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재는 약속 시각보다 스무 분 먼저 도착했다.
세린이 예약한 회의실은 오래된 법률상담센터 3층이었다. 문재는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으로 올라왔다. 사람들이 드나드는 장소를 직접 고른 것도 그였다. 민석은 그가 왜 공공장소를 고집했는지 짐작했지만 물어보지 않았다.
“정태겸 씨는 이번 일에 대해 뭐라고 합니까?” 민석이 먼저 물었다.
“자기가 만든 계약이라고 말하겠죠.”
“계약을 만들었다는 것과 그 계약이 정당하다는 건 다르잖아요.”
문재는 어깨를 움츠렸다. 구두 끝에는 빗물이 조금 묻어 있었다.
“십 년 전에는 그 차이를 알면서도 무시했습니다.”
세린은 출석자와 자료 열람 범위를 확인했다. 지안의 이름을 언급할 때는 그녀의 대리인이 허용한 범위에서만 말하기로 했다. 서윤은 동료 기자의 동석을 선택했다. 이번 사건의 보도 당사자였기 때문에 자신이 단독 검증을 맡지 않으려는 판단이었다.
문재는 낡은 종이 도면을 펼쳤다. 회계 업무 프로그램의 흐름도였다. 왼쪽에는 '미지급', 오른쪽에는 '지급 완료', 가운데에는 '대조 필요'라는 상자가 있었다.
민석은 오래된 도면 가장자리의 작은 스티커를 발견했다. ‘생산 환경 반영 전’이라는 표시였다. 그는 개발자로 일하면서 그런 스티커를 수없이 봤다. 시험 장비의 숫자는 얼마든지 마음대로 바꿀 수 있지만, 실제 지급 시스템의 숫자는 누군가의 월급과 연결된다.
“이건 시제품인가요?”
“첫 번째 설계안입니다.” 문재가 말했다.
“실제 운영에 이대로 반영됐다는 기록은 있습니까?”
“그건 별도로 있습니다.”
준성이 코웃음을 쳤다.
“그럼 오늘 들고 온 건 네가 그때 좋은 설계를 했다는 증거밖에 안 되겠네.”
문재의 표정이 굳었다.
“그렇습니다. 잘 만든 도면이 실제로 좋은 시스템을 보장하지는 않죠.”
민석은 도면의 세 상자 아래에 적힌 글씨를 읽었다. ‘입금 확인은 외부 자료 대조 후 표시’. 단순한 원칙이었다. 그런데 현재의 원장은 외부 자료가 없을 때 오히려 미래를 내세워 그 빈자리를 메우고 있었다.
“어느 시점에 이렇게 바뀐 겁니까?” 민석이 물었다.
문재가 잠시 눈을 감았다.
“돈을 먼저 지급했다고 보여 줘야 할 사람이 생겼을 때부터입니다.”
“그 사람 이름이 뭐예요?”
문재는 대답하지 않았다. 민석은 다음 말을 재촉하지 않았다. 지금 그가 할 일은 누군가의 고백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고백과 별개로 남아 있는 기록을 찾는 것이었다.
“처음 시스템을 설계할 때는 이 세 가지가 분리돼 있었습니다.”
그는 세 번째 상자를 가리켰다.
“이건 돈이 오갔다는 뜻이 아니었어요. 증거가 부족하다는 뜻이었습니다.”
“그게 어떻게 정산권이 됐죠?” 서윤이 물었다.
“어떤 투자자는 ‘대조 필요’가 너무 많으면 돈을 넣지 않습니다. 투자자가 이해할 수 있게 표현을 바꾸라는 요구가 있었죠.”
“표현을 어떻게요?”
“'미래 지급 예정'으로요.”
준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지급을 미래 지급이라고 이름만 바꾼 거야?”
“그런 경우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전부는 아닙니다. 실제 계약에 따라 며칠 뒤 지급되는 돈도 있었어요. 그 둘을 구분하지 않은 게 문제였습니다.”
그는 설명을 이어갔다. 시스템은 회사들이 제출한 지급 지시서, 은행에서 확인한 거래, 고객이 입력한 예상 급여를 각각 다른 수준의 자료로 받아야 했다. 그런데 서로 다른 항목을 합친 뒤, 언론 보도나 외부 문서가 있을 때 신뢰 점수를 높이는 규칙이 생겼다고 했다.
“보도가 어떻게 거래 증거가 됩니까?”
“그건 증거가 아니라 참고 신호여야 했어요.” 문재가 말했다. “그런데 참고 신호를 확인 완료로 연결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누구요?”
문재는 입을 닫았다.
준성이 주먹을 탁자에 올려놓았다.
“설마 아직도 그 이름을 감출 거야?”
“제가 알고 있는 이름을 말해도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럼 확인 가능한 자료를 줘.” 민석이 말했다.
문재는 가방에서 작은 봉투를 꺼냈다. 내부에는 프로그램 변경 요청서의 인쇄본이 있었다.
[2016-11 변경 사항]
[외부 검증 신호가 없더라도, 기사 발행 보류를 ‘이견 없음’으로 대체할 수 있음]
서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내가 기사를 안 낸 게, 검증에 문제가 없었다는 뜻으로 바뀌었다고요?”
“그렇게 처리한 사례가 있습니다.” 문재가 답했다. “당시 외부 쪽 자료를 시스템에 수작업으로 입력했습니다. 지금 그 기록이 어떤 형태로 남았는지는 확인해야 합니다.”
“그럼 제가 십 년 전에 끝내지 못한 취재가 이번 칠십삼억 거래의 조건이 됐군요.”
“조건으로 사용될 수 있는 형태가 됐다는 겁니다.”
민석은 문재의 말을 잘랐다.
“그때 당신은 반대했습니까?”
문재는 준성을 바라봤다. 그리고 고개를 숙였다.
“변경 요청서에 서명했습니다.”
말없이 앉아 있던 준성이 웃음을 터뜨렸다. 즐겁지 않은 웃음이었다.
“넌 십 년 전에 나한테 말했지. 다들 한 번씩은 회사가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고.”
“기억합니다.”
“그때 내가 투자 자료를 정리할 때 네 말 듣고 서류를 넘겼어. 그 돈이 어디로 가는지도 확인 못 했는데.”
문재는 변명하지 않았다.
“이제 제 자료까지 확인받겠습니다. 제가 넘긴 건 사본입니다. 원본이 보관돼 있다는 곳을 알려 드릴 수 있어요.”
“왜 이제야요?”
“정태겸이 우리에게서 더는 쓸 게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오후 한 시. 세린은 문재가 제공한 요청서의 관리 번호와 원본 보관처가 실제로 존재하는지 문의했다. 확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요청서 한 장으로 서로 다른 두 종류의 장부가 만들어졌다는 가설은 설명할 수 있었다. 하나는 현금을 기록한 장부. 다른 하나는 현금이 올 거라고 믿게 할 조건들을 기록한 장부.
회의가 끝나기 전, 문재가 마지막으로 말했다.
“강민석 씨. 한 가지만 부탁합시다.”
“뭡니까?”
“내가 자료를 준 걸 용서로 계산하지 마세요.”
민석은 잠시 멈칫했다.
“그럴 생각 없습니다.”
“다행이군요.”
문재가 떠난 뒤 준성은 한동안 의자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그가 서명한 계약서가 아직 남아 있다는 사실을 민석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 친구에게 필요한 것은 당장 모든 죄를 고백하라는 독촉이 아니었다.
“네 계약서도 원본을 확보해야겠지.” 민석이 말했다.
준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내 말도 따로 확인해 줘. 내가 기억을 왜곡하고 있을 수도 있으니까.”
저녁 무렵 문재의 자료에 적힌 보관처에서 회신이 왔다. 변경 요청서 원본은 존재했다. 다만 열람 신청 대상이 제한돼 있어 곧바로 확인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원장이 회신보다 먼저 알렸다.
[2016년 변경 요청자 확인: 2명]
[서문재: 확인됨]
[나머지 1명: 강민석]
민석은 자신이 서명한 적 없다고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십 년 전 자신의 기억에는 빈칸이 많았다.
원장의 문구만으로 결론 내릴 수 없었다.
하지만 그때 문재에게서 새로운 메시지가 도착했다.
'두 번째 이름을 믿지 마세요. 요청서에 적힌 사람과 실제 서명자가 달랐습니다.'
그 아래 문재는 짧은 사진을 보냈다. 원본 문서 하단의 서명란이었다.
서명 이름은 강민석.
그러나 글씨는 그가 지금까지 보아 온 자기 필체와 완전히 달랐다.
제45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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