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이라는 연도가 등장하자 박준성은 제일 먼저 오래된 계약 문서부터 찾았다. 그때는 익일금융이 지금 이름으로 영업하기 전이었다. 지급 기록 보관 업무가 외부 업체로 넘어가고, 여러 협력사가 데이터를 서로 교환하던 시기였다.
“돈이 아니라 파일이 거래됐다는 얘기네.” 준성이 말했다.
“파일도 허가된 목적 안에서만 전달해야 했을 겁니다.” 세린이 답했다.
하은이 외부 감사에 제출된 문서 요약본을 가져왔다. 제목은 ‘장기 미확정 상태 자동 종료 검토’. 열 해가 지나도록 대조하지 못한 건을 정리하는 기능이었다. 서류만 보면 보관 비용을 줄이기 위한 평범한 업무 개선이었다.
그러나 첨부된 화면 예시에는 낯익은 문장이 보였다.
‘정해진 기한까지 이의가 없으면 완료로 전환한다.’
민석은 목이 말랐다. 익명 신청인은 2016년에 이미 이의를 제기했다. 2018년의 예외 규칙이 그 이의 제기를 이어받지 못했다면, 사람은 분명 거절했는데 시스템은 아무도 거절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의가 없는 사람과 이의를 냈는데 전달이 안 된 사람을 구분 못 한 거잖아요.” 민석이 말했다.
예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가장 위험해요. 원본이 없으면 침묵이 동의처럼 보입니다.”
기태는 덧붙였다. 자동 종료라는 말이 곧 실제 자금 이체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완료라고 정리된 자료가 보관인 자격이나 청구권 평가의 입력값으로 사용됐다면 다른 문제가 발생한다.
서윤은 이 차이를 기사 초안에 따로 표시했다. 돈이 옮겨졌는가. 상태만 바뀌었는가. 바뀐 상태를 근거로 누가 돈을 움직였는가. 셋을 섞으면 누구나 거대한 음모를 말할 수 있고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게 된다.
그날 오후 민석의 검은 원장에는 작은 숫자가 새로 나타났다.
[내일의 소액 출금: 2,710원]
[유형: 정산 화면 검증]
[처리 예정: 다음 날 08:40]
그는 한동안 그 숫자를 바라봤다. 처음 백억 원이 나타났을 때보다 오히려 긴장됐다. 다음 날 아침 실제 통장에서 2,710원이 빠져나간다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누군가 그 결제를 예약했을 수 있고, 자신도 모르는 서비스가 청구했을 수도 있다. 미래를 미리 안다는 증거는 여전히 없었다.
민석은 곧장 은행 앱의 자동이체와 카드 승인 예정 내역을 확인했다. 2,710원짜리 거래는 없었다. 세린의 조언을 받아 금융기관에 해당 거래의 존재 여부를 문의했지만 예정 정보가 없다는 안내만 받았다. 그는 원장의 문구를 캡처하고 기태에게 전달했다.
“그 시간엔 뭘 할 생각입니까?” 기태가 물었다.
“아무것도 안 할 겁니다. 지켜만 볼 거예요.”
“카드와 계좌 정보를 유출한 데가 없는지도 확인하세요. 누군가 의도적으로 작은 거래를 만들어 맞힌 척할 수도 있습니다.”
민석은 비밀번호를 바꾸고 접근 기록을 점검했다. 원장이 무슨 짓을 하든 자신이 먼저 서명하거나 결제하지 않기로 했다.
민석은 전날 밤 불을 끄고 누웠다가 다시 일어나 휴대전화 충전기를 뽑았다. 검은 원장이 와이파이를 쓰는지, 휴대전화 자체에서 계산하는지도 정확히 알지 못했다. 하지만 임의로 통신을 끊었다가 결과가 달라지면 또 해석이 어려워진다. 기태와 상의한 끝에 현재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발생한 현상만 기록하기로 했다.
다음 날 아침 준성은 편의점에서 커피 두 잔을 샀다. “이거 대조 수당이다.”
“뭐 하는 수당?”
“네가 미래의 천억 원을 굳이 거절하면서 현재의 나한테 노동을 시킨 수당.”
둘은 농담을 주고받았지만 여덟 시 삼십오 분부터는 말을 멈췄다. 은행 앱에 표시되는 실제 입출금 내역과 원장 알림을 분리해 기록하기 위해서였다. 민석은 미리 준비한 표의 첫 줄에 ‘검은 원장 주장: 2,710원’이라고 썼다. 둘째 줄에는 ‘공식 앱 실제 거래: 아직 없음’이라고 적었다.
준성이 물었다. “만약 돈이 정말 빠지면 어쩔 거냐?”
“먼저 은행에 확인해야지. 왜 빠졌는지.”
“그다음엔?”
“내일을 알았다고 좋아하는 건 그다음에도 늦지 않아.”
그의 목소리에는 조금도 허세가 없었다. 수많은 숫자가 맞는 순간을 찾아 뛰어다녔던 지난날과 달리 그는 오늘 처음으로 틀릴 가능성까지 준비하고 있었다.
기태는 사전에 확인한 사실을 문자로 남겼다. 테스트 예정금액이 등장한다는 이유만으로 계좌에서 돈이 자동으로 인출되지는 않으며, 새로운 결제 동의나 비밀번호 입력 요구가 나타나면 응하지 말라는 안내였다. 민석은 문자를 수첩 뒤표지에 붙여 두었다.
다음 날 여덟 시 사십 분. 그는 준성과 함께 은행 앱을 새로고침했다. 여덟 시 사십일 분. 아무 거래도 없었다. 여덟 시 사십삼 분에야 검은 원장에 작은 글씨가 나타났다.
[검증 거래: 미실행]
[예측 정확도 갱신 예정]
준성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틀렸는데 예측 정확도를 갱신한다니. 자기 시험을 자기가 채점하겠다는 거네.”
민석은 웃지 못했다. 화면에서는 틀렸다는 사실조차 새로운 동의를 요구하는 구실로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 은행에서 공식 안내 문자가 왔다. 2,710원과 관계없는 알림이었다. 이틀 전 신청한 거래 내역 조회가 처리됐다는 내용이었다. 민석은 기태에게 문자를 보여 주며 소리 내어 말했다.
“이 둘은 다른 사건입니다.”
작은 금액 하나가 빗나갔는데도 그는 이상하게 마음이 가벼웠다. 미래를 맞혀야만 살아남는 게임에서 한 발 내려온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날 저녁 서윤이 2018년 자료를 추가로 확인했다. 자동 종료 규칙의 적용 대상에서 2016년 이의 신청이 누락됐다는 내부 의견서였다. 검토자는 누락 가능성을 보고했지만, 결재란에는 ‘계속 운영’이라고 적혀 있었다.
결재 부서 아래에는 두 개의 식별자가 있었다.
‘사업 운영: 정산전략실.’
‘이력 보존: RETURN-M36.’
민석은 마지막 이름을 오래 바라봤다. 십 년 뒤 승인자로 등장하던 M36은 누군가 미래를 내다본 흔적이 아닐 수도 있었다. 그것은 어쩌면 오래된 예외 규칙을 책임지지 않게 만드는 이름이었다.
제85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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