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태어나지 않은 채권자라니, 무슨 뜻입니까?"
민석의 질문에 서윤은 바로 답하지 못했다. 두 사람은 구급차가 떠난 길을 바라봤다. 오전 햇살에 길바닥의 물웅덩이는 거의 말라 있었다. 그런데 민석의 휴대전화 속 숫자는 밤새 내린 비보다 더 선명했다.
[예정 수취 금액: +2,000,000원]
[거래 상대방: 아직 태어나지 않은 채권자]
그는 처음으로 돈이 들어온다는 예고가 전혀 반갑지 않았다.
"이선주 씨가 어느 병원으로 갔는지 확인해 볼게요." 서윤이 말했다.
"개인정보라 안 알려 줄 텐데요."
"기자로서 알아볼 수 있는 범위가 있어요. 하지만 환자한테 접근하는 건 다른 문제예요. 동의 없이 자료를 쓰지는 않을 겁니다."
민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서윤이 자료를 다루는 방식을 보며 조금씩 믿음이 생겼다. 그녀는 위험하다는 말만 반복하지 않았다. 모르는 사실은 모른다고 했고, 확인하지 못한 정보는 기사에 넣지 않았다.
준성에게는 전화가 연결되지 않았다. 오전 내내 부재중이었다. 민석은 어제의 카페 영수증 뒷면에 시간표를 그렸다. 첫 번째 칸에는 예고 발생 시각, 두 번째에는 실제 사건, 세 번째에는 정산 결과를 적었다.
'09:10 -10,000원 / 이선주 쓰러짐 / 현금 출금 없음 / 제3자 개입으로 취소 / +2,000,000원 신규 예고.'
민석은 마지막 줄에 물음표를 적었다. 이 모든 일이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이선주의 이름이 두 번 나왔다. 시스템이 그녀의 약값을 민석에게 정산한 이유는 무엇일까.
오후 세 시, 서윤이 병원에서 연락을 받았다. 환자의 가족이 취재 요청에 동의할지는 아직 모른다고 했다. 대신 구급대가 전달한 내용 가운데 기자가 공개적으로 확인 가능한 사실이 있었다. 이선주는 회사 도산으로 실직한 뒤 임시직을 전전했고, 최근에는 출산을 앞두고 있었다.
"출산이요?" 민석이 물었다.
"네. 임신 중이래요."
그는 은행 앱을 내려다봤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채권자'라는 문장이 어제와 다르게 읽혔다.
"애가 채권자라는 겁니까?"
"어떤 의미인지는 아직 몰라요. 다만 조심해야 합니다. 돈 때문에 한 사람의 사생활을 들춰서는 안 되니까요."
민석은 휴대전화를 잠갔다. 지하철에서 마주친 낯선 사람의 삶이 자신에게 연결돼 있다는 사실이 불편했다. 삼천구백 원을 잃지 않으려고 지갑을 집에 둔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타인의 약값과 목숨을 계산하는 장부를 보고 있었다.
그는 집에 전화를 걸었다. 어머니는 몇 번 신호음이 울린 뒤 받았다.
"민석아. 밥은 먹었니?"
평소라면 별생각 없이 넘겼을 질문에 민석은 한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몇 시간 전까지 그의 세계는 백억 원이라는 숫자 하나로 가득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들의 월급이나 앞으로 들어올 돈이 아니라 저녁을 먹었는지부터 물었다.
"먹었어요. 엄마는요?"
"그 보험 환급금 때문에 전화했니? 네 통장으로 들어간 거 맞지?"
"네, 들어왔어요. 그런데 왜 그걸 해약하셨어요? 오래 넣으셨잖아요."
수화기 너머에서 부엌 찬장을 닫는 소리가 났다.
"내가 그 돈을 쓸 일이 없으니까. 네가 학자금 대출 때문에 고생하잖아. 이참에 조금 갚으라고."
민석은 손으로 눈가를 문질렀다. 예고 금액 오백만 원을 봤을 때 그는 우선 '예측이 맞았다'는 사실에 놀랐다. 어머니의 오랜 저축이 자기에게 왔다는 사실을 그다음에야 생각했다. 숫자가 사람보다 먼저 오기 시작하면 이런 일이 생기는 모양이었다.
"엄마. 돈을 먼저 본 다음에 왜 그 돈이 생겼는지 나중에 알면, 좀 무섭지 않을까요?"
"무슨 소리니?"
"그냥 가끔 그런 생각을 해요."
어머니는 잠시 웃었다. "돈이 무서운 건 돈이 많아서가 아니야. 왜 생겼는지도 모르고 쓰는 돈이 무서운 거지. 네 아빠가 회사 다닐 때 늘 그랬어."
민석은 아버지가 영수증을 작은 상자에 모아 두던 일을 떠올렸다. 그는 어린 시절 그걸 구질구질하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그 상자가 있기에 돈이 어디서 왔는지 언제든 설명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네, 알겠어요. 엄마, 환급금은 당분간 안 쓸게요."
"왜? 대출부터 갚아라. 이자가 얼마나 비싼데."
"그건 맞는데요. 조금만 확인할 게 있어서요."
통화를 마친 뒤 그는 지갑에서 낡은 영수증을 꺼내 보았다. 자신이 결제한 만 원과 누군가 대신 납부한 이백만 원을 같은 종류의 거래라고 부를 수는 없었다. 확인된 출처가 없으니 이 금액을 받은 사람에게 고맙다는 말조차 함부로 할 수 없었다.
그는 다시 은행 앱을 확인했다. 환급금 오백만 원은 실제 계좌에 들어온 돈이었다. 원래 있던 보험 계약과 해약서도 있었다. 반면 백억 원은 실제 거래가 없었다. 두 거래를 같은 화면에서 봤다는 이유만으로 똑같이 취급해서는 안 됐다.
그는 노트에 선을 긋고 썼다. '증빙이 있는 거래와 없는 거래를 섞지 말 것.'
나중에 서윤이 그 문장을 읽고 말했다. "취재도 똑같아요. 분명히 본 것과 그렇게 믿는 걸 나누지 않으면 기사가 아니라 소설이 되니까요."
민석은 아주 오랜만에 제대로 웃었다. "그럼 우리 둘이 하는 일은 비슷하네요."
"적어도 거짓말하는 숫자를 잡아내는 일은요."
그렇게 대답한 서윤의 얼굴에는 피곤함이 역력했다. 민석은 편의점에서 산 생수를 건넸다. 당분간 이 일을 혼자 해결할 생각은 하지 않기로 했다. 다만 자신 때문에 다른 사람이 더 큰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정보를 넘길 때도 이유를 밝힐 것이다.
퇴근 시간이 가까워질 때 준성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이선주 찾지 마.]
[왜?]
[넌 지금 개입 비용을 낮게 평가하고 있어.]
민석은 바로 전화를 걸었다. 이번에는 연결됐다.
"사람이 쓰러졌는데 그냥 놔두라고?"
"구급차 불렀잖아. 잘한 일이지. 문제는 그다음이야."
"뭐가 문제인데?"
"개입한 순간 예고가 바뀌었지? 그게 시스템이 네 선택을 가격으로 매기기 시작했다는 뜻이야."
"거래 상대방이 아직 태어나지 않은 사람이라더라."
잠깐 침묵이 흘렀다. 준성이 말했다.
"그 문구가 떴다면,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멀리 와 버렸어."
"어디로?"
"미래에 생길 권리까지 네 장부에 넣는 단계."
"알아듣게 설명해."
"오늘 네가 한 일 하나 때문에 몇 년 뒤 누군가의 선택이 달라질 수 있잖아. 그 차이를 시스템이 지금 돈으로 표시하는 거야. 정확히 현금이 들어온다는 보장은 없어. 계약상 가치가 이백만 원일 뿐이지."
민석은 어처구니없는 웃음을 흘렸다. "한 사람 도와준 걸 이백만 원짜리 상품으로 보는 거야?"
"시스템은 사람이 아니야. 마음의 동기를 구분하지 못해. 결과만 계산해."
준성은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처음 꺼냈다. 그는 한빛자산신탁이 무너질 무렵, 인수합병 자문회사에서 회계 자료를 보는 일을 했다고 했다. 거래 규모가 큰 기업들은 작은 숫자를 표면적으로 숨길 수 있어도 전체 현금 흐름을 완전히 감출 수는 없었다. 그런데 한빛자산신탁 장부에는 회계상으로도 이해할 수 없는 돈이 있었다.
"같은 돈이 두 번 잡혔어. 첫 번째는 실제 거래일에, 두 번째는 거래가 일어나기 전날에. 처음엔 단순 전표 오류인 줄 알았지."
"그러다?"
"날짜가 앞선 전표가 늘 정확하다는 걸 알아챘어. 그걸 쓰기 시작한 거야."
"그래서 투자로 부자가 됐다고?"
"처음엔."
그가 짧게 답했다. "어느 날은 만 원이 들어온다고 떴어. 다음 날 정말 만 원을 받았지. 그러다 십만 원, 천만 원, 십억 원으로 커졌어. 그런데 큰돈이 걸린 거래부터는 누군가 똑같은 금액을 잃고 있더라고. 처음엔 시장 원리라고 생각했어. 돈을 버는 사람과 잃는 사람이 있는 건 당연하니까."
"지금은 다르게 생각하나?"
"금액이 아니라 선택권을 잃는 거였어."
준성의 마지막 문장은 민석의 등을 차갑게 만들었다. 이어 준성이 조용히 말했다.
"이선주를 찾아가지 마. 그녀한테 도움을 주고 싶다면 평범한 방법으로 도와. 시스템에 표시된 돈은 절대 먼저 받지 말고."
전화를 끊은 뒤 민석은 이백만 원의 세부 내역을 확인했다.
[실현 가능 시각: 출생일 이후]
[현재 현금화 권한: 없음]
다시 화면이 바뀌었다.
[채권 발생 근거: 생존 경로의 변경]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의 생존을 숫자로 판단하는 시스템. 민석은 그 불쾌함을 오래 씹었다. 돈을 벌 수도 있다는 기대보다, 이런 계산이 세상 어딘가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이 견디기 어려웠다.
그날 오후, 서윤이 연락했다. 이선주의 언니가 짧은 면담에 동의했다. 민석은 기자 신분이 아니라 구급 신고를 도운 시민으로서 만났다. 이선주는 회복 중이어서 면담에 참석하지 않았다. 언니는 고맙다는 말부터 했다.
"동생이 약값을 아끼려고 며칠을 버텼대요. 전화를 해 줬으면 좋았을 텐데."
민석은 고개를 숙였다. "운 좋게 곁에 있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누가 어제 병원에 비용을 대신 냈다고 하더라고요. 미지급금이 처리됐어요."
"누가요?"
"이름을 안 남겼대요."
언니는 동생이 다시 일자리를 찾을 때까지 잠시 자기 집에 머물게 할 생각이라고 했다. 병원비가 정리됐다는 사실도 기뻐하면서 동시에 불안해했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사람이 큰돈을 대신 냈다는 일이 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혹시 나중에 돈 달라고 찾아오면 어떡하죠?" 언니가 물었다.
민석은 답을 쉽게 하지 못했다. 실제로 그가 보는 장부에서는 병원비와 같은 금액이 정산됐지만, 누가 어떤 계좌에서 지급했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도움을 줬다는 이유만으로 새로운 빚을 지게 되는 것은 막아야 했다.
"병원에서 발급한 납부 확인서를 잘 보관하세요. 누가 비용을 지급했는지도 정식으로 확인해 보시고요. 혹시 낯선 계약서를 내밀면 바로 서명하지 마세요."
언니는 왜 그런 말까지 하는지 의아한 표정이었다. 민석은 설명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미래의 장부가 사람에게 선택을 요구한다고 말해 봐야 믿기 어려울 것이다. 그는 적어도 지금 필요한 건 납부 내역을 확인하고 서류를 보관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병원비가 얼마였는지 묻자 언니는 정확히 이백만 원이라고 대답했다. 민석은 가슴이 철렁했다. 그는 은행 앱을 확인했다. 예정 수취 금액 이백만 원이 '정산 완료'로 바뀌어 있었다. 하지만 계좌에 실제로 들어온 돈은 없었다.
돈은 들어오지 않았다. 대신 누군가의 병원비가 사라졌다.
"혹시 이선주 씨가 예전에 한빛자산신탁이라는 회사에 다녔나요?"
언니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그 이름을 어떻게 아세요?"
"그냥 확인할 게 있어서요."
"선주가 다녔던 곳이 아니라, 아버지가 투자하셨던 곳이에요. 거기 때문에 우리 집이 무너졌어요."
언니는 조심스럽게 서랍에서 오래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채권 신고 접수증이었다. 아버지의 투자금이 반환되지 않았을 때 가족이 보관하던 것이라고 했다. 민석은 금액을 보고 숨을 삼켰다.
[신고 채권액: 10,000,000,000원]
백억 원.
그에게 보이는 선입금액과 같았다.
"이거 진짜 아버님 돈입니까?"
"우리 아버지 돈일 리가 없죠. 서류에 적힌 투자금은 다른 고객 것까지 합쳐진 거예요. 아버지는 그 돈을 운용하던 직원이었어요. 그래서 누명을 썼죠."
"누가 썼다고요?"
"모르겠어요. 아버지는 누가 서명을 고쳤는지만 찾으면 된다고 하셨어요. 그러다 돌아가셨어요."
민석은 접수증의 하단에서 낯익은 필체를 보았다. 작고 둥근 숫자 7을 쓰는 모양, 서명 마지막에 남긴 긴 가로획. 자신의 필체였다.
'검토자 강민석.'
그는 다시 대학 시절 출입증을 떠올렸다. 일한 기억이 없는 회사. 서명한 기억이 없는 장부. 자기가 벌기 시작한 돈보다 먼저 자신에게 걸려 온 책임.
병원을 나오는 길에 휴대전화가 한 번 울렸다.
[이의 신청 처리 상태 변경]
[원본 발급 예정: 18:00]
[원본 제출자: 강민석]
여섯 시까지 두 시간도 남지 않았다. 민석은 서윤을 바라봤다.
"그때 저를 만나러 온 사람이 누군지 알아낼 방법이 있습니까?"
"십 년 전이라 쉽지는 않아요. 그런데 출입증이 있다면 회계법인 기록부터 찾을 수 있겠죠."
민석은 접수증에 적힌 자신의 서명을 머릿속에 그렸다. 그날 자신이 보지 못한 장부를 누군가가 확인하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때, 은행 앱에 처음 보는 한 줄이 나타났다.
[미래 정산 기록 제1호 원본 복구를 시작합니다.]
제5화 댓글 0
댓글·공감·신고는 로그인 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전 익명 댓글은 그대로 표시됩니다.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