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실 회의 테이블 위에 새 약관이 펼쳐졌다. 평범한 법률 문서처럼 보이는 종이었다. 페이지마다 정해진 크기의 글자가 줄지어 있었고, 하단에는 익일금융과 정산 대행사 이름이 함께 적혀 있었다.
민석은 '보류한 이용자'라는 구절에 밑줄을 그었다.
“제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제 이름으로 넘어옵니까?”
“문서가 주장하는 내용은 그렇습니다.” 오세린이 말했다. “그 주장에 실제 효력이 있는지는 전혀 다른 문제예요. 당사자 동의와 계약 구조부터 검토해야 합니다.”
준성이 팔짱을 꼈다.
“저쪽은 이름 하나만 있으면 다 되는 줄 아는 것 같아.”
“이름 하나만 있으면 된다고 믿게 만들고 싶은 거겠죠.” 기태가 대답했다.
그들은 약관의 이전 버전을 찾았다. 2016년 원본에는 '보관인의 권한은 지급 대리권이 아니다'라는 문장이 있었다. 2026년 변경본에서는 그 문장이 삭제되고, 대신 '대리 수령과 정산 지원을 포괄한다'는 문구가 들어가 있었다.
삭제 시점은 지난달. 변경 요청 계정은 익일금융 본부 공용 계정이었다. 누가 최종 승인했는지 대조할 감사 기록은 별도로 필요했다.
“지금 당장 이 문서를 없앨 수는 없죠?” 민석이 물었다.
“없애면 증거도 없어져요.” 세린이 말했다. “그리고 모든 회사가 같은 약관을 쓰는지도 아직 모릅니다. 우선 어디서 실제로 적용됐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민석은 답답했다. 누군가는 버튼 하나로 사람들의 권리를 바꿔 놓았는데, 자신들은 종이 한 장을 읽는 데 몇 시간을 쓰고 있었다. 그는 책상 모서리를 세게 잡았다. 손바닥에 자국이 남을 만큼 힘이 들어갔다.
서윤이 그를 밖으로 불렀다. 계단참에는 아무도 없었다. 청소 도구가 놓인 벽 옆으로 겨울 햇빛이 얇게 들어왔다.
“당신이 화나는 건 알겠어요.”
“화가 나서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뭘 막는 동안에도 사람들이 돈을 못 받고 있잖아요.”
“그렇다고 다른 사람의 결정을 대신하면 안 된다고, 우리가 지금까지 말했죠.”
“알아요.”
“그러면 당신 자신의 결정도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 마세요.”
민석이 고개를 들었다. 서윤은 취재 수첩을 펼쳤다. 거기에는 자신이 예전에 취재했지만 기사로 내지 못한 노동자의 말이 적혀 있었다.
'돈을 받았는지 묻는 사람이 한 명만 있었으면 좋겠다.'
“그 사람은 당신이 영웅이 되길 원한 게 아니에요. 묻고 확인해 달라는 거였어요.”
민석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이토록 많은 숫자를 보았지만 자신이 할 일은 처음보다 명료해졌다. 누구에게 돈을 돌려줄지 결정하는 대신, 돈을 받을 사람이 자기 권리를 확인할 시간을 확보하는 일.
오후에는 2016년 자신의 면담 기록을 열람했다. 원본 파일은 몇 군데 훼손돼 있었고, 음성은 중간중간 끊겼다. 젊은 민석의 목소리가 잡음 너머로 들려왔다.
“나는 보관인이 되는 데 동의한 적 없습니다.”
녹음에서는 멀리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민석은 그 소리 뒤에 흐르는 아주 짧은 침묵을 기억할 것 같았다. 2016년, 복도 끝의 유리문은 밤이 되면 보안 잠금장치가 자동으로 걸렸다. 도현이 서류 상자를 들고 왔고, 자신은 상자에 적힌 이름을 지우지 말라고 동료와 언쟁했다.
그 기억이 사실인지 확신할 수 없어 민석은 재생을 멈추고 서윤에게 말했다.
“문이 잠겼던 장면이 떠올라요. 내가 잠근 건지, 누가 밖에서 잠근 건지는 모르겠지만.”
서윤은 섣불리 연결하지 않았다. “그건 본인 기억이라고 적을게요. 나중에 출입 기록과 대조합시다.”
“아까는 그날의 내가 영웅인 것 같았어요.”
“그럴 수도 있죠.”
“지금은 좀 겁이 나요. 내가 좋은 일을 했다는 확신도, 나쁜 일을 했다는 확신도 둘 다 만들어 낼 수 있을 것 같아서.”
서윤은 한참 후 답했다. “그러니까 확인하는 일을 계속해야 하는 거겠죠.”
민석은 다시 재생 버튼을 눌렀다. 자기 목소리를 듣는 일은 미래 화면을 보는 일보다 어렵게 느껴졌다.
녹음된 진행자가 물었다.
“그럼 자료를 누구에게 맡길 겁니까?”
“확인되지 않은 돈을 먼저 움직이지 않을 사람에게요. 나라도 끝까지 여기 있어야 한다면 기록은 지키겠습니다. 하지만 그걸 책임 인수라고 적지 마세요.”
민석은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이 잊고 있던 십 년 전의 한 문장이 현재의 자신과 너무 닮아 있었다. 도현의 말도, 문재의 말도 아닌 자신의 목소리였다.
녹음 속에서 진행자가 다시 물었다.
“최종 보관 기간은 얼마로 설정합니까?”
“십 년. 그때는 당사자들이 더 쉽게 찾을 수 있어야겠죠.”
녹음이 지지직거렸다.
“강민석 씨, 십 년 뒤에 본인이 직접 이 파일을 열겠다고 확인하십니까?”
잠깐 침묵이 흘렀다.
“아니요. 십 년 뒤의 나한테 그런 약속을 시킬 수는 없죠.”
민석은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2036년 강민석의 서명이 계속 등장했던 이유를 하나 더 알 것 같았다. 누군가는 확인하지 않겠다는 답을 확인하겠다는 약속으로 고쳐 적었다.
기태가 녹음에서 보관 기관의 시스템 시각을 추출해 대조했다. 파일 머리말에는 장기 보관 만료 예정일이 2036년 11월 15일로 입력돼 있었다. 2036이라는 숫자가 꼭 미래 접속의 증거는 아니라는 설명이 더 설득력을 얻었다.
민석은 안도하면서도 가슴 한쪽이 허전했다. 자기 앞에 나타난 기적이 결국 복잡한 사기와 오래된 오류였을 수도 있었다. 그는 한때 이 능력으로 큰돈을 벌고 싶었다. 이제는 기적이 아니어도 좋으니 사람들이 자기 돈을 돌려받기만 바랐다.
그날 밤, 원장은 조용히 켜졌다.
[보관인 위임 상태: 검토 중]
[자동 위임 승인 예상 시각: 2026년 11월 20일 00:00]
[보류된 이용자: 6명]
민석이 수첩에 시각을 적자 새로운 메시지가 떴다.
'십 년 전에도 같은 말을 했다.'
그 아래, 녹음에서는 끝내 들을 수 없었던 목소리 한 줄이 글자로 나타났다.
'보관인이 되지 않겠다고 말하고도 네가 남았던 이유를 기억해.'
민석은 아까 들은 녹음 파일을 다시 재생했다. 자신의 마지막 답이 끊긴 지점 뒤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잡음이 있었다.
원장에는 그 잡음 뒤의 문장처럼 보이는 글씨가 나타났다.
'그날 내가 남은 이유는, 마지막 사람이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가 그 말을 썼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마지막 사람'이라는 표현이 민석의 가슴을 이상하게 후벼 팠다.
제68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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