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체국 앞 은행 지점에는 화요일 아침부터 사람이 많았다. 입구의 번호표 기계는 쉼 없이 종이를 뽑아 냈다. 민석은 휴대전화 대신 자신의 이름과 거래 일자가 적힌 메모를 들고 기다렸다. 준성은 옆자리에서 '48,000원을 지키기 위한 교통비'라며 투덜거렸다.
“우리 둘 점심 먹으면 이미 마이너스잖아.”
“네 돈으로 먹어.”
“이제는 친구 밥값도 미래에 청구하겠다는 거냐?”
민석은 잠깐 웃었다. 어제부터 제대로 잠을 못 잤지만 웃을 힘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 뜻밖이었다.
은행은 송금 표시 문구가 실제 송금인의 성명과 같다는 보장은 없다고 설명했다. 정식 접수된 조회에 따라 추가 확인이 필요했고, 상대방 정보는 권한과 절차를 거쳐야만 제공될 수 있었다. 민석은 거래번호를 제출하고 자신이 알 수 있는 범위의 설명부터 들었다.
“고객님이 보신 2036-RETURN이라는 글자는 송금 메시지 항목에 들어 있습니다. 이 항목을 보고 송금 시점을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 입금된 돈이 맞는 건가요?”
“네. 처리일은 2026년 11월 15일입니다. 미래 날짜로 송금된 거래는 아닙니다.”
민석은 메모장에 '입금 사실 확인. 미래 발신 여부 확인 안 됨'이라고 적었다.
은행을 나왔을 때 준성이 말했다.
“이상하게 안심해야 할 것 같은데, 더 찝찝해.”
“어째서?”
“누가 너한테 돈을 보내면서 십 년 뒤인 척했다는 거잖아. 일부러 그 문구를 넣었으면 우리 반응을 보고 싶었을 수도 있고.”
민석도 같은 생각이었다. 자신이 사만 팔천 원을 쓰지 않은 일을 흰 화면은 알고 있었다. 누군가의 장난이라면 너무 정확하고, 미래에서 온 경고라면 확인할 방법이 너무 부족했다.
서윤이 찾아낸 것은 2016년 10월의 장부 사진이었다. 사진은 정도현이 남긴 보관 상자에서 발견한 원본 목록에 있었다. 그 안에는 택시 영수증과 함께 묶인 지출결의서가 찍혀 있었다.
[이동 경비: 48,000원]
[용도: 종료 원본 인계]
[임시 선지급자: 강민석]
[정산 상태: 미확인]
민석은 마지막 줄을 읽고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내가 먼저 냈다는 거잖아요.”
“문서에 그렇게 적혀 있다는 뜻이에요.” 서윤이 답했다. “당시 실제로 돈을 낸 사람인지, 누가 적은 건지는 더 확인해야 해요.”
그제야 오래된 장면 하나가 떠올랐다. 비가 내리던 심야의 택시. 젖은 종이 상자. 정도현이 차 안에서 '금고가 닫히기 전에는 도착해야 한다'고 말하던 목소리. 기억은 안개처럼 흐렸으나 젖은 상자에서 나던 종이 냄새만은 선명했다.
“나는 왜 그걸 잊었지?”
서윤은 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가 기억한다고 주장한 내용을 그의 말 그대로 메모했다. 떠오른 기억과 기록으로 확인된 사실을 구분하려는 습관이었다.
오후에는 김예린이 2016년 프로그램 작업 기록을 가져왔다. 그녀가 보여 준 화면에는 '2036-RETURN'이 아닌 비슷한 이름의 테스트 항목들이 나열돼 있었다.
“프로그램 개발 당시 장기 보관 시나리오를 테스트했어요. 십 년 뒤 정산 기록이 다시 열리는 경우였죠. 그때 쓰던 이름 중 하나가 '2036_RETURN'이었습니다.”
“그러면 어제 돈을 보낸 사람이 그 이름을 훔쳐 쓴 걸까요?”
“그럴 수도 있고, 없애지 않은 프로그램이 실제 송금 요청까지 처리했을 수도 있어요. 이 둘은 아주 다른 문제예요.”
그녀는 화면을 아래로 내렸다. 테스트 항목에 실제 지급 명령을 연결하는 기능은 종료 전에 비활성화됐다고 기록돼 있었다. 기록상으로는 그렇지만, 지금도 완전히 비활성화돼 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제일 이상한 건 이겁니다.” 예린이 말했다.
[검증 조건: 수취인의 실제 사용 여부]
민석의 얼굴이 굳었다.
“돈을 쓰면 다음 단계로 넘어가도록 만들었다는 겁니까?”
“원래는 테스트에서만 쓴 조건이에요. 사용하지 않으면 보관, 사용하면 지급 완료. 그런데 누군가 그 조건을 실제 사람에게 적용했다면 문제가 커지죠.”
민석은 2016년 비용 결의서를 다시 펼쳤다. 지출 내역 옆에는 작은 글씨로 '현금 선결제'라고 적혀 있었다. 그러나 카드 영수증 사본도, 당시 송금 내역도 없었다. 그는 그날 자신의 지갑에 현금이 얼마나 있었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예린은 오래된 백업 폴더에서 동일한 영수증의 다른 사본을 찾아냈다. 모서리에 접힌 자국이 있는 종이였다. 첫 사진에서는 잘려 나갔던 아래쪽에 문장이 남아 있었다.
'운행 목적지 변경으로 증액. 승객 요청.'
민석은 창문 너머 도로를 보았다. 젖은 상자를 싣고 택시에 올랐던 기억이 스쳤다. 도현이 기사에게 목적지를 바꿔 달라고 했던가. 처음에는 회사로 돌아가려다 방향을 틀었을 수도 있었다. 기억은 그런 식으로 조각나 있었다.
“도착지가 달라진 이유를 아십니까?” 민석이 물었다.
예린은 고개를 저었다. “영수증만으로는 몰라요. 하지만 원래 이동 경로를 확인할 수 있는 서류가 다른 상자에 있을 수는 있어요.”
준성이 끼어들었다. “그럼 영수증 하나가 비밀지도 역할을 한다는 거네?”
“영수증은 영수증이야.” 민석이 대답했다. “다만 내가 그날 어디로 갔는지 알아볼 단서 하나는 생겼지.”
그는 누군가 먼저 만들어 놓은 결론이 아니라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장소를 수첩에 적었다. 오래전에 보관실 입구가 두 개였다는 증언이 그제야 새롭게 들렸다.
민석은 그제야 흰 화면의 문장을 떠올렸다.
'이번에는 그 돈을 쓰지 않았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 문장이 자신을 구하려는 경고인지, 행동을 측정하는 시험인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저녁 무렵 서문재가 연락해 왔다. 평소처럼 빙 둘러 말하지 않았다.
“사만 팔천 원이 들어왔습니까?”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2016년 종료 문서를 다시 읽었습니다. 그 금액이 움직이면 어느 보관인이 확인 절차에 들어가도록 설계돼 있었어요.”
“누가 설계했죠?”
“정도현입니다. 다만 지금까지 남아 있는 시스템은 그가 원했던 것과 다릅니다.”
민석이 잠시 말을 고른 뒤 물었다.
“그 돈이 누구 돈입니까?”
문재의 대답은 빠르지 않았다.
“처음에는 당신이 선지급한 경비라고 기록됐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그 기록을 담보로 잡으면서, 그 금액은 수십 번 다른 문서에 적혔습니다.”
“그럼 누가 갚아야 하는 거죠?”
“장부가 아니라 실제 지급을 약속한 사람이요.”
민석은 입술을 깨물었다. 당연한 답이었지만 누군가 그 당연한 일을 십 년이나 피해 다녔다.
전화기 너머에서 문재가 덧붙였다.
“그리고 사만 팔천 원을 입금한 사람은, 당신이 생각하는 그 사람이 아닐 겁니다. 내일 오전, 발신 회사가 직접 설명한다더군요.”
“어떻게 그런 사실을 아십니까?”
“저에게도 연락이 왔으니까요.”
민석은 통화가 끝난 화면을 바라봤다. 누가 자신에게 돈을 보냈는지보다 더 중요한 질문이 떠올랐다.
왜 송금인은 민석의 계좌뿐 아니라, 서문재가 읽게 될 문서의 순서까지 알고 있었을까.
그리고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다음 조건 검증: 2026년 11월 18일 09:00]
[확인 내용: 지급을 청구한 사람의 진술]
그 아래에는 예상치 못한 이름이 있었다.
[증인: 정도현]
십 년 전에 사망한 사람의 이름이었다.
제62화 댓글 0
댓글·공감·신고는 로그인 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전 익명 댓글은 그대로 표시됩니다.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