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예린은 카페가 아니라 시립기록관의 작은 열람실에서 민석을 기다렸다. 이름표에는 방문자 번호만 적혀 있었다. 회색 코트 소매 끝이 닳아 있었고, 그녀 앞에는 투명한 보존 필름에 든 종이 한 장이 놓여 있었다.
민석이 문을 열자 예린이 먼저 물었다.
“강민석 씨, 제가 전화한 사람과 같은 사람인지 어떤 방법으로 확인했습니까?”
“예전에 함께 일한 분과 연락 경로를 대조했습니다. 세린 변호사님이 본인 확인 절차도 도와주셨고요.”
“좋아요. 십 년 전에 당신은 그런 질문을 하지 않았어요.”
그녀의 얼굴에 웃음이 아주 조금 스쳤다. 민석은 마주 앉았다. 서윤은 취재에 관한 별도의 동의를 받은 뒤 열람실 밖에서 기다렸다. 예린은 당장은 민석 한 사람에게만 보여 주기로 했다.
“2016년에는 은행에서 급여가 늦게 들어오는 사람들을 위한 정보 제공 시스템을 시험했습니다.” 예린이 말했다. “근로자는 언제 돈이 들어올지 알고 싶었고, 담당자는 어느 지급 명령이 지연되는지 보고 싶었죠. 그때의 '내일 잔액'은 미래를 맞히는 장치가 아니었어요. 오늘 안 들어온 돈을 내일 어떤 순서로 확인할지 계산하는 표였죠.”
예린은 자료를 펼치기 전에 종이컵에 물을 따랐다. 손끝이 조금 떨렸다. 민석은 그녀가 두려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제야 알아차렸다.
“죄송합니다. 너무 많은 걸 요구하는 것 같네요.”
“요구하는 건 괜찮아요. 다만 십 년 동안 설명하지 않았던 일을 오늘 한 번에 끝낼 수는 없다는 걸 알아주세요.”
예린은 창밖을 보았다. 건너편 초등학교에서 수업을 마친 아이들이 우르르 나왔다.
“그때 우리 사무실은 밤에도 불이 켜져 있었어요. 야근할수록 은행 자료가 많이 쌓였죠. 어느 날 한 아버지가 전화를 했어요. 다음 날이 아이 수술이라는데 급여가 오지 않았다고요. 누가 전화를 받았는지 기억하십니까?”
민석은 고개를 저었다.
“당신이 받았어요. 담당 부서가 다르다고 끊어도 되는데, 전화번호를 적고 늦게까지 지급 상태를 찾았죠.”
그 말에 민석의 머릿속에서 장면 하나가 번쩍했다. 책상 끝에 놓인 차가운 김밥, 모니터 네 대, 수화기 너머의 거친 숨소리. 그러나 그것은 기억일까, 예린의 말을 듣고 지금 그린 상상일까. 그는 구별할 수 없었다.
“제가 그 돈을 찾아드렸습니까?”
“모르겠어요. 다른 팀으로 넘어갔으니까요. 그런데 당신이 전화 옆에 메모를 붙였던 건 기억나요. '계좌 잔액이 아니라 기다리는 사람의 시간을 보여 줄 것'이라고요.”
민석은 부끄러워 시선을 내렸다. 그 문장은 멋있었다. 그만큼 위험하기도 했다. 시간을 숫자로 볼 수 있게 만들면, 숫자를 사고파는 사람도 나타날 테니까.
“그때 우리가 처음부터 이 결과를 알았더라면 만들지 않았을까요?”
예린은 종이컵을 내려놓았다.
“우리가 알았어야 하는 건 이런 기술이 돈을 얼마나 벌어 주느냐가 아니라, 누군가가 기다림을 숫자로 바꿀 때 당사자가 무엇을 잃느냐는 거였어요.”
민석은 그 대답이 마음에 남았다. 손쉬운 후회는 과거를 모두 악으로 만들지만, 실제로는 좋은 의도와 나쁜 거래가 한 책상에서 시작된 적이 있었다.
그녀는 종이에 쓰인 첫 줄을 가리켰다. M은 미확인 지급 명령, C는 확인된 입금, D는 아직 처리되지 않은 대조 요청. 반환 함수는 세 항목의 상태를 비교해 다음 영업일에 확인할 목록을 만드는 단순한 규칙이었다.
“그런데 이쪽이 더 수익이 된다고 말한 사람이 있었어요.”
예린은 보존 필름 아래 다른 종이를 밀었다. 수정된 식이었다.
“미확인 지급을 미리 받을 권리라고 해석하는 순간, 존재하지 않는 돈을 상품으로 만들 수 있죠. 누구의 급여가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 그 급여를 담보처럼 계산할 수 있으니까.”
민석은 식보다 여백의 글씨에 눈길이 갔다.
'기다리는 시간을 사들일 수 있다.'
“이거, 누가 썼습니까?”
“당신이 썼어요.”
민석은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예린은 말을 이었다. “당시 당신은 지연된 돈을 하루라도 빨리 받을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회사가 먼저 지급하고 나중에 정산받는 방법도 고민했죠. 그 생각 자체는 나쁘지 않았어요. 하지만 그 비용과 위험을 누가 지는지는 계산식보다 어려운 문제였어요.”
“그래서 제가 만든 겁니까? 그 계약을요?”
“당신이 모든 계약을 만든 건 아닙니다. 그때 여러 팀이 있었고, 일부는 서로 다른 상품을 설계했어요. 책임을 한 사람에게 몰아도 사건은 정확해지지 않아요.”
예린은 세린이 확인한 당시 회의록 일부를 꺼냈다. 개념을 처음 제안한 사람으로 강민석의 이름이 있었으나, 수익화 변경안을 승인한 결재란은 비어 있었다. 출력 날짜와 서버 입력 날짜도 달랐다.
“이게 왜 십 년이나 밖으로 나오지 못했습니까?”
“원본이 아니면 누군가 쉽게 자기 쪽으로 해석할 수 있으니까요. 저는 사람들이 기다리는 시간을 계산한 원본을 남겼어요. 누가 기다리는 시간을 소유한다고 주장하는지는 남기지 않았습니다.”
민석은 자신의 수첩에 적힌 잘린 문장을 떠올렸다. '원장의 첫 번째 수취인은 돈을 받는 사람이 아니다. 그 사람은 내일을 돌려준다.' 함수가 반환한다는 뜻과 사람에게 돈을 돌려준다는 뜻이 겹쳐 있었다.
“그 문장은 저를 가리킨 게 아니군요.”
“처음에는 함수의 설명이었죠. 나중에 누군가 그 문장을 사람 이야기로 바꿔 놓았어요.”
그녀가 건네 준 마지막 자료에는 프로그램의 변경 이력이 있었다. 2016년 10월 25일 새벽, RETURN의 이름이 FUTURE_ASSET으로 바뀌었다. 그다음 줄에서 다시 RETURN으로 바뀌었다. 불과 열두 분 차이였다.
“열두 분의 공백.” 민석이 중얼거렸다.
“맞아요. 기록관에는 그 사이에 생성된 원본이 없습니다. 하지만 어떤 버전을 사용해 거래 검토를 시작했는지는 계약서의 별첨에서 추적할 수 있어요.”
“정태겸 씨가 그걸 가지고 있습니까?”
“그 사람이 갖고 있는지는 모르겠어요. 서문재는 당시 그 별첨을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정도현 씨는 별첨이 아예 다른 용도로 쓰였다고 의심했죠.”
민석은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십 년 전 저녁, 그는 기계가 자기들보다 똑똑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지급되지 않은 돈을 정확하게 찾아내 주니까. 이제 보니 기계가 똑똑했던 것이 아니라 돈이 사라진 자리가 너무 많았던 건 아닐까.
열람 시간이 끝나갈 때 예린이 말했다.
“한 가지 더 보여 줄 게 있습니다. 당신이 오늘 본 문서는 정식 설명서와 같지만, 이건 제가 당시 개인적으로 적은 메모예요.”
그녀는 접힌 쪽지를 펼쳤다.
'미래 값을 직접 입력하면 RETURN이 거꾸로 계산된다. 반드시 입력 권한을 제한할 것.'
민석은 숨을 들이켰다. 원장은 미래를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원하는 미래 숫자를 입력받아 오늘의 행동을 역산할 수 있었다. 그가 화면에서 보았던 백억 원, 일조 원, 칠십삼억 원이 떠올랐다.
“그럼 숫자를 정한 사람이 따로 있는 겁니까?”
“일부는 그래요. 전부라고 단정할 수는 없어요.”
“누가 넣었는지 찾아야겠군요.”
“그 전에 지켜야 할 게 있어요.”
예린이 민석을 똑바로 바라봤다.
“누군가 오늘부터 당신에게 아주 정확한 예측 하나를 보여 줄 겁니다. 지금까지의 엉터리 숫자와 달리, 반박하기 어려운 것으로요. 그 숫자 하나 때문에 나머지 증거를 전부 버리지 마세요.”
열람실을 나서던 민석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11월 12일 오후 2시 17분]
[발생 예정: 시립기록관 출입구 유리 파손]
[부상 예상 인원: 1]
[예측 변경 가능: 아니오]
바로 그 순간, 기록관 현관에서 누군가 유리병을 내려놓는 소리가 들렸다.
제52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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