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취인 없음.’
민석은 봉투 사진을 바라보며 이상하게 안심했다. 누구의 이름도 먼저 적혀 있지 않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름이 없으면 적어도 누군가를 대신해 승인했다고 주장하기는 어려울 테니까.
하지만 세린은 그를 말렸다.
“이름이 없다고 안전한 건 아니에요. 누가 보낼 권한이 있는지도 모른 채 봉투를 열면 또 같은 실수를 할 수 있어요.”
그들은 보관 회사와 권리관계자들의 확인 절차를 기다렸다. 그동안 서윤은 익일금융에 질문을 보냈다. 2036년 관리자란이 사용된 근거는 무엇이며, 이 권한이 계약 금고의 자료에 어떤 효력을 주는지. 공식 답변은 '법률 검토 중'이었다.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지자 민석은 자신의 수첩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읽었다. 2016년의 그는 거창한 목표를 적지 않았다. 지급 명령 확인, 수당 재대조, 대리 서명 금지. 온통 작은 문장이었다. 누군가의 내일을 훔치려는 사람이 쓴 기록이라기엔 이상했다.
“내가 정말 나쁜 짓을 한 건 아닐까.” 민석이 말했다.
준성은 모른 척하지 않았다. “했을 수도 있지. 근데 네가 서명한 문서가 뭔지 보지 않고 미리 용서받으려고 하면 안 되잖아.”
민석은 친구를 바라봤다.
“위로가 참 서툴다.”
“나 원래 그래.”
둘은 조금 웃었다.
점심을 먹던 중 민석은 류지안에게서 연락을 받았다. 직접 통화가 아니라 그녀의 대리인을 거친 짧은 답장이었다. '대조 노트의 원본은 계속 보관하겠습니다. 다만 저와 관련한 지급 기록을 다른 사람의 정산 증빙으로 쓰는 데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민석은 답장을 오래 읽었다. 지안은 사건 초기부터 필요한 도움만 받았고, 자신의 자료를 누구에게나 보여 주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런 태도가 이제는 그에게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혹시 우리가 너무 늦게 온 건 아닐까요?” 민석이 세린에게 물었다.
“늦은 건 사실이겠죠. 일부 청구권은 시효 문제도 있을 수 있어요. 그렇다고 지금 자료를 확인하는 게 의미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사람들이 뭘 기대해야 할까요?”
“우리가 대신 약속할 수는 없습니다. 돈을 실제로 받을 수 있을지, 기록만 정정될지, 아무것도 입증하지 못할지는 각각 달라요. 당사자들이 자기 상황을 알고 선택할 수 있도록 해야죠.”
민석은 창밖을 보았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또다시 마이너스 백억 원이 떠올랐다. 처음 그 숫자를 보았을 때는 그 돈을 잃을까 봐 겁이 났다. 지금은 누가 그 숫자 때문에 인생을 바꾸었는지 더 무서웠다.
그는 지안의 답장에 단 한 줄을 보냈다.
'확인했습니다. 동의하신 범위 밖에서는 사용하지 않겠습니다.'
그날 그의 수첩에는 숫자보다 사람들의 '하지 않겠다는 말'이 더 많이 적혀 있었다. 사건이 진행될수록 민석의 할 일이 줄어드는 듯했다. 그러나 그만큼 사람들의 결정권은 조금씩 제자리로 돌아왔다.
오후 두 시, 보관 회사의 승인 아래 봉투를 열람할 수 있게 되었다. 외관 기록이 먼저 작성됐고, 봉투 안에서는 얇은 카드와 복사용지가 나왔다.
카드에는 아무 은행 로고도 없었다. 대신 십 년 전 프로그램의 파일 이름이 있었다.
RETURN_V0_ORIGINAL
그 아래에는 난수처럼 보이는 문자열이 적혀 있었다. 황기태가 설명했다.
“이건 거래 비밀번호처럼 사용하면 안 됩니다. 일단 문서의 원본 식별자로만 취급합시다. 어떤 장치에 연결되는지도 모르는 데이터예요.”
다른 종이에는 짧은 절차서가 있었다.
'반환 목록을 만들 때 수취인 주소를 비워 둘 것. 당사자 확인 전에는 돈의 주인을 지정하지 말 것.'
민석은 그 문장을 보고 한동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십 년 전에 자신들이 지키려 했던 규칙이었다. 이 규칙은 이름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아직 확인하지 못한 이름을 함부로 써 넣지 않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맨 마지막 쪽에 적힌 날짜가 그를 얼어붙게 했다.
2036년 11월 15일.
“서른여섯 년이 아니라, 정확히 십 년 뒤네요.” 준성이 속삭였다.
“누군가 그렇게 써 넣은 것일 수도 있어.” 민석이 말했다.
서윤이 종이를 유리판 위에 놓았다. 열람 허가 범위에서 촬영한 기록만으로는 잉크나 종이의 실제 작성 시점을 알 수 없었다. 오래된 종이에 미래 날짜를 인쇄할 수 있고, 얼마든지 나중에 바꿔 넣을 수도 있었다.
“이 날짜 하나만으로 미래에서 왔다고는 못 하죠.” 서윤이 말했다.
민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이유 모를 낯익음이 가슴에 걸렸다. 수첩 속 글씨체와 달리, 이번 종이의 주석은 마치 자신이 지금 적는 글씨와 비슷했다.
절차서 가장 아래에는 미래의 민석이 썼다고 주장하는 문장이 있었다.
'이 계좌에 돈이 들어오면, 그 돈이 누구의 것인지부터 확인할 것. 내 것이라고 쓰지 말 것.'
민석은 속으로 몇 번이나 읽었다. 한마디 조언치고는 너무 자신의 생각과 닮아 있었다.
저녁, 예린이 보내 온 회신에는 새로운 정보가 담겼다. 2016년 반환 함수의 버전 기록 중 일부는 종이 봉투와 별도로 외부 감사 보관기관에도 등록돼 있었다는 것이다. 오늘 발견한 문자열을 공개 자료의 문서 식별자와 대조할 수 있었다.
기태는 공식 조회 결과를 확인했다. 식별자 일부가 2016년 원본 기록과 일치했다. 그렇다고 2036년이라는 날짜까지 2016년에 작성됐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뒤늦게 문서를 덧붙였을 가능성은 남아 있었다.
“조각이 맞아 들어가는데 전체는 여전히 비어 있군요.” 세린이 말했다.
“그게 이 사건답네요.” 서윤이 대답했다.
밤 열 시, 은정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녀는 지난번 천 원짜리 반환 문서의 정정 요청을 직접 접수했고, 기관이 민원을 접수했다는 통지를 받았다고 말했다. 실제 입금 여부는 아직 확인 중이었다.
“저는 천 원 돌려받으려고 한 게 아니에요.” 은정이 말했다. “아니, 천 원도 돌려받아야 하지만, 제 이름으로 누가 일을 끝냈다고 적어 놓은 걸 고치고 싶어요.”
민석은 그 말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걸 알았다. 돈을 받는 사람의 이름을 지워 놓고도 '반환'이라고 쓴다면, 원장에 얼마가 들어오든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통화가 끝났을 때 휴대전화 화면이 켜졌다.
[원본 대조 상태: 52건 중 2건]
[실제 확인된 수취인: 2명]
[표시 인원: 52명 → 정정 중]
민석은 숨을 들이켰다. 누군가 원장의 숫자를 손대지 않고도 단위를 바로잡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2036년 승인자란에서 그의 이름이 사라졌다.
[2036년 승인자: 확인 보류]
그 아래에 새 경고가 나타났다.
'남은 50건을 확인하기 전에, 오늘 당신 계좌에 들어올 돈의 출처를 확인하세요.'
거의 동시에 은행의 공식 앱에서 알림이 울렸다.
[입금 48,000원]
민석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2016년 10월 25일, 그들이 보관한 택시 영수증의 금액과 같았다.
하지만 입금자 이름은 '정도현'이 아니었다.
'2036-RETURN'.
제59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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