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 앱에 찍힌 것은 확실히 사만 팔천 원이었다.
강민석은 공식 앱을 직접 열어 거래번호를 확인했다. 이전처럼 화면 위에 뜬 검은 원장 알림이 아니었다. 잔액도 정확히 48,000원 늘어 있었다.
“드디어 돈이 왔네.” 준성이 말했다.
“내 돈인지는 모르겠어.”
민석은 계좌를 바라봤다. 십 년 전 택시 영수증 금액. 보낸 사람 표시에 적힌 '2036-RETURN'.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절묘했다. 그렇다고 미래에서 왔다고 선언할 근거도 없었다.
세린은 돈을 쓰지 말고 은행 공식 경로로 송금 정보 확인을 요청하자고 했다. 착오 송금이나 알 수 없는 입금은 사유를 확인하기 전까지 건드리지 않는 것이 안전했다. 기태는 거래번호와 표시 문구만으로 송금인의 실명을 특정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민석은 그 설명을 듣는 동안 이상하게 실망했다. 평생 한 번 겪을지 모르는 초자연적인 사건 앞에서 사람들은 여전히 서류를 쓰고 있었다. 그러나 곧 그런 사람들 덕분에 그는 백억 원을 통째로 잃지 않을 수 있었음을 떠올렸다.
다음 날 오전, 은행은 송금인의 표시명과 실제 계좌 정보가 다를 수 있다는 일반적인 설명을 제공했고, 확인 가능한 세부 내용은 관련 절차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고 안내했다. 민석은 입금액이 자기 돈이라고 단정하지 않은 채 기다리기로 했다.
그사이 익일금융은 고객 화면에서 '대조 완료'와 '지급 완료'를 구분해 표시하도록 일부 항목을 수정했다고 공지했다. 조하은은 수정 범위가 회사 전체 시스템이 아니라 특정 화면에 한정된다고 설명했다. 종이 안내문과 제삼자 정산 대행사의 문구는 아직 별도로 확인해야 했다.
서윤은 그 사실을 기사로 썼다. 제목은 '미래 자산 천억 원, 실제 현금 확인은 여전히 공백'이었다. 처음에 조회 수는 많지 않았다. 대신 관련 계약을 검토하던 몇몇 심사역이 원본 확인에 관한 문의를 보내기 시작했다.
“최소한 천억이 통장에 있다는 말은 더 못 하겠네요.” 준성이 말했다.
“원래부터 그렇게 말하면 안 됐지.” 민석은 대답했다.
오후 두 시에는 최은정의 수선집에서 첫 공식 회신이 왔다. 오래된 '처리 동의 완료' 기록을 정정할 수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추가 자료가 필요하다는 내용이었다. 은정은 상담원이 본인이 직접 서명한 원본이 있는지를 먼저 물었다고 했다.
“그런 게 없다고 했죠.” 은정이 말했다. “이제 저한테 있지도 않은 서명을 내놓으라고 하지는 않겠죠?”
민석은 웃었다. “그런 방향으로 확인이 되어야겠죠.”
“결과 나오면 제가 먼저 연락할게요. 천 원도 제 몫이니까.”
전화를 끊고 민석은 수첩에 한 줄을 적었다. '당사자가 자기 돈을 설명할 수 있는 날.' 이 문장은 십 년 전 그가 쓰던 기록과 닮아 있었다.
오후 네 시, 예린이 사무실에 찾아왔다. 그녀는 작은 봉투 안에 복사 자료 한 장을 넣어 왔다. 2016년 최초 계산식을 현재 시스템과 대조한 표였다. 도현이 남긴 자료와 비교해 일부 항목은 일치했고, 서로 모순되는 부분은 별도로 표시돼 있었다.
“여기에 놀랄 만한 게 있어요.” 예린이 말했다.
그녀가 가리킨 것은 RETURN 함수의 마지막 줄이었다.
IF actual_transfer IS NULL: show_pending
“실제 송금 내역이 없으면 미확인으로 표시하라는 뜻이에요. 이 줄은 처음부터 있었어요. 누군가 이를 빼 버리기 전까지는.”
“왜 뺐을까요?” 민석이 물었다.
“빼면 아직 들어오지 않은 돈도 숫자로 팔 수 있으니까요.”
“그럼 제가 지금 받은 사만 팔천 원은요?”
“실제 입금이 확인됐다는 점에서 이전과 달라요. 이제는 출처를 확인해야 할 돈이 생긴 거죠.”
예린은 민석이 받은 입금 알림을 보고 얼굴을 굳혔다.
“이 표시명은…”
“아십니까?”
“알아요. 하지만 돈을 보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건 저희가 만든 테스트 송금 요청의 식별자였어요. 2016년에 지우기로 했던 이름입니다.”
“누가 만들었습니까?”
예린은 선뜻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가방을 뒤져 문서 하나를 꺼냈다. 표지에는 2016년 10월 25일 프로젝트 종료 승인서라고 적혀 있었다. 회사 이름도, 인감도 있었지만 결정적인 결재란만 공란이었다.
“이걸 보세요. 종료 승인 당시 이 식별자는 폐기 대상이었어요. 시스템에서 다시 나타나려면 누군가 재등록했거나, 폐기되지 않은 사본이 있었어야 합니다.”
“십 년 뒤의 제가요?”
“가능성만 놓고 보면 누구라도 될 수 있어요.”
민석은 처음으로 예린의 말에서 작은 망설임을 느꼈다. 그녀가 모든 것을 알고 있지는 않았다. 다만 민석보다 더 많은 질문을 가지고 있었다.
해가 질 무렵, 준성은 사무실에서 돌아갈 준비를 했다. 문 앞에 서서 민석을 돌아봤다.
“우리 처음엔 네가 백억 받을 거라고 흥분했잖아.”
“넌 더했어. 집 보러 갈 생각까지 했잖아.”
“그래, 인정.” 준성이 웃었다. “그런데 결국 지금 확인한 진짜 돈이 사만 팔천 원인 거네.”
“그것도 내 돈은 아닐 수 있고.”
“참 돈이 안 되는 능력이야.”
두 사람은 한참 웃었다. 민석은 웃다가 눈물이 조금 났다. 억울해서인지 안도해서인지 알 수 없었다. 십 년 전에는 무슨 일이든 자신이 고치면 된다고 믿었다. 지금은 혼자서는 아무것도 끝낼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그날 밤 민석은 은행 입금 기록과 원장의 알림을 별도의 페이지에 적었다. 은행에서 실제 확인한 것은 48,000원. 원장은 그 돈이 2036년 반환 요청에서 왔다고 주장했다. 두 문장을 섞어 쓰지 않았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 민석은 누군가에게 처음으로 사건 전체를 설명해 보려다 멈췄다. 낯선 사람에게 '나는 미래의 통장 잔액을 본다'고 말하면 웃음거리일 것이다. '기업이 미확인 지급 기록을 거래 가능한 권리로 다루는 의혹이 있다'고 말하면 너무 복잡해서 제대로 전달되지 않을 것이다.
그때 서윤이 먼저 말했다.
“기사에 이 장면을 넣으려 해요. 택시 영수증과 같은 금액이 실제로 입금됐지만 송금인의 신원은 확인되지 않았다는 사실. 다만 당신의 계좌 정보는 내보내지 않겠습니다.”
“기사에 쓰면 제가 더 유명해지겠죠?” 민석이 농담했다.
“유명해지는 대신 어떤 정보를 공개해도 되는지 당신이 선택해야죠.”
“그렇다면 금액은 써도 좋습니다. 내 이름으로 미래에서 돈이 왔다고 단정하지만 않으면요.”
서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문장은 제가 쓰고 싶어도 못 써요. 출처가 확인되지 않았으니까.”
준성이 식당 창문에 비친 세 사람의 모습을 보며 말했다.
“우리가 스스로 엄청난 비밀 조직이라고 생각했는데, 바깥에서 보면 그냥 밥 늦게 먹는 사람들이네.”
“비밀 조직이라기엔 영수증 정리가 너무 많아.” 민석이 대답했다.
모두 웃었다. 따뜻한 국물과 숟가락 소리 사이에서 민석은 오래 잊고 살았던 일상의 감각을 떠올렸다. 미래의 모든 일을 아는 것보다 오늘 저녁 자신이 어디에 앉아 있는지 아는 일이 때로는 더 큰 위안이 되었다.
식당을 나설 때 서윤이 말했다.
“마지막 쉰두 번째 항목을 확인하더라도, 당신이 혼자 누를 필요는 없어요.”
“그걸 누르는 버튼인지도 몰라요.”
“그럼 더더욱.”
민석은 그녀가 건넨 작은 수첩을 받았다. 표지에는 '확인되지 않은 것들'이라고 적혀 있었다. 안에는 빈 페이지가 많았다.
“우린 매번 답을 찾기 전에 모르는 걸 적어야 할 것 같아서요.”
그는 수첩을 가방에 넣었다. 어둡게 빛나는 휴대전화 화면과 달리 종이에는 아무것도 예고돼 있지 않았다. 그 사실이 마음에 들었다.
자정을 앞두고 화면에 새로운 창이 떴다.
[RETURN — 원본 모드 진입 조건 충족]
[확인된 실제 거래: 1건]
[미확인 반환 목록: 50건]
[사람 단위 자동 변환: 중지]
민석은 손을 뻗었다가 멈췄다. 자동 변환을 멈춘 것과 원본을 되찾은 것은 다르다. 그는 세린과 예린에게 먼저 화면을 공유할 방법을 확인해 달라고 메시지를 남겼다.
그러자 원장이 아무런 경고도 없이 흰색으로 바뀌었다. 십 년 동안 검은 배경에서 빨간 숫자만 보던 민석에게 처음 보는 화면이었다.
흰 화면 한가운데 날짜가 떴다.
[2036년 11월 15일]
그 아래 실시간처럼 초가 움직이는 시계가 있었다.
[22:03:11]
[22:03:12]
[22:03:13]
민석은 휴대전화의 현재 시각을 확인했다. 2026년 11월 15일 오후 열 시 삼 분이었다. 날짜에서 십 년만 달랐고 시각은 같았다.
'정확히 십 년 뒤에도 이 창이 열린다는 뜻인가?'
그때 화면 위에 글자가 하나씩 나타났다.
'내가 누구인지 묻지 마.'
'네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먼저 확인해.'
민석은 손가락을 떼고 읽었다.
'네가 사만 팔천 원을 쓰지 않았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처음엔 그 돈을 썼거든.'
그의 목이 말랐다. 누군가 여전히 자신을 조종하고 있을 수 있었다. 기묘한 시간표시도, 메시지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그런데 마지막 문장만은 이상하게 낯설지 않았다.
'그때의 나는 그 돈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됐다.'
민석은 종이에 시각을 적었다. 화면이 사라질까 봐 두려웠지만 녹화나 증거 보존 방법부터 확인하기로 했다.
다음 문장이 나타났다.
'이번에는 52건을 다 열려고 하지 마. 마지막 한 건이 열리는 순간, 네 이름으로 사람을 바꾸는 원장이 다시 시작된다.'
그 아래에는 남은 목록의 번호가 차례로 표시됐다. 001에서 049까지. 그런데 쉰 번째 번호는 비어 있었다. 대신 맨 아래 한 줄이 있었다.
[최종 반환 대상: 강민석]
[현재 대조 상태: 지급 전]
[예상 잔액: -100,000,000,000원]
그것은 이 모든 일이 시작된 날 보았던 마이너스 백억 원이었다.
이번에는 한 가지가 달랐다.
[돈의 소유자: 강민석 아님]
그리고 미래에서 왔다고 주장하는 메시지가 마지막으로 물었다.
'네가 가진 적 없는 백억 원을, 누구에게 돌려줄 거야?'
제60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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