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빛파트너스 설명회장은 서울의 작은 호텔 이층에 있었다. 원형 테이블마다 투명한 물병과 펜이 놓여 있었고, 스크린에는 '미래 정산 자산의 유동화'라는 제목이 떠 있었다.
민석은 참석 신청을 했지만 투자자 자격으로 들어온 것은 아니었다. 계약을 검토하라는 제안을 받은 이해관계자로서 발언 시간을 요청했다. 세린도 함께 참석했고, 서윤은 취재 등록을 했다. 설명회 주최 측은 행사 전반의 촬영은 허용하면서도 비공개 계약 자료의 촬영은 막았다.
“여기서 크게 소리치면 못 쫓아낼 거라고 생각하지?” 준성이 속삭였다.
“쫓겨나려고 온 게 아니야.” 민석이 답했다. “저 사람들이 말하는 천억이 뭔지 들어 보려고.”
단상에 오른 정태겸은 자산을 네 가지로 나누어 설명했다. 확정 채권, 지급 대기 채권, 정산 차액, 검증 중인 권리. 화면에는 각각 다른 색이 칠해져 있었다.
“우리는 모든 권리가 이미 현금이라는 주장을 하지 않습니다.” 그가 말했다. “미래 현금 흐름을 추정해 합리적인 평가를 하는 것입니다.”
누군가 박수를 쳤다. 투자자들은 잔액보다 할인율과 위험 부담 구조를 물었다. 태겸은 능숙하게 답했다.
“검증되지 않은 항목은 위험 프리미엄에 반영하겠습니다. 당사자 확인 절차도 강화할 예정입니다.”
민석은 그의 차분한 말투가 오히려 불편했다. 조금 전 은정의 수선집에서 본 팩스가 떠올랐다. 실제로 받지 않은 천 원을 누군가 지급 완료라고 표기했던 일. 그 한 건도 전부 확인되지 않은 상태에서 천억 원이라는 평가가 화면 위를 지나가고 있었다.
질의응답이 시작되자 민석이 손을 들었다.
“쉰두 건의 보류 항목이 쉰두 명의 수취인으로 표시되는 문제는 어떻게 해결하실 겁니까?”
태겸은 민석을 알아보았다. 눈꺼풀이 잠깐 내려갔다가 올라왔다.
“그 부분은 확인 중입니다.”
“확인 중이라면 거래 대상에서 제외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이미 제외된 항목도 있고, 단위 표현상 오류인 항목도 있습니다.”
“어느 항목이 어느 쪽인지 투자자가 볼 수 있습니까?”
태겸은 잠시 말이 없었다. 진행자가 다음 질문을 받으려는 순간 한 남자가 일어섰다. 중년의 투자 심사역이었다.
“저도 알고 싶습니다. 권리가 불확실하다면 할인율을 더 높이는 것과 거래 자체를 하지 않는 것은 다른 선택이니까요.”
회의장 공기가 바뀌었다. 투자자는 모두 손해를 피하고 싶어 했지만 불확실한 자료를 사고 싶어 하지는 않았다. 질문은 민석 혼자의 싸움이 아니게 됐다.
태겸은 검증 중인 일곱 종은 매입 검토를 보류했다고 다시 설명했다. 민석은 그 답변의 범위를 확인하고 더 밀어붙이지 않았다. 문제는 나머지 다섯 종의 근거 문서에 있었다. 실제 지급 명령이 있는 항목과 그렇지 않은 항목이 섞여 있는지, 어느 쪽이든 확인할 권한이 필요한 일이었다.
질의응답 직후 장내 뒤편에서 작은 소란이 있었다. 회색 양복의 투자자는 태겸의 직원을 붙잡고 계약 자료의 열람 가능 시점을 따졌다. 직원은 거래 관계상 비공개라고 답했고, 투자자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명함을 집어넣었다.
“자료를 못 주면 우리가 뭘 평가하라는 겁니까?”
민석은 그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돌려 설명회장 스크린을 살폈다. 방금 전까지 '보류 항목 미포함'이라고 쓰였던 슬라이드 하단 각주가 다른 문장으로 바뀌어 있었다.
'보류 항목은 기준 자산의 가치평가에 참조될 수 있음.'
마치 문서에서 빠진 돈이 다시 그림자로 돌아온 듯했다.
서윤이 옆으로 다가왔다.
“보류했다면서 평가에는 반영하네요.”
“정확히 어떤 영향을 주는지는 계산 근거를 봐야 하겠지만요.”
“그래도 질문할 이유는 생겼죠.”
서윤은 기사로 쓸 수 있는 공개 발언과 공개되지 않은 제안서를 구분해 수첩에 기록했다. 화려한 자산 추정 그래프보다 작은 각주 한 줄이 투자자에게 더 중요한 정보일 수 있었다.
그때 뒤편의 젊은 직원이 민석에게 조용히 말을 걸었다.
“방금 질문, 잘 들었습니다. 저희도 계약을 검토하다 의아한 부분이 있었거든요.”
“어느 회사 분이세요?”
직원은 명함을 내밀었다. 평범한 외부 회계 검토 업체였다.
“저희가 모든 것을 밝힐 수는 없어요. 다만 검토받은 서류가 어느 버전인지 명시하지 않으면 같은 자료를 다시 검토해도 결론이 달라질 수 있다는 건 지적했습니다.”
민석은 그의 이름을 허락 없이 기록하지 않았다. 다만 그 회사에 공개 가능한 검토 기준이 있는지 공식 문의할 경로를 받았다. 거창한 고발은 아니었다. 그러나 숫자를 옮겨 적을 때 반드시 버전도 적어야 한다는 말이 민석의 머릿속에 남았다.
휴식 시간, 태겸이 민석에게 다가왔다.
“당신이 십 년 전 무엇을 지키려고 했는지 이해합니다.”
“그때 일을 얼마나 아십니까?”
“누구보다 많이요. 문제는 당신이 아직도 그때처럼 모든 사람에게 일일이 묻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다 보면 아무것도 못 하죠.”
“묻지 않으면 쉽게 할 수는 있겠죠.”
“돈은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당신도 그건 알잖아요.”
태겸은 접힌 종이를 건넸다. 공개 설명회 자료와 달리 별도 제안서였다. '미래 정산 검증 자문'. 민석이 대조 보류 절차를 설계하고 회사가 보상하는 구조였다. 금액란은 비어 있었다.
“얼마를 원합니까?” 태겸이 물었다.
민석은 제안서를 보았다. 불과 얼마 전 자신에게 천억 원을 주겠다고 했던 것과 닮은 말투였다. 그때처럼 황당한 기분이 들지는 않았다. 실제로 사람의 이름을 확인하는 일에는 시간과 비용이 필요했다. 정당한 대가를 받는 전문가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 대가가 무엇을 승인하는지에 따라 뜻이 달라진다.
“계약 범위를 먼저 봐야죠.”
“예상치 못했군요. 바로 거절할 줄 알았습니다.”
“일할 사람에게 돈을 주겠다는 건 나쁜 말이 아닙니다. 제가 하지 않은 검증을 완료했다고 서명하라는 게 문제죠.”
민석은 문서 하단의 한 줄을 가리켰다.
'검증 자문 수락 시 2036년 승인자의 책임을 승계함.'
“이 문장 때문에 제안은 받지 못하겠습니다.”
태겸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그럼 다른 방법으로 끝내야겠네요.”
그가 돌아서자 휴대전화가 울렸다. 조하은에게서 온 연락이었다. 사내 감사에서 '2036년 승인자'와 연결된 지급 증빙을 찾았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그 자료는 현금 계좌가 아니라 계약 금고에 있는 종이였다.
“금고에 또 종이야?” 준성이 투덜거렸다.
하은이 보낸 문장 마지막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보관 증빙 금액: 100,000,000,000원. 실물 자산 여부: 미확인.'
민석은 태겸이 떠난 출입문을 바라봤다.
천억 원은 저 사람의 통장에 있지 않았다. 하지만 누군가 그 종이가 천억 원짜리라고 믿기만 하면, 돈이 움직이기 시작할 수 있었다.
제57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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