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지영을 찾아간 곳은 언론사도 금융회사의 회의실도 아니었다.
수도권 외곽의 작은 사진관이었다. 점심 무렵 손님이 뜸해지자 지영은 유리문에 ‘잠시 촬영 준비 중’이라는 종이를 붙였다. 검은 배경지와 조명 사이에는 가족사진 액자들이 줄지어 놓여 있었다.
“사람 얼굴은 십 년이나 지나면 알아보기 어렵지.”
지영이 서윤을 바라봤다.
“그런데 너는 여전히 노트를 그렇게 쥐는구나.”
서윤은 펜을 내려놓았다.
“제가 보낸 질문을 보셨죠?”
“봤어. 하지만 내가 기억하는 것과 남겨 둔 문서는 다를 수 있어.”
지영은 잠긴 서랍을 열어 갈색 서류봉투 하나를 꺼냈다. 봉투 겉면에는 2016년 가을의 날짜가 찍혀 있었다. 내부에는 기사 교정지 세 장이 있었다.
봉투를 건네기 전 지영은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검지 끝에 현상액이 말라붙은 듯 희미한 얼룩이 남아 있었다.
“신문사 그만두고 사진관 하니까 좋더라. 여기선 누구 얼굴을 작게 만들지, 크게 만들지 손님한테 물어볼 수 있거든.”
“그래도 사진은 보정하시잖아요.”
“보정한다고 없는 사람까지 붙여 넣진 않아.”
서윤은 그 말에 웃음을 삼켰다. 지영은 서류봉투를 두 손으로 잡았다. 그녀에게도 이 봉투는 오래 묵은 실패의 흔적이었다.
“그때 내가 네 원고를 막은 건 사실이야. 전부 확인되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그다음에 누가 보류를 ‘문제 없음’으로 바꿔 버렸다면, 그건 내 결정이 아니야.”
그녀는 서윤 앞에 작은 스탠드를 켰다. 밝은 빛 아래 교정지의 빨간 선이 드러났다. 서윤은 종이 위의 글자보다 글자 사이의 공백을 먼저 봤다. 빨간 펜은 지웠다는 표시를 남겼지만, 누군가 나중에 써 넣은 문장은 아무 표시 없이 원래부터 있던 것처럼 앉아 있었다.
“십 년 전에 저한테 설명 한 번만 더 해 주셨으면 좋았을 텐데요.”
지영은 무릎 위에서 손을 모았다.
“나도 네가 다시 묻기를 기다렸어. 그런데 그게 비겁했다는 건 알아.”
둘은 잠시 말없이 앉아 있었다. 사진관 벽에서는 낯선 가족들이 모두 환하게 웃고 있었다.
첫 장에는 서윤이 기억한 제목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돈이 왔다고 적힌 날, 돈은 오지 않았다.'
두 번째 장에는 빨간 펜으로 지운 문장이 보였다.
'서류상 지급 완료를 실제 지급으로 확인할 수 없었다.'
세 번째 장은 달랐다. 서윤은 곧바로 고개를 들었다.
“이건 제 문장이 아니에요.”
그곳에는 ‘취재 결과 지급 사실이 최종 확인됐다’고 적혀 있었다. 서윤의 이름 옆에는 네모난 검증 완료 도장이 있었다.
지영은 조명 전원을 껐다. 사진관 안이 잠깐 어두워졌다.
“그때 한빛자산신탁 쪽에서 전화가 왔어. 잘못된 보도를 내면 법적으로 대응하겠다고. 우리는 입금증을 받지 못해서 기사를 보류했지. 보류 자체는 정당한 판단이었다고 지금도 생각해.”
“그럼 이 세 번째 장은요?”
“원고를 돌려 달라고 온 사람에게서 받은 ‘수정본’이야. 누가 작성했는지 표시가 없었어. 그런데 내가 그걸 받아 놓고 네 원고철에 끼워 둔 건 내 잘못이지.”
“제가 승인했다고 말하셨나요?”
“아니.”
지영은 서윤을 똑바로 바라봤다.
“누가 그걸 묻는지도 몰랐어. 그저 언젠가 설명할 일이 생길까 봐 보관했어.”
서윤은 종이 끝의 구멍을 살폈다. 파일철에 꽂았던 흔적이었다. 세 장의 구멍 위치는 달랐다. 함께 제본된 문서가 아니었다.
그때 민석에게서 전화가 왔다. 류지안의 대리인이 오랫동안 공개하지 않았던 대조표의 일부를 외부 검증에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는 연락이었다.
“범위를 정해 주셨습니다.” 민석이 말했다. “숫자와 처리 시각만이에요. 이름은 전부 가려야 합니다.”
서윤은 지영에게 그 사실을 설명했다. 지영은 잠시 고민하다 자신의 교정지를 사본으로 제공하는 데 동의했다. 단, 개인 연락처와 가족 정보는 제외하기로 했다.
사진관에서 나온 두 사람은 계단에 앉아 봉투를 바라봤다.
“왜 십 년 동안 이걸 공개하지 않으셨어요?” 서윤이 물었다.
지영은 대답하기까지 오래 걸렸다.
“기사 하나 못 낸 기자가 뭘 할 수 있겠냐고 생각했어. 그런데 사람들은 기사 하나를 안 낸 것도 어떤 결론을 낸 거라고 받아들이더라.”
서윤은 그 말이 아팠다. 자신도 한동안 취재를 끝내지 못했다는 이유로 사과해야 할 것처럼 느꼈으니까.
“그때 취재원한테 확인되지 않았다고 분명히 말했어요.”
“응. 나도 알아.”
“그런데 우리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공간에 다른 사람이 멋대로 문장을 채웠네요.”
지영은 마른웃음을 지었다.
“세상에선 빈칸이 제일 비싸니까.”
오후 세 시. 세린의 사무실에서는 두 자료의 작성 시기를 대조했다. 하나는 지영이 보관한 교정지, 하나는 지안의 대조 노트에서 동의받은 부분이었다.
두 문서의 날짜는 같았다. 그렇지만 같은 사건을 설명하는 말은 달랐다.
[대조 노트: 52건의 지급 여부 미확인]
[수정 교정지: 52건 지급 사실 확인 완료]
준성이 주먹을 꽉 쥐었다.
“딱 반대잖아.”
“반대라는 건 확실하네요.” 기태가 말했다. “어느 쪽이 진실인지는 거래 기록과 다른 자료도 봐야 합니다.”
세린은 자료마다 최초 보관자와 전달 경로를 따로 적었다. 지영이 제공한 봉투가 2016년 그대로인지 입증하려면 보관 과정을 설명해야 했다. 하지만 지금 당장 중요했던 것은 확인됐다는 표현이 어디서 생겨났느냐였다.
그날 밤, 서윤은 쓰지 않은 기사를 다시 쓰려고 책상 앞에 앉았다. 그런데 한 줄도 적지 못했다. 자신이 당사자가 된 사건이었다. 자신의 이름이 도용됐다는 주장과 회사의 정산권 거래는 연결돼 있었지만, 스스로를 취재하고 스스로 검증 완료 도장을 찍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혜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번 건은 제가 단독으로 쓰지 않겠습니다.”
“왜?”
“제 이름도 증거에 포함돼 있어요. 다른 기자가 확인해 줘야 해요.”
혜진은 오래 침묵하다 말했다.
“그렇게 하자. 대신 네가 가진 자료가 사라지지 않도록 우리 보안팀과 같이 보존하자.”
통화를 끝낸 순간 원장에 붉은 알림이 나타났다.
[대체 검증 후보: 신지영]
[승인 예정 시각: 23:59]
[근거: 한서윤의 기사 보류 결정]
서윤의 눈앞이 아득해졌다.
“기사 보류가 동의가 된다고요?”
민석의 휴대전화에도 같은 문구가 떴다.
이번에는 서윤이 스스로 손을 뻗어 그의 수첩을 덮었다.
“신지영 선배한테 연락할게요. 이건 제 취재 문제가 아니에요. 선배의 선택을 훔치는 문제예요.”
그녀가 번호를 누르는 동안 메시지가 하나 더 도착했다.
[승인 대기자: 2명]
[다음 후보: 원고 최초 취재원]
서윤은 손끝에서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원고의 주인까지 찾아가 누락된 동의를 채우겠다는 뜻이었다.
제43화 댓글 0
댓글·공감·신고는 로그인 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전 익명 댓글은 그대로 표시됩니다.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