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시 사십일 분.
열아홉 분이면 직장인이 퇴근 준비를 하고, 전철 한 대를 놓치고, 편의점에서 커피를 고를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천억 원짜리 거래가 '확인됐다'는 문장을 시장에 내보내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 시각 하은은 회사 복도 끝의 비상계단에 서 있었다. 자기 자리에 앉으면 모니터 화면이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보였다. 공용 회의실에서는 방금 팀장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그녀가 문서를 발견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사람도 있을지 몰랐다.
하은의 휴대전화에는 어머니에게서 온 메시지가 있었다. '오늘도 늦니? 밥 좀 챙겨 먹어.' 하은은 답장하지 못했다. 자신이 하는 일이 누군가의 월급과 직결돼 있다는 설명을 어머니에게 하기는 어려웠다. 다만 오늘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몇 년 뒤에도 같은 화면을 보게 될 것 같았다.
전화기 너머 민석이 조용히 말했다. “하은 씨, 위험하면 혼자 들어가서 막으려고 하지 마세요.”
“제가 막을 수 있는 권한이 없어요.”
“그럼 지금 할 수 있는 절차만 해요. 문서 보존하고, 공식 이의 남기고.”
하은은 비상계단 손잡이에 기대어 잠시 눈을 감았다. 영웅이 되는 일보다 훨씬 덜 화려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녀는 그 말에 힘이 났다. 지금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정확히 세 가지로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하은은 익일금융의 내부 통제 담당자에게 즉시 문제가 있는 공표문을 전달했다고 했다. 그녀에게 공개 정지 권한은 없었다. 인사 평가도, 남아 있는 계약도 걱정됐지만 지금은 화면을 바라보고 있을 수 없었다.
“제가 할 수 있는 건 기록을 남기는 일이에요.”
민석은 전화를 쥔 손에 힘을 줬다.
“혼자 책임지지 마세요. 누가 무엇을 봤는지 각자 남기겠습니다.”
서윤은 편집국에 연락했다. 확인되지 않은 자산을 지급 완료로 오인할 수 있는 공표문이 전송될 예정이며, 이를 검증 중이라고 전했다. 언론사 보안팀은 이전 조작 기사 사건의 접속 로그를 보존하고 있었다. 혜진 부장은 기사를 준비하되 확인된 사실과 의혹을 별도 문단으로 구분하라고 했다.
기태는 공개된 공표 예약 화면의 문구를 대조했다.
[2016년 원본 보관인 열람 완료]
[정산권 52종 권리 검증 완료]
[2036년 장기 보관 모듈 정상화]
“첫 줄은 사실일 수 있어요.” 기태가 말했다. “오늘 누군가 영상을 열람했으니까요. 하지만 둘째 줄은 그 사실만으로 성립하지 않습니다.”
“첫 줄만 떼어 놓으면 진짜처럼 보이겠네요.” 준성이 말했다.
“그래서 무서운 거지.”
세린은 영상 보관기관에서 발급한 열람 확인서의 제한 문구를 다시 살폈다. 오늘 영상은 반환 대상의 권리 유무를 보증하지 않았다. 그녀는 해당 문구와 전송 예정 공표문의 차이를 정리해 이해관계자들에게 공식 이의 통지를 보냈다.
네 시 오십삼 분. 전송 중지 회신은 아직 없었다.
하은에게 두 번째 전화가 왔다.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자동 발송 시스템에는 제가 들어갈 수 없어요. 하지만 결재 문서에 딸린 원문을 찾아냈어요. 검증 완료의 조건이…”
그녀는 말을 끊었다.
“조건이 뭐죠?” 민석이 다그치듯 물었다.
“'원본 영상의 시청'으로 돼 있어요. 당사자의 확인이 아니라, 누군가 재생 버튼을 누르면 충족되도록.”
준성이 소리쳤다.
“말이 돼? 영화 보면 영화 속 건물 소유권도 넘어오냐?”
누구도 웃지 않았다.
민석은 자신이 조금 전 열람 확인서에 서명한 순간을 떠올렸다. 권리 승인과 무관한 서명이라는 문구를 눈으로 확인했고, 그 사실을 믿었다. 그런데 외부 공표 시스템은 다른 조건을 사용하고 있었다. 계약서와 데이터 필드가 서로 다른 현실을 만들고 있었다.
“그럼 그냥 영상을 안 봤어야 했나?” 민석이 말했다.
서윤은 고개를 저었다.
“우리가 영상을 봤기 때문에 속은 게 아니에요. 누군가 영상을 보는 일을 검증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이런 거예요.”
다섯 시를 삼 분 앞두고 익일금융의 공식 공지 게시판에 새 항목이 떴다. '외부 원본 열람 확인 완료.' 아직 투자자에게 전송됐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정태겸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강민석 씨, 그 서명은 회사에도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제 서명은 열람 사실만 확인합니다.”
“그 해석은 양측이 다를 수 있겠죠.”
“해석이 다르면 멈추고 확인해야죠.”
민석은 마치 상대방이 자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또박또박 말했다.
“저는 누구의 돈도 대신 받는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쉰두 건을 확인했다고 한 적도 없고요.”
태겸은 짧게 웃었다.
“당신은 아직도 마지막 수취인이 본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요.”
그 대답에 전화기 너머가 조용해졌다.
“마지막 칸은 사람이 아니라 역할이라는 기록을 봤습니다. 그 역할에 제 이름을 넣은 건 누굽니까?”
태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누가 넣었는지보다 왜 아직 제거하지 않았는지가 중요합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이유가 있습니까?”
“그 이름을 제거하면 모든 정산이 멈추거든요. 그러면 돈을 받아야 할 사람들도 못 받게 됩니다.”
“그럼 그분들에게 직접 물으세요.”
민석은 먼저 전화를 끊지 않았다. 마지막 말이 끝나자 태겸 쪽에서 통화가 종료됐다.
다섯 시 정각.
하은의 화면에 전송 상태가 나타났다.
[대외 공표: 발송 보류]
[사유: 이해관계자 이의 및 법무 재검토]
그녀는 의자에 주저앉았다. 민석도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러나 완전히 막은 것은 아니었다. 이미 예약 항목을 본 내부 사용자들이 있었다. 누군가는 저장했고, 누군가는 다른 문서로 옮겨 적었을 수 있었다.
준성이 창밖의 저녁 교통을 바라보며 말했다.
“우린 맨날 막기만 하네. 이쯤 되면 진짜 돈을 받게 해 줘야 하는 거 아니야?”
“그래.” 민석이 대답했다.
그는 최은정이 보낸 천 원짜리 정정 접수증을 꺼냈다. 공표를 멈추는 일과 실제 돈을 돌려주는 일은 다르다. 내일은 막는 것보다 확인해서 되돌려 놓는 일을 하자고 제안했다.
그날 밤 하은에게 또 다른 문서가 도착했다. 공표가 보류된 이유를 밝히는 회의록이었다. 수신자 명단에는 정태겸 외에 낯선 이름이 하나 있었다.
[장기 보관 설계 고문: 서문재]
회의록 가장 아래, 그의 의견이 적혀 있었다.
'050번 보관인 항목은 공란으로 유지해야 한다. 강민석 명의 자동 귀속을 즉시 중단할 것.'
준성이 문서를 보고 고개를 들었다.
“서문재가 우리 편이라는 거야?”
민석은 곧바로 답하지 않았다.
그 문장 바로 위에는 서문재가 십 년 전 직접 승인한 다른 문장이 있었다.
'미확인 정산권 묶음의 금융상품 전환을 허용함.'
한 사람이 두 문장을 모두 썼다.
제65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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