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석은 사진을 확대했다.
사진 속 남자는 분명 자신이었다. 오른쪽 눈썹 끝의 작은 흉터, 왼쪽 볼에 남은 희미한 여드름 자국까지 일치했다. 배경은 낡은 은행의 대기실이었다. 그가 꿈에서 보았던 창구처럼 길게 늘어선 번호표 기계가 있었다.
다만 사진의 날짜가 문제였다. 내일 밤 열한 시 오십구 분. 아직 오지도 않은 시간에 촬영된 사진이 오늘 도착했다. 이름부터 '사망 예금주 확인서'였다.
"이걸 보낸 사람이 저를 죽이겠다는 협박일 수도 있잖아요."
민석의 목소리가 생각보다 차분해서 그 자신이 놀랐다. 겁이 없어져서가 아니었다. 무서운 것을 숫자로 분류하지 않으면 금방 무너질 것 같았다.
서윤은 사진을 오래 봤다. "이 파일을 그대로 제게 보내 줄 수 있어요?"
"캡처가 안 됩니다. 숫자가 까맣게 변하거든요."
"원본 공유 기능은요?"
민석이 버튼을 눌러 보자 '권한 외 열람 불가'라는 문구가 떴다. 옆에서 보던 준성이 말했다.
"기자한테 휴대전화 화면으로 보여 줘. 그녀가 적을 수는 있어. 사진을 남길 수는 없지만."
서윤은 이미 수첩을 펴고 있었다. "은행 창구 번호요. 왼쪽 아래에 04라고 써 있어요. 사진 구석에 영업점 코드 같은 게 있는데, 뒤 두 자리만 보이네요."
준성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어딘지 알아?" 민석이 물었다.
"아마 폐점한 지점일 거야. 십 년 전에 문 닫은 곳."
"왜 너는 그런 걸 알아?"
준성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차 문을 열었다. "일단 타. 비 맞으면서 이야기할 내용은 아니야."
서윤이 즉시 고개를 저었다. "저 차에 타지 마세요. 도현 씨가 마지막으로 탄 것도 검은 승합차였어요."
준성의 표정이 딱딱해졌다. "내 차는 아니었어."
"운전석에 있던 사람이 당신하고 연락한 기록이 있어요."
민석이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둘 다 저한테 거짓말하고 있죠? 적어도 중요한 걸 빼먹고 있어요."
차를 타지 않기로 했다. 세 사람은 건물 1층의 스물네 시간 영업하는 카페로 들어갔다. 손님이 몇 명 있었고, 방범 카메라도 눈에 띄었다. 민석은 출입문이 보이는 자리에 앉았다. 어머니에게 '오늘 늦는다'고 메시지를 보내고 휴대전화를 테이블 한가운데 놓았다.
화면의 선택 시계는 여전히 열한 초에서 멈춰 있었다.
"먼저 묻겠습니다." 민석은 서윤을 바라봤다. "도현 씨가 죽기 전에 뭘 했어요?"
"저를 찾아왔어요. 제보하고 싶다고 했죠."
"무슨 제보요?"
"자기 통장에 미래의 돈이 찍힌다는 이야기. 처음에는 제보자가 장난치는 줄 알았어요. 숫자를 맞히는 것만으로는 기사가 안 되니까 거래 내역과 통화 기록을 요구했어요."
서윤은 가방에서 작은 투명 파일을 꺼냈다. 안에는 복사한 카드 매출전표와 보험 해약 내역, 손글씨 메모가 있었다. 민석이 며칠 동안 해 온 검증과 비슷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도현의 기록에는 파란색과 빨간색 펜으로 된 두 줄이 늘 같이 있었다.
'표시된 금액'과 '실제로 움직인 돈'.
어느 날부터 두 줄은 일치하지 않았다.
"처음 세 번은 금액도 시간도 정확했어요. 네 번째에는 예고된 십오만 원이 다른 사람에게 들어갔죠. 다섯 번째에는 돈을 한 푼도 안 썼는데 백만 원이 정산됐고요."
민석이 물었다. "계좌에서 빠져나갔습니까?"
"장부상 잔액만 바뀌었어요. 은행에서는 그런 거래가 없다고 했고요. 그날부터 도현 씨는 두 개의 잔액을 보게 됐어요."
서윤은 파일 맨 아래에서 작은 휴대용 녹음기를 꺼냈다.
"이것도 들려드릴게요."
작은 기계는 낡고 여러 번 떨어뜨린 자국이 있었다. 도현이 쓰던 것이라고 했다. 그는 휴대전화 화면에 미래의 숫자가 떠올랐을 때부터 녹음기를 별도로 가지고 다녔다. 사진이 변해도 소리는 남는지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재생 버튼을 누르자 잡음 뒤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십오만 원은 제가 받았습니다. 분명히 받았는데, 다음 날 거래를 조회하니까 다른 사람이 받았더군요. 같은 돈을 두 사람이 받았을 수는 없어요.'
잠깐 정적이 이어졌다.
'나는 부자가 된 게 아니었습니다. 아직 오지 않은 사람한테 빌린 거예요.'
녹음이 끝났다. 민석은 테이블의 물기를 손가락으로 닦았다. 도현의 목소리는 무서워하면서도 또박또박했고, 끝까지 거래의 출처를 확인하려 했다. 동료 회계 담당자의 목소리처럼 느껴졌다.
"도현 씨가 누구를 만나러 갔는지 남아 있나요?"
"만날 장소는 있었어요. 폐점한 은행 지점 근처라고만 했죠. 약속을 잡은 메시지는 상대방 이름 없이 지워졌어요."
"그럼 왜 경찰은 추락사로 결론 내렸어요?"
"시신이 발견된 장소에 추락을 설명할 수 있는 구조물이 있었고, 타살을 확정할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만 경찰이 놓친 걸 입증할 증거는 아직 없어요."
민석은 녹음기를 한 번 더 바라봤다. 같은 금액이 여러 계좌에 나타난다는 말은 재무제표의 '이중 계상'을 떠올리게 했다. 거래가 실제인지 가상인지 구분하지 않는다면 한 사람의 부가 다른 사람의 빚으로 자라날 수 있었다.
"도현 씨는 왜 기자님을 찾아온 거죠?"
서윤은 대답을 고르는 듯 입술을 다물었다가 말했다.
"처음에는 제가 투자 사기를 취재하고 있었어요. 피해자 가족들이 같은 말을 반복했죠. 돈을 잃기 전날 계좌 잔액이 잠깐 늘어났다고요. 신고하려고 캡처한 사진에는 정상 잔액만 남았대요. 그걸 단순 전산 오류로 넘길 수 없어서 취재를 계속했습니다."
"신문사에선 믿어 줬습니까?"
"증거가 없었으니까요. 편집국장도 가설과 사실을 분리하라고 했어요. 저도 그 말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료를 모으고 있었어요. 그러다 도현 씨가 찾아온 거죠."
"그 사람을 지키지 못했다고 생각해요?"
서윤은 잠시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차량 불빛이 비에 젖은 도로 위로 번졌다.
"제가 마지막 통화에 응답했더라면 무언가 달라졌을지도 몰라요. 그렇다고 그게 제 책임이었다고 생각하면 취재가 흐려지겠죠. 지금은 그가 왜 두 개의 잔액을 봤는지 증명하는 게 먼저예요."
민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서윤의 신중함은 겁이 많아서가 아니었다. 자기 감정이 사실을 대신하는 순간 누군가에게 더 큰 피해가 갈 수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노트에 '도현의 녹음 원본 존재'라고 적었다. 미래 앱이 어떤 화면을 보여 주더라도 자신이 직접 듣고 만진 물건의 존재까지 취소할 수는 없기를 바랐다.
민석은 자신의 은행 앱 상단을 보았다. 백억 원이 포함된 현재 잔액과 삼백여만 원의 출금 가능 잔액. 도현도 같은 단계까지 갔던 것이다.
"은행 서버에는 돈이 없다는 거군요."
"문제는 없던 돈이 어느 순간 실제 돈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겁니다." 서윤이 말했다.
준성이 말을 받았다. "그러니까 내일의 정산이야. 시스템은 거래 결과를 먼저 적고, 현실이 그 거래를 따라가도록 선택지를 제시해."
"시스템이 현실을 바꿔?" 민석이 물었다.
"그렇게 보일 수밖에 없지."
"그럼 매번 다 들어맞는 이유도 설명돼? 택시비, 중고 거래, 보험 환급금. 전부 누군가 강요한 게 아니었는데."
준성은 종이 냅킨을 펼쳤다. 펜으로 두 개의 칸을 그렸다.
'발생 가능한 거래'와 '확정된 거래'.
"내일 네가 택시를 타게 될 확률이 높았다고 치자. 시스템은 그중 하나를 택해서 미리 써 놓는다. 네가 다른 행동을 해도 결국 그 값으로 가도록 주변 사건을 배치하는 거야. 넌 우연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누가 배치하는데?"
"나도 몰라."
서윤이 비웃었다. "그 말을 믿으라고요?"
준성은 냅킨을 구겼다. "믿든 말든. 나는 사람을 설득하려고 온 게 아니야."
민석은 그 문장을 머릿속에 담았다. 준성이 '나도 몰라'라고 대답한 건 그날 처음이었다. 거짓말일 수 있었다. 그러나 진실을 모르는 부분이 있다는 사실 자체는 그럴듯했다.
그는 서윤이 내놓은 도현의 마지막 메모를 봤다.
'계약서를 읽지 못하면 죽는다. 계약서를 읽으면 내가 죽어 있는 이유를 알게 된다.'
"무슨 뜻이죠?"
"도현 씨는 거절 버튼을 누르고 나서 자신의 장례식 사진을 받았어요. 당신하고 같습니다."
민석의 손끝이 움찔했다. "하지만 전 거절을 누르지 않았어요."
서윤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당신은 아직 질문할 수 있어요."
카페의 벽시계가 여덟 시를 가리킬 때 민석은 사진 속 창구를 자세히 보았다. 번호표 기계 옆 포스터에는 은행이 아니라 오래된 투자신탁 회사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한빛자산신탁'. 민석이 대학을 졸업하기도 전에 사라진 회사였다.
준성은 그 이름을 듣자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민석이 팔을 붙잡았다.
"너, 거기서 일했어?"
"아니."
"그러면?"
"그 회사가 없어지기 전, 그곳에 돈을 맡긴 적은 있지."
"얼마나?"
"내 돈은 아니었어."
민석이 웃었다.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났다. "그래서 그때도 남의 돈으로 미래를 산 거야?"
준성은 민석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네가 그 말을 할 자격은 없어."
"왜?"
"한빛자산신탁 장부를 마지막으로 정리한 사람이 너니까."
"내가? 그 회사는 제가 대학생 때 없어졌잖아요."
"넌 기억을 못 하는 거야."
서윤이 끼어들었다. "증거 없는 이야기로 겁주지 마세요."
"네가 가진 증거보다 더 좋은 걸 보여 줄까?" 준성은 주머니에서 얇은 플라스틱 카드를 꺼냈다. 색이 바랜 출입증이었다. 사진은 지금보다 앳된 민석의 얼굴이었다. 이름 아래에는 '외부 감사 보조'라는 직함이 있었다.
그는 플라스틱 카드의 모서리를 만졌다. 표면은 오래되어 매끈했고, 사진을 덮은 코팅은 다른 부분보다 조금 새것처럼 보였다. 오래된 출입증에 최근 사진을 붙이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그가 할 수 있는 첫 번째 검증은 사진 속 사람이 자신인지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카드가 언제 누구 손에서 만들어졌는지 알아내는 일이었다.
"발급 기록이 남아 있을까?" 민석이 물었다.
준성은 "아마 폐업 자료에 있을 거야"라고 대답했다. 서윤은 카드 뒷면의 번호를 수첩에 적었다. 번호는 HBT-2016-07이었다. 민석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아까 백억 원 선입금에 붙은 거래 식별번호와 정확히 같았다.
"출입증 번호가 왜 거래번호랑 같지?"
준성은 그제야 카드 뒷면을 확인했다. 그의 입에서 낮은 욕설이 새어 나왔다. 우연히 주운 카드가 아닐 수도 있었다. 누군가 민석을 이 돈과 연결하려고 일부러 만들어 놓은 물건일 가능성이 생겼다.
민석은 출입증을 받아 들었다. 자기 얼굴이었다. 회사명도, 직함도 선명했다. 발급일은 십 년 전이었다. 대학생 신분으로 회계법인 아르바이트를 한 적은 있었지만, 그런 출입증을 받은 기억은 없었다.
"이거 위조한 거 아냐?"
"네가 쓰던 사원증 뒤에 있던 거야. 예전부터 네가 가지고 있었어. 오늘 끊어진 고리 때문에 보안팀에 맡겼던 그 사원증."
민석은 옷깃에 걸린 새 사원증을 만졌다. 무언가를 지키려고 새 고리를 사야 했던 사소한 사건이 갑자기 다른 의미를 가졌다. 삼천구백 원짜리 예고는 출입증을 노출시키기 위한 계산이었을지도 몰랐다.
"그럼 보안팀에서 왜 말하지 않았지?"
준성은 카페 밖을 봤다. "어떤 기록은 보여 줄 사람을 정해 놓고 나타나."
서윤이 출입증을 촬영했다. 이번에는 사진이 정상적으로 찍혔다. 민석은 처음으로 안도했다. 최소한 이 카드만큼은 외부 세계의 증거로 남았다.
휴대전화가 다시 진동했다.
[이의 신청 추가 자료 도착]
[사망 예금주의 신분 확인 자료를 검토하십시오.]
파일에는 지문과 주민등록 정보 대신 문장 하나만 있었다.
'강민석은 2026년 10월 25일 23시 59분, 7회차 선택을 수락하였다.'
"아직 그날도 그 시각도 안 왔는데, 수락했다고 적혀 있네."
민석은 화면을 아래로 내렸다. 하단에는 작은 글씨가 숨어 있었다.
[사망 사유: 미래 정산 대상의 현재 이탈]
그 뜻을 묻기도 전에 카페 자동문이 열렸다. 회색 정장을 입은 남자가 들어왔다. 그는 주문도 하지 않고 세 사람의 테이블을 향해 걸어왔다. 오른쪽 손목에 은색 시계가 있었다.
준성이 천천히 일어섰다.
"여기까지 오실 필요는 없었는데요."
남자는 민석에게 고개를 숙였다.
"미래의 서류를 확인하러 오셨다고 들었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이상할 만큼 낮고 차분했다.
"제가 담당자입니다."
민석은 출입증을 주머니에 넣었다.
"어느 은행 담당자죠?"
남자가 명함을 뒤집어 내밀었다. 회사명도 전화번호도 없었다. 흰 종이에는 딱 네 글자만 인쇄돼 있었다.
'정산 대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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