민석은 숨을 멈췄다. 목소리는 분명 그였다. 그러나 아직 하지 않은 말이었다.
녹음이 끝나기 전 누군가가 끼어들었다.
"그럼 증명해 보세요. 강민석 씨."
은색 시계를 찬 남자의 목소리였다.
[녹음 시간: 2026.10.25 23:59]
아직 여섯 시간이나 남은 시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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