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8일 오전 여섯 시. 강민석은 집에서 가까운 편의점에 들러 삼각김밥과 커피를 샀다.
원장은 전날 밤부터 ‘검증 책임 이관’을 요구하고 있었다. 선택 기한은 오전 여덟 시. 미동의 상태로 두면 다른 사람에게 불이익이 생길 수 있다는 경고도 반복됐다.
그러나 민석은 예전처럼 화면 속 숫자에 생활을 맡기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출근 시간을 정해 둔 대로 지켰고, 식비도 평소처럼 썼다. 두려움을 억누르는 거창한 방법은 아니었다. 그저 현실의 하루를 먼저 살아보는 일이었다.
“아직 안 눌렀네.”
편의점 앞에서 준성이 기다리고 있었다.
“네가 나 대신 눌렀을까 봐 걱정했는데.” 민석이 말했다.
“너한테 허락도 안 받고 왜?”
준성은 웃더니 금세 표정을 굳혔다.
“하지만 누군가 내 이름을 썼을 가능성은 있지.”
준성은 오래전에 금융회사와 맺은 자신의 계약서를 가져왔다. 계약서에는 정산 자료를 제삼자에게 제공하는 조항이 있었지만, 사람들의 미지급 급여를 확정 채권으로 만들어 팔 수 있다는 내용까지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준성은 자신의 서명을 확인하고 변호사에게 검토를 의뢰하기로 했다.
“내가 사인한 건 맞아.” 그가 말했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의 사인도 대신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야.”
오전 여덟 시 정각. 민석의 화면에서 이관 제안이 사라졌다.
[검증 책임 이관: 거절 기록 없음]
[승인 기록: 없음]
[처리: 미확정]
“또 미확정이네.” 준성이 말했다.
민석은 가방을 들어 올렸다.
“확정할 권한이 없으니까.”
바로 그때 서윤에게서 전화가 왔다. 익일금융과 새빛파트너스가 정산권 12종 가운데 일부의 거래 검토를 계속 중단하기로 했다는 공식 답변을 보냈다는 소식이었다.
“전부는 아닙니다.” 서윤이 말했다. “문제가 된 일곱 종의 근거 자료가 더 필요하다는 정도예요.”
“나머지 다섯 종은요?”
“자료가 다르다고 합니다. 실제로 지급 지시가 확인되는 것도 섞여 있을 수 있어요.”
민석은 어깨를 늘어뜨렸다. 사건 전체를 한 번에 사기라고 부를 수 없다는 점이 오히려 답답했다. 하지만 차이를 무시해 버리면 누군가의 정당한 권리까지 잃게 할 수 있었다.
오전 열 시, 세린은 기관에 제출했던 자료 보존 요청이 접수됐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보존 요청만으로 회사의 모든 거래가 멈춘 것은 아니었다. 다만 관련 로그와 원본 문서를 임의로 없애지 않도록 책임을 명확히 남긴 절차였다.
오후 한 시에는 신지영이 직접 찾아왔다. 그녀는 검은 파일철을 들고 있었다.
“이제 제 이름을 제 입으로 설명하고 싶어요.”
지영은 십 년 전 기사를 보류한 이유를 문서로 정리해 왔다. 당시 어느 정보를 확인했고, 어느 정보는 확인하지 못했는지, 무슨 자료가 누락됐는지 차례로 적혀 있었다. 자신의 보류 결정이 외부 지급 확인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문장도 있었다.
“이걸 공개해도 괜찮을까요?” 서윤이 물었다.
“기자님이 아니라 제가 결정할게요.” 지영이 말했다. “제 답은 일부 공개입니다. 취재원 이름과 연락처는 빼 주세요.”
서윤은 고개를 숙였다.
민석은 지영이 자리에 앉는 모습을 보며 십 년 전의 자기 자신을 떠올렸다. 그는 어떤 사람의 이름을 지운 적이 있었다. 당시에는 그녀를 보호하기 위한 행동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이름을 지우는 일과 선택권을 지키는 일은 같지 않았다. 누군가는 이름이 드러나야 자신의 돈을 찾을 수 있고, 누군가는 이름이 드러나지 않아야 안전할 수 있다.
오후 세 시 사십 분. 범우에게서 정산 대행사의 공식 수정 내역이 도착했다. 이전에 공제한 칠십삼만 원은 지급 경로 확인 오류였으며 정정 송금 절차가 진행 중이라고 했다.
“이제 돌려받는 건가요?” 민석이 물었다.
“아직 실제 입금 전이에요.” 세린이 답했다. “정정 예정과 정정 완료를 구분해야 합니다.”
그날 저녁 서윤은 기사 준비를 도왔다. 동료 기자가 주도하고 혜진이 최종 검토한 기사였다. 내용은 기사 초안의 무단 예약 사실과 정산권 검증 과정에서 확인된 문서 충돌이었다. 누가 초안을 올렸는지는 단정하지 않았다. 서윤은 자신의 입장만 밝히고 사실 검증의 최종 판단에서는 물러났다.
밤 아홉 시. 기사가 게재됐다.
[언론 검증 완료]라는 문구는 그 기사 어디에도 없었다.
원장은 잠시 조용했다. 그리고 예고 숫자가 다시 바뀌었다.
[2026년 11월 8일 예상 손실: -7,300,000,000원]
[현실 확정 거래 손실: 현재까지 해당 금액 확인되지 않음]
[예측 일치율: 재측정 중]
준성이 눈을 크게 떴다.
“드디어 틀린 거야?”
민석은 선뜻 답하지 못했다. 미래 예측이 애초에 무엇을 뜻했는지 모른다면 틀렸다는 판단도 조심해야 한다. 하지만 하나는 분명했다. 그들이 기사 전송을 막고 서명 출처를 확인한 이후, 원장의 설명은 계속 바뀌고 있었다.
그때 기태가 제안했다.
“예측이 맞아서 사건이 일어나는 건지, 사건이 일어나도록 만들어 놓고 예측이라고 부르는 건지 비교해 봅시다.”
“어떻게요?”
“누구의 계좌도 움직이지 않는 작은 사건부터요. 공개적인 약속의 일정과 실제 실행 시간을 관찰하는 거죠.”
기태는 실험 계획을 적어 보여 줬다. 원장이 어떤 일정을 예고할 때, 참석자가 그 일정을 이미 알고 있었는지, 그 예고를 보고 행동을 바꿨는지를 구분하자는 것이었다. 이름도 모르는 사람을 몰래 관찰하지 말고, 참가자가 목적을 알고 동의하는 방식으로만 하기로 했다.
준성이 피식 웃었다.
“나도 참가할게. 나한테 내일 오전 열한 시에 전화를 걸 거라고 예고해 봐.”
“그건 이미 네가 알고 있는 일정이잖아.” 민석이 말했다.
“그러니까 그게 문제지. 내가 예고를 보고 전화를 걸면 예언이 맞은 거잖아.”
기태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런 건 미래를 알아냈다는 증거가 아니에요. 일정을 주고 사람을 움직였다는 증거에 가깝죠.”
민석은 간단한 실험조차 조심스러웠다. 예고를 믿고 행동을 바꾸는 사람이 생길 수 있으니까. 세 사람은 어떤 금전 거래도 하지 않고, 일정 확인만 가능한 공개적인 만남을 시험해 보기로 했다.
“결과가 애매하면요?” 준성이 물었다.
“애매하다고 적어야죠.” 기태가 대답했다.
민석은 그 대답을 듣고 웃었다. 세상을 구할 비밀 계획치고는 너무 소박했다. 그런데 바로 그 소박함이 원장에는 없는 기능 같았다. 틀릴 수 있는 상태를 그대로 남겨 두는 것.
민석은 원장을 열었다. 다음 화면에는 낯선 두 개의 숫자가 있었다.
[미래 예측 확률: 27.1%]
[행동 유도 성공률: 88.6%]
준성이 허탈하게 웃었다.
“미래는 잘 못 맞히는데 사람은 잘 움직였네.”
민석은 오랫동안 그 숫자를 보았다. 27.1과 88.6은 원장 스스로 표시한 지표라 검증된 통계가 아니었다. 하지만 두 가지를 분리해 놓았다는 사실은 중요했다.
바로 다음 줄이 나타났다.
[예측 수정 권한 소유자: 2036년 강민석]
그 문장을 보는 순간 민석의 가슴이 내려앉았다.
그는 처음으로 생각했다. 십 년 뒤의 자신이 미래를 알려 주려는 것이 아니라, 미래가 특정한 방향으로 흘러가도록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제48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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