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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내 통장에 내일의 돈이 입금된다 · 84화
PAYLUA ORIGINAL · 제84화

84화. 상자에 남은 손글씨

내 통장에 내일의 돈이 입금된다 · 2,916자

오프라인 책장
연필로 적힌 다섯 글자는 선명하지 않았다. ‘서명 전’. 테이프가 접힌 자리에는 마지막 획이 끊겨 있었다. 민석은 손글씨를 보자 오래된 창고의 냄새가 떠올랐다. 젖은 종이와 커피 찌꺼기, 전원을 끈 복사기의 열기. 십 년 전 그날은 끝내지 못한 업무 때문에 사무실의 모든 불이 늦게까지 켜져 있었다. “이 글씨, 누가 썼을까요?” 준성이 물었다. “모르겠어. 다만 내가 상자를 옮기기 전부터 있었던 건 맞아.” 세온기록관리 담당자는 사진에 나온 보관 상자와 실제 남아 있는 상자가 동일한 것인지 확인할 수 있는 고유번호를 요청했다. 혜라는 열람 요건에 맞춰 겉면 사진만 제공했다. 봉인 안쪽을 임의로 열지는 않았다. 상자 옆면에는 작은 종이띠가 붙어 있었다. 인수 담당자 이름을 적는 칸에는 ‘정도현’의 도장이 흐리게 남아 있었다. “정도현 씨가 쓴 겁니까?” 민석이 물었다. “도장이 찍혔다는 사실과 손글씨의 작성자가 같다는 뜻은 아닙니다.” 혜라는 또 한 번 경계선을 그었다. 기태는 봉투 이미지의 촬영 시각 정보가 나중에 변형될 수 있다는 점도 설명했다. 촬영 파일은 참고 자료로 삼고, 보관기관의 접수 대장과 별도 대조해야 했다. 민석은 그제야 자신이 십 년 전에 찍힌 사진 한 장을 얼마나 쉽게 믿고 싶은지 깨달았다. 이날 오후, 김예린이 찾아왔다. 늘 연구 노트를 들고 다니던 그녀는 이번에는 종이로 된 상태 코드 표를 가져왔다. 표는 2016년 시험 당시 개발자가 사용했던 것이었다. [01 — 지급 요청 접수] [02 — 계좌 대조 완료] [03 — 이체 지시 생성] [04 — 금융기관 입금 확인] 그녀는 마지막 줄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이걸 기억하셔야 해요. 완료라고 적혀 있어도, 무엇이 완료됐는지 따져야 합니다. 02는 돈이 들어왔다는 뜻이 아닙니다.” “외부 시스템에는 그냥 ‘완료’라고만 표시됐죠.” “맞아요. 원래는 긴 이름을 넣어야 하는데 작은 모바일 화면에 맞춘다며 문구를 줄였어요. 제 동료가 반대했던 변경이었죠.” “누구요?” 예린은 잠시 망설였다. “퇴사한 개발자가 있습니다. 지금은 연락이 닿지 않아요. 다만 공개할 수 있는 당시 회의 기록에는 ‘상태 코드 축약 금지’라는 검토 의견이 남아 있어요.” 민석은 노트에 네 개의 번호를 적었다. 그는 자신이 가진 검은 원장에도 네 개의 상태가 있는지 살펴봤다. 입금 확정이라며 나타나는 숫자 곁에 ‘예상’이라는 작은 글씨가 붙어 있었다. 준성이 뒤에서 중얼거렸다. “우리는 그 작은 글씨 때문에 여기까지 온 거야?” “작아서 놓친 게 아니라, 보고 싶은 숫자가 너무 커서 못 본 거지.” 민석이 말했다. 저녁에 새로운 소식이 왔다. 2016년 익명 신청인의 대리인은 당사자가 제공한 별도 증빙 한 장을 보관기관에 제출했다고 했다. 금융기관에서 받은 입출금 내역이었다. 날짜가 표시된 해당 계좌 거래 자료에는 문제의 돈이 들어왔다는 줄이 없었다. 단, 그 자료가 모든 관련 계좌를 포함하는지는 아직 확인해야 했다. “아무 거래가 없다는 게 증명입니까?” 하은이 물었다. “당사자가 주장한 그 계좌에는 지급이 확인되지 않는다는 증거죠. 다른 계좌로 이체됐는지는 별도로 확인해야 합니다.” 세린이 답했다. 민석은 누군가 자신에게 입금되지 않은 돈을 받았다고 주장하던 상황을 떠올렸다. 잔액을 몇 번이나 확인해도 없었던 경험. 어느 날 자신의 스마트폰에 갑자기 100억 원이 뜨자 그는 반대로 그 돈이 진짜인 것처럼 느꼈다. 두 일은 사실 같은 문제였다. 화면과 현실 사이의 거리. 예린은 옛 동료에게 연락을 시도하기 전에 자신이 설명할 수 있는 부분부터 더 확인했다. 원본 프로그램에서 입금 확인 상태를 받으려면 금융기관의 고유한 거래 응답이 필요했다. 시험 모듈에는 그 응답이 없는 거래도 화면에 그릴 수 있는 기능이 있었지만, 시연임을 나타내는 표시가 함께 붙도록 돼 있었다. “그 표시가 언제 사라졌는지 찾아야겠네요.” 서윤이 말했다. “맞아요. 화면이 진짜 은행을 흉내 내는 순간부터 사람을 오해하게 만들 수 있었으니까요.” 기태는 사본 B의 프로그램 코드를 무단으로 실행하거나 복제하는 일은 피하자고 했다. 대신 공식 감사기관이 확보한 변경 이력에서 검증용 문구가 제거된 시점을 비교할 수 있었다. 그는 사진 한 장을 흔들며 말했다. “해결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자료를 잘못 건드리면, 나중에는 제대로 된 조사도 어려워집니다.” 민석은 그 말을 듣고 손을 거뒀다. 처음 원장을 발견했을 때는 당장 프로그램을 뜯어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지금은 한 번 확인한 사실이 어떤 기록으로 남을지 더 중요했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 준성은 문득 물었다. “처음 네가 받은 48,000원은 이제 어떻게 되는 거야?” “송금 경위에 관한 공식 설명은 받았지만, 내가 정당한 수취인인지 최종 확인되기 전까지 쓰지 않을 거야.” “이제 라면 값이라도 그걸로 좀 내면 안 되냐?” “네가 사.” “내가 벌써 세 번 샀는데?” 민석은 웃었다. 작은 농담이 가능하다는 사실이 다행이었다. 하지만 그 밑에 깔린 질문은 여전했다. 누구에게 귀속되어야 할 돈을 누가 먼저 쓰느냐. 처음부터 그 문제를 정확히 나눴다면 오늘의 사건이 이렇게 커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날 밤, 익일금융의 보관 자료에 접속 권한이 있는 한 직원이 외부 감사 창구로 제보했다. 2016년의 원장 상태값을 외부 데이터와 결합한 문서에 ‘예외 승인’이 붙은 시점은 2026년이 아니라 2018년이라는 내용이었다. 자료 제공은 공식 보호 절차로 진행됐고, 실명은 공개되지 않았다. 그는 마지막에 이렇게 적었다. ‘2016년 상자에 적힌 서명 전이라는 경고는 실제로 검토됐습니다. 하지만 누군가 그 경고를 지우는 대신 경고가 통하지 않는 화면을 만들었습니다.’ 서윤은 제보의 시간표에 밑줄을 그었다. 그동안 모두가 2026년의 거대한 거래를 쫓았지만, 그 거래의 문은 2018년에 이미 열렸을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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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4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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