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산 대리인은 카페의 빈 의자를 끌어 앉았다. 마치 오래전부터 이 자리에 예약해 둔 사람처럼 자연스러웠다.
"저는 질문에 답하지 않습니다. 제출된 자료의 일치 여부를 확인할 뿐입니다."
"질문에 답하지 않는데 명함은 왜 줘요?" 민석이 물었다.
"절차가 정당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회색 서류 봉투를 테이블에 놓았다. 봉투에는 '강민석'이라는 이름만 검은색으로 찍혀 있었다. 봉인 스티커를 떼자 결제 승인 내역이 나왔다. 작성일은 내일이었다.
[채권자: 강민석]
[채무자: 강민석]
[정산 예정 금액: 10,000,000,000원]
[원본 대조 상태: 동일성 미확인]
"내가 나한테 백억을 빌려준다고요?"
"회계적으로 불가능하지 않습니다. 서로 다른 시점의 당사자라면."
"법적으로는요?"
"현재 법은 이 거래를 상정하지 않았습니다."
민석은 서류의 두 번째 장을 읽다가 멈췄다. '추가 담보' 항목에 이름 세 개가 쓰여 있었다. 강민석, 정도현, 이선주. 마지막 이름 옆에는 주소 한 줄과 '생존 여부 미확인'이라는 표기가 있었다.
"이 사람들은 누굽니까?"
대리인은 조용히 봉투를 닫았다. "검증 권한이 없습니다."
"내 거래의 담보라면서요."
"서명하시면 권한이 생깁니다."
"서명을 안 해서 확인할 수 없는데, 확인하려면 서명하라니. 이건 계약이 아니라 함정 아닌가요?"
남자는 처음으로 민석을 유심히 쳐다봤다.
"당신은 이전 여섯 번에도 그렇게 말했습니다."
서윤이 고개를 들었다. "이전 선택의 기억을 지운 사람이 당신들입니까?"
"저희는 기록을 관리합니다. 기억에 관한 책임은 지지 않습니다."
"누구의 기록을요?"
"정산 참여자의 기록을요."
대리인은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았다. 그러나 민석은 봉투 안쪽에 인쇄된 작은 문구를 발견했다. '거래가 확정되기 전, 현금화 가능 금액은 0원'. 그러면 백억 원은 손에 쥔 현금도, 실제 채무도 아직 아니었다.
그는 증빙을 받기 위해 서윤에게 종이의 모서리를 촬영해 달라고 했다. 서윤이 사진을 찍자 대리인은 제지하지 않았다. 다만 사진을 확인하는 순간 종이에 있던 세 사람의 이름이 모두 '개인정보 보호' 문구로 바뀌어 있었다. 눈앞의 원본은 그대로였다.
"사람한테만 보여 주는 문서예요?"
"열람 권한의 범위가 다릅니다."
"사진에 생기는 변화까지 은행 시스템으로 설명할 건가요?"
대리인은 웃지 않았다. "은행 시스템이라고 말씀드린 적 없습니다."
민석은 그가 놓친 단서를 붙잡았다. '은행'이 아니었다. 은행 앱의 모양을 빌렸을 뿐 다른 무언가였다.
"그럼 돈을 주는 쪽이 있겠네요."
"정산에는 항상 상대방이 있습니다."
"백억 원을 누가 보냈죠?"
"내일의 강민석 씨입니다."
"내일의 제가 어디서 백억을 얻습니까?"
대리인은 서류를 정리했다. "거래 시점에 다시 만나실 수 있을 겁니다."
그는 명함을 내려놓고 나갔다. 자동문이 닫히는 동안 준성은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서윤은 대리인이 떠나자마자 옆 테이블에서 주문한 뜨거운 물을 받아 식은 커피를 희석했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저 사람, 처음 봅니까?" 민석이 준성에게 물었다.
"아니."
"이름은?"
"번호로 불러. 관리인 4번."
"은행도 아닌데 관리인이라니."
준성은 다시 입을 닫았다. 민석은 더 캐묻지 않았다. 겁을 먹은 사람은 중요한 정보부터 숨긴다. 준성에게는 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세 사람은 카페에서 나와 서윤의 차를 탔다. 민석은 자기 집으로 갈 생각이었으나 한서윤이 제안한 신문사 자료실에 먼저 가기로 했다. 그곳에는 도현이 죽기 직전 전달한 자료의 사본이 있었다.
차가 신호등 앞에 멈췄을 때 민석의 앱에 새 예고가 떴다.
[내일의 정산: -10,000원]
[예상 반영 시각: 09:10]
[거래 유형: 자유 사용]
"다른 예고가 생겼어요. 만 원입니다."
서윤이 핸들을 쥔 채 물었다. "원래 예고는 하나씩만 나타났어요?"
"네. 지금은 백억 원 거래도 있고 만 원짜리도 있네요."
준성이 뒷좌석에서 말했다. "그 정도는 써도 돼. 시스템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확인해 봐."
"또 실험이야?"
"네가 알고 싶은 건 원리잖아. 돈 버는 방법은 그다음이고."
민석은 만 원 예고를 유심히 보았다. '자유 사용'이라면 백억 원과는 성격이 달랐다. 그는 다음 날 오전을 기다리기로 했다. 그 사이에 무엇을 준비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 보통 사람은 돈을 벌기 위해 실험하지만, 그는 돈을 쓰지 않기 위해 실험하고 있었다.
신문사 자료실은 밤에도 밝았다. 도현이 남긴 봉투 속에는 일련번호가 적힌 종이가 여덟 장 있었다. 서윤이 한 장을 펼쳤다.
"도현 씨가 기록한 정산은 모두 누군가의 결정을 바꿨습니다. 이건 내일 십만 원을 잃는다는 예고를 받고 병원 예약을 취소한 날. 이건 오십만 원을 받는다는 예고를 보고 어머니를 찾아간 날. 금액보다 선택이 먼저 변했어요."
민석은 다른 종이에서 익숙한 문장을 발견했다.
'결과 승인: 외부'.
"이 표시가 언제부터 생겼죠?"
"다섯 번째 예고부터요."
"그전에는 없었어요?"
"없었죠. 도현 씨는 이 줄이 생긴 직후부터 자신을 감시하는 사람이 있다고 믿었어요."
민석은 첫날부터 세 번째 거래까지 자신의 승인 표시를 떠올렸다. 그는 처음부터 외부 승인을 받고 있었다. 그렇다면 누군가는 그가 처음 앱을 열기 전부터 준비하고 있었다.
서윤은 그날 밤 민석에게 작은 실험을 제안했다. 사람을 위험에 빠뜨리지 않는 범위에서, 서로 다른 세 가지 방법으로 예고를 검증해 보자는 것이었다. 한 번에 큰돈이 등장하면 시스템이 제시한 조건을 의심할 틈도 없이 결정하게 될 수 있으니, 가능하면 사소한 거래만 관찰하자는 생각이었다.
첫째는 예고가 떠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방식. 둘째는 같은 금액을 다른 목적으로 사용하는 방식. 셋째는 다른 사람이 자발적으로 개입하는 방식이었다.
"마지막은 어떻게 해요?" 민석이 물었다.
"누군가를 유도하면 실험이 아니죠. 실제로 선택한 사람이 있을 때만 기록하는 거예요."
민석은 종이에 세 칸을 그렸다. 선입금 백억 원을 보고 처음 느꼈던 공포가 조금 가라앉았다. 적어도 숫자를 기록하고 비교하는 일은 자신이 할 수 있었다.
그때 도현의 봉투에서 얇은 영수증 하나가 떨어졌다. 오천 원짜리 음료를 산 내역이었다. 뒷면에는 짧은 메모가 있었다.
'예고된 금액을 쓰지 않는다고 끝나지 않는다. 쓰지 않은 돈을 누가 썼다고 처리하는지 봐야 한다.'
민석은 그것을 읽고 한참 말이 없었다. 사원증 고리를 구매한 날 자신은 선택을 바꿨다고 믿었다. 그러나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그때만 해도 미래가 고정됐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도현의 메모는 전혀 다른 가능성을 암시했다. 자신의 지출이 아니더라도 같은 금액을 다른 누군가에게 떠넘길 수 있다는 가능성.
"그럼 내 계좌에서 빠져나가지 않았는데, 나와 관련된 다른 거래가 정산될 수 있다는 말이네요."
서윤이 답했다. "그래서 두 개의 잔액이 중요하겠죠. 눈에 보이는 금액과 실제 계좌 금액을 따로 적어야 해요."
민석은 노트의 표에 새로운 열을 그었다. '정산 결과를 부담한 사람'. 처음에는 빈칸이었다. 이름을 추측해서 넣지 않기로 했다. 증거가 나오면 적을 것이다.
서윤은 자료실의 형광등을 끄기 전에 한 가지를 더 물었다.
"그런데 강민석 씨는 왜 이렇게까지 하세요? 그냥 휴대전화 초기화하고 평범하게 살 수도 있잖아요."
민석은 대답하기 전에 월급날을 떠올렸다. 잔액을 확인하자마자 자동이체 예정액을 계산해야 했던 평범한 아침. 낯선 백억 원이 생겼을 때 처음 든 생각은 부모님께 빚을 갚아 드릴 수 있겠다는 것이었다. 그러고 나서야 무서워졌다.
"저도 돈 좋아해요. 아침에 통장 보면 다 내 돈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십만 원을 벌었다고 믿었는데 알고 보니 남의 병원비였다면, 그건 너무 끔찍하잖아요."
"실제로 그렇다는 증거는 아직 없어요."
"그래서 확인하려고요. 아니라면 다행이고, 맞다면 적어도 제가 그 돈을 쓸 때는 알고 써야죠."
서윤은 대답 없이 노트 한쪽에 시간과 장소를 적었다. 밤 열두 시를 넘기기 전, 둘은 각자 잠깐이라도 눈을 붙이기로 했다. 민석은 신문사 휴게실의 작은 소파에 누웠다. 핸드폰은 이불 바깥에 두었다. 화면에서 백억 원이 보이든 말든, 몸은 여전히 피곤했다.
눈을 감자 어린 시절 어머니가 가계부를 쓰던 모습이 떠올랐다. 어머니는 돈이 생기면 먼저 어디서 들어왔는지 적고, 돈을 쓰면 누구를 위해 썼는지 적었다. 간단한 습관이었다. 민석은 아마 그때부터 장부를 믿게 됐을 것이다.
그가 잠에서 깼을 때는 오전 여덟 시였다. 백억 원의 시계는 여전히 멈춰 있었다. 하지만 새로운 만 원짜리 예고는 한 시간 뒤로 다가오고 있었다.
아침 아홉 시가 되자 민석은 신문사 근처 편의점에 섰다. 어젯밤 함께 자료를 읽던 서윤은 건너편에서 망원 렌즈를 든 카메라를 점검하고 있었다. 준성은 아예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민석은 만 원을 쓰지 않기로 했다. 지갑은 주머니에 있었지만 가게에 들어가지 않았다. 9시 9분 50초. 아무 일도 없었다. 그는 계좌 잔액을 확인했다.
[내일의 정산: -10,000원]
9시 10분. 휴대전화가 짧게 울렸다.
[자유 사용 정산 완료: -10,000원]
그런데 출금 가능 잔액은 그대로였다.
"돈이 안 빠졌는데 정산됐어요."
서윤이 다가왔다. "그러면 장부상 돈인가요?"
민석이 세부 내역을 열었다.
[거래 상대방: 이선주]
[정산 방법: 비금전 대체]
"어제 서류에 있던 사람입니다."
그 순간 횡단보도 맞은편에서 여성이 쓰러졌다. 서윤이 먼저 달려갔고 민석이 따라갔다. 여성은 의식이 있었지만 구급차를 부를 만큼 호흡이 가빴다. 지갑에는 이선주라는 이름이 적힌 주민등록증이 있었다.
민석은 자신의 은행 앱을 다시 열었다. 새로운 문구가 나타났다.
[거래 완료 사유: 지급 예정 약품 미구매]
이선주의 손에는 접힌 처방전이 있었다. 편의점 옆 약국에서 약을 사려고 나왔다가 급히 현금을 찾느라 들르지 못했다는 말이 들렸다. 약값은 정확히 만 원이었다.
"잠깐만요." 민석은 직원에게 물었다. "이분 약, 지금 구할 수 있습니까?"
약사는 처방전을 확인하더니 복용 시간을 놓친 상태라며 119 지시에 따르도록 안내했다. 민석은 구급대가 도착할 때까지 자리를 지켰다. 돈을 냈느냐 안 냈느냐보다 이 일이 왜 자기 정산 내역으로 들어왔는지가 더 두려웠다.
구급차 문이 닫히자 그의 휴대전화 화면이 바뀌었다.
[정산 차액 조정: +10,000원]
[조정 사유: 제3자 개입]
서윤은 구급대에게 마지막으로 들었던 이야기를 되짚었다. 이선주는 정기적으로 복용하는 약이 있었고, 약값을 아끼느라 처방받은 날짜를 넘긴 상태였다고 했다. 민석은 그녀의 상황을 함부로 추측하지 않기로 했다. 다만 편의점에서 만 원을 쓰지 않겠다고 결정한 자신의 행동과, 누군가 만 원을 마련하지 못한 일이 같은 정산 내역에 잡혀 있다는 사실만 기록했다.
"제가 만 원을 썼으면 이분이 안 쓰러졌을까요?" 민석이 물었다.
"그건 알 수 없어요." 서윤이 말했다. "우리가 같은 시간에 본 일이 연결되어 있다고 해도, 원인과 결과가 무엇인지는 아직 모르니까요."
민석은 노트의 한 칸에 '인과관계 미확인'이라고 적었다. 처음으로 그는 예고가 맞지 않은 것을 기뻐하지 않았다. 자신이 만 원을 아낀 것이 누군가에게 손해가 될 수도 있다고 의심해야 하는 상황이 마음에 걸렸다.
방금 전의 마이너스 만 원이 사라졌다. 대신 상단에 새로운 숫자가 붙었다.
[내일의 정산: +2,000,000원]
[결과 승인: 강민석]
"제가 승인한 적 없는데요."
민석이 속삭였다.
서윤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방금 그분을 도운 것 때문에 생긴 걸까요?"
민석은 휴대전화에 나타난 새 숫자를 몇 번이나 확인했다. 구급차가 떠난 자리에는 바람만 남아 있었다. 그는 사람을 도왔다는 안도감과 그 일을 금액으로 계산했다는 섬뜩함 사이에서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민석은 고개를 저었다. 도움을 준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대가로 이백만 원을 받을 이유는 없었다. 그는 화면을 아래로 내렸다. 상대방 이름이 뜨는 자리에는 낯선 문장이 있었다.
[거래 상대방: 아직 태어나지 않은 채권자]
그 문장을 보는 순간 민석은 알았다. 백억 원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이 시스템은 사람의 생존과 선택을 돈으로 환산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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