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재는 오래된 호텔의 라운지에서 만나자고 했다. 2016년에도 그와 거래하던 사람들이 자주 왔다는 장소였다. 천장의 샹들리에는 낮에도 불을 켜고 있었다. 민석은 고급 의자에 앉아 테이블 위에 놓인 보리차를 바라봤다. 예전이라면 이런 곳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자신이 큰돈을 다루는 사람이 된 듯 착각했을 것이다.
“차를 못 드시겠습니까?” 문재가 물었다.
“차보다 먼저 물을 일이 있습니다.”
민석은 전날 하은에게서 받은 회의록 두 장을 펼쳤다. 하나에는 미확인 정산권의 금융상품 전환을 허용했다는 문장이, 다른 하나에는 050번 보관인을 공란으로 유지해야 한다는 문장이 있었다. 두 문서에 서문재의 이름이 있었다.
“두 개 다 당신이 쓴 겁니까?”
“그렇습니다.”
“그럼 왜 정반대의 말을 했죠?”
문재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정반대는 아니에요. 당시에는 지급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먼저 돈을 줄 방법을 찾고 있었습니다. 청구권을 매입하는 구조를 이용하면 빠르게 지급할 수 있다고 봤죠.”
“그런데 실제로 누가 돈을 받았습니까?”
문재의 눈이 흔들렸다.
“일부가 받았습니다.”
“이름을 말하지 않아도 됩니다. 지급됐다는 증빙을 보여 주세요.”
“그럼 그때 그 결정을 다시 한다면요?” 민석이 물었다.
문재는 무슨 뜻인지 되묻지 않았다. “당시에는 지급받지 못한 사람들의 전화를 매일 받았어요. 분명히 받을 돈이 있다고 믿지만, 회사는 확인 중이라고만 답했죠. 나는 그 시간을 돈으로 줄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생각 자체는 아직도 완전히 버리진 못했어요.”
“그런데 왜 후회합니까?”
“확인되지 않은 돈을 누가 얼마에 팔아도 되는지부터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얼마를 먼저 지급할지 결정하기 전에, 그 사람이 그런 거래를 원하는지부터 물었어야 했어요.”
민석은 문재에게서 간단한 악의를 찾고 싶었다. 누군가 돈을 탐냈다고 하면 사건을 이해하기 편했다. 그러나 지금 그의 눈앞에 있는 것은 좋은 명분으로 시작해 점점 자신의 판단을 정당화한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은 더 어렵고 더 위험했다.
“좋은 의도가 있었다고 책임이 줄어들진 않겠죠.”
“압니다.”
문재는 자신이 받은 고문료가 얼마인지 적은 자료를 따로 꺼냈다. 액수의 전부가 부당한 수익이라고 판단된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적어도 그 돈이 논란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세린이 관련 계약과 반환 방안을 검토할 수 있도록 사본 제공 범위를 정했다.
“제가 그 돈을 돌려놓는다고 누군가의 월급이 자동으로 돌아가진 않을 겁니다.” 문재가 말했다. “그래도 그 돈을 받지 않았다고 거짓말하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요.”
문재는 준비해 온 서류봉투에서 목록을 꺼냈다. 지급 완료로 표시된 항목과 실제 은행 이체가 확인된 항목이 구분돼 있었다. 일부에는 계좌 번호 일부와 확인 일자가 적혀 있었지만, 그조차 원본 은행 기록과 대조된 것은 아니었다.
“당신이 저희를 여러 번 피한 이유가 이겁니까?” 민석이 물었다. “당신도 확인하지 않고 완료라고 썼으니까?”
문재는 긴 숨을 내쉬었다.
“맞아요. 그 부분은 제 책임입니다.”
뜻밖에 빠른 인정이었다. 민석은 오히려 다음 말을 듣기 위해 조용히 기다렸다.
“금융상품으로 만들기 전까지는 원본을 훼손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붙였어요. 각 당사자에게 선택권이 있다고 믿었고요. 그런데 그 조건을 서류에 써 놓으면 자동으로 지켜질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확인해야 하는 건 사람이었는데.”
“돈은 벌었습니까?” 준성이 물었다.
문재는 피하지 않았다.
“고문료를 받았습니다. 계약을 끊기 전까지요. 그 돈을 지금은 반환하는 문제까지 상담 중입니다.”
“그럼 책임에서 벗어나는 거예요?”
“아니요.”
문재의 대답은 짧았다. 손끝이 찻잔에 닿았다가 물러났다. 그가 예전보다 늙어 보인 것은 주름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말 뒤에 숨을 곳이 없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민석은 그의 얼굴을 보고 물었다.
“2016년의 나는 왜 보관인이 됐습니까?”
“당신이 마지막으로 남아 있었으니까요.”
“다른 사람이 다 도망갔습니까?”
“그 말로 설명하면 너무 쉽죠.”
문재는 오래된 사진 한 장을 밀었다. 2016년 10월 25일 밤, 창고 앞에서 찍힌 사진이었다. 사진에는 정도현과 젊은 강민석, 그리고 이름 모를 두 사람이 있었다. 뒤쪽에서 누군가 종이 상자를 들고 있었다.
“원본을 옮기던 날, 당신은 동의 없이 확정된 지급 기록을 전부 중지시켰습니다. 그러자 회사는 당신이 지급을 가로막았다고 주장했죠.”
“정말 내가요?”
“나도 직접 그 버튼을 보지는 못했습니다. 다만 그날 이후 회사 서버의 대조 처리 결과가 바뀌었고, 그때부터 당신 이름이 보관인으로 올라갔어요.”
민석은 기억나지 않는 자신의 행동을 함부로 미화하고 싶지 않았다. 타인의 말을 근거로 영웅이 되는 일은 타인의 말 때문에 채무자가 되는 일만큼 위험했다.
“내가 멈춘 게 맞다면, 누가 다시 켰죠?”
문재는 그 질문을 기다린 것처럼 답했다.
“2026년 시스템 이관이 진행될 때, 옛 승인을 최신 형식에 맞춰 복원하라는 지시가 있었습니다. 승인자인지 보관인인지 구분하지 않은 채 이름을 채워 넣는 방식이었어요.”
“지시한 사람은요?”
“지금 회의록을 보고 계시잖아요. 익일금융 데이터사업본부장.”
“정태겸?”
“최종 결재자는 따로 있을 겁니다. 제가 확인한 건 태겸 씨가 이관에 참여했다는 사실까지예요.”
문재는 또 하나의 봉투를 내밀었다. 이번에는 사진이 아니라 원본 열람 요청서였다. 문서 하단에는 '2016년 종료 처리 담당자 면담 기록'이라고 적혀 있었다. 당사자는 민석 자신이었다.
“이걸 왜 지금 주십니까?”
“그때 당신이 한 말을 제가 전달하면 또 남의 말을 대신하는 셈이니까요.”
민석은 봉투를 열지 않았다. 세린에게 검토를 부탁한 뒤 정해진 범위에서 확인하기로 했다. 그렇게 말하자 문재는 씁쓸하게 웃었다.
“이제야 제대로 된 보관인이 됐군요.”
“보관인이 되고 싶은 건 아닙니다.”
“그럼 뭘 하고 싶습니까?”
민석은 창밖으로 지나가는 직장인들을 봤다. 한 사람이 통화하며 고개를 숙였고, 다른 사람은 종이컵 두 개를 든 채 횡단보도를 건넜다.
“내가 맡아야 할 게 없는 세상이요. 주인이 자기 이름으로 받을 수 있게 되면, 나는 이 자리에서 빠지고 싶습니다.”
문재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헤어지기 직전 그의 휴대전화에 알림이 들어왔다. 화면을 본 순간 얼굴빛이 바뀌었다.
“방금 금융상품 전환 안건이 이사회에 다시 상정됐습니다.”
“공표가 보류됐잖아요.”
“공표와 별개로 내부 가치 평가를 계속하겠다는 겁니다.”
문재는 민석을 바라봤다.
“그런데 제일 먼저 평가할 항목이 이상합니다. 쉰두 건도, 천억 원도 아니에요.”
그가 읽어 준 안건 제목은 짧았다.
'강민석 보관 권한의 시장 가치 산정.'
민석은 처음으로 알았다. 어떤 회사는 돈이 아니라 거절할 권리까지 값으로 매기려 한다는 것을.
제66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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