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가 크게 보인다는 이유만으로 자산의 가치가 커지는 것은 아니었다. 황기태는 투자 자료를 읽다 말고 계산기를 내려놓았다. 그의 앞에는 서로 다른 세 개의 금액이 적혀 있었다.
100억 원. 민석의 화면에 처음 나타났던 개인 예상 손실.
1,000억 원. 익일금융이 보관인 증빙으로 제시했던 일부 계약의 평가 규모.
확인되지 않은 지급 총액. 실제로 각 신청인에게 얼마나 돌아가야 하는지는 아직 계산되지 않았다.
준성이 이마를 찡그렸다.
“왜 그 회사는 불확실한 걸 천억이라고 팔았을까요?”
“가치를 높게 평가했다고 주장할 수는 있어요. 하지만 그런 평가가 실제 지급액이나 자산 보유를 증명하지는 않죠.” 기태가 말했다.
하은은 위험 분류표를 펼쳤다. 하나의 지급 요청을 ‘완료된 청구권’과 ‘대조 가능한 데이터 사용권’으로 두 번 세었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중 두 번째는 누군가의 정보 사용 동의를 필요로 했다. 원래 신청인이 거절했거나 침묵했다면 그 데이터의 가치를 어떻게 산정했는지부터 다시 살펴야 했다.
“그럼 누구도 입금받지 못한 건이 두 개의 가치를 만들어 낸 거네요.” 민석이 말했다.
“그렇게 계산했는지 조사 중입니다. 다만 적어도 중복 평가 위험은 확인됐어요.”
이날 오전 익일금융은 외부 투자자들에게 수정 안내문을 발송했다. 문구에는 ‘대조 완료’와 ‘지급 완료’의 구분이 포함돼 있었다. 기존 가치 평가에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내용도 적혔다. 무너진 신뢰는 안내문 한 장으로 복구되지 않았다. 그러나 잘못된 문구가 계속 복사되는 것을 늦출 수는 있었다.
서윤은 투자 설명회를 찾아갔다. 취재에 동의한 소규모 투자자는 자신이 금융 전문가도 아니며 회사의 설명을 전적으로 믿었다고 말했다.
“보관인 확인이라는 문구가 있으니까 누가 책임지고 확인한 줄 알았습니다.”
“그 문구를 보고 어떤 결정을 하셨나요?” 서윤이 물었다.
“투자 설명회를 더 들어 보기로 했어요. 실제 계약은 안 했습니다.”
서윤은 그의 말 그대로 기록했다. 투자 손실이 발생했다고 쓸 수는 없었다. 그러나 불완전한 검증 표시가 사람의 의사결정에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은 분명했다.
다른 참석자는 돈을 투자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계약서 공개를 원하지 않았다. 서윤은 금액을 요구하지 않았고, 이후 정식 조사 과정에서 피해를 입증할 수 있는 자료를 보존하라는 일반적인 안내만 전달했다.
한편 민석은 최은정의 수선집을 찾았다. 작은 전기난로 앞에서 은정은 겨울 점퍼의 지퍼를 갈고 있었다.
“아주머니, 천 원 건은 담당 은행과 확인 중입니다. 제가 받은 검증용 천 원은 아주머니 돈이라고 할 수 없어요.”
은정은 안경을 벗고 웃었다.
“천 원보다 그 말이 고마워. 예전엔 다들 돈 줬다면서 나한테 받았다고 서명하래서, 내가 늙어서 모르는 건가 했거든.”
민석은 말문이 막혔다. 작은 금액을 잘못 적은 사람들은 금액이 작아서 괜찮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은정이 잃을 뻔한 것은 돈보다 자신의 기억을 믿을 권리였다.
가게를 나오며 준성이 물었다.
“그러면 우린 언제 큰돈을 버냐?”
민석이 그를 노려보자 준성이 양손을 들었다.
“농담. 분위기 좀 바꾸려고.”
“나도 가끔 생각해. 처음엔 그 돈만 있으면 뭘 할지 상상했잖아.”
“그런데?”
“그게 남의 돈일 수 있다고 생각하니 금액이 무섭더라.”
상담 현장을 떠난 뒤 하은이 서윤에게 전화를 했다. 일부 중개 업체가 새 안내문을 받았는데도 예전 실사표를 내부 자료로 계속 쓰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미 외부로 전송된 사본은 원본을 수정했다고 함께 고쳐지지 않았다.
“정정 통지를 받은 업체가 실제로 바꿨는지 확인할 수 있습니까?” 서윤이 물었다.
“회신 의무가 있는 계약 상대부터 확인할 겁니다. 하지만 공개된 문서를 내려받은 사람까지 모두 찾을 수는 없어요.”
민석은 이야기를 듣다가 생각했다. 백억이라는 숫자 하나를 믿었던 자신도 그 정보가 처음 어디서 왔는지 모른 채 준성에게 보여 줬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누구든 오해의 전달자가 될 수 있었다.
“이럴 때 원장이 정말 미래를 알려 준다면 좋겠네.” 준성이 말했다. “누가 다음에 저 문서를 볼지 미리 알 수 있으니까.”
“그럼 또 원장을 믿게 될 거야.” 민석이 답했다. “나는 이제 누가 볼지 예측하는 것보다 틀린 자료라는 표시를 남기고 싶어.”
그들은 기관에 정정 공고를 원자료와 함께 보관해 달라는 요청을 전달했다. 나중에 문서가 독립적으로 유통되더라도 어느 시점에 무엇이 잘못됐는지 확인할 방법이 필요했다.
준성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농담처럼 말했다. “네가 원장 운영자라면 어떻게 만들래?”
“큰 숫자부터 보여 주는 건 빼겠어.”
“그럼 아무도 안 쓸걸.”
“적어도 손해를 덜 보겠지.”
“세상에서 제일 재미없는 금융 앱이네.”
“그래서 더 필요한지도 몰라.”
늦은 밤, 민석에게 정식 열람 절차 안내가 왔다. 11월 30일 아홉 시. 보관기관에서 첫 번째 지급 대조를 진행한다. 이해관계자가 아닌 사람은 신청인의 허락 없이는 참석할 수 없으며, 당사자가 원하면 언제든 열람 범위를 줄일 수 있었다.
그와 동시에 검은 원장에는 다른 일정이 떴다.
[11월 30일 09:05 — 보관인 권한 자동 복원]
[원인: 대조 미완료]
[승인 예정: SERVICE-M36]
민석의 손끝이 차가워졌다. 하은이 확인한 내부 업무 일정에는 자동 복원 작업이 없었다. 공식 자료만으로는 누가 이 시간을 예약했는지 알 수 없었다.
민석은 세린에게 화면을 전달했다. 권한을 가진 감사 담당자가 기술 로그를 보전하고 관련 계정의 예약 작업을 점검하도록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이번에는 검은 원장의 시간을 기다리지 않기로 했다. 누군가 아홉 시 오 분을 무기로 삼으려 한다면, 아홉 시가 되기 전에 그 무기를 멈춰야 했다.
제87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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