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여덟 시 십이 분. 한서윤은 익일금융 본사가 아니라 자신의 편집국으로 향했다.
엘리베이터 거울 속 얼굴은 피곤해 보였다. 하룻밤을 꼬박 새웠는데도 이상하게 머리는 맑았다. 부풀려진 숫자에 겁을 먹는 시간은 지나갔다. 이제 누가 그 숫자로 무엇을 하려는지 알아낼 차례였다.
“무슨 일로 이렇게 일찍 왔어?”
사회부장 이혜진이 신문 뭉치를 들고 물었다. 서윤은 자신의 이름이 걸린 기사와 보증 문서가 나타났다고만 설명했다. 원장의 존재는 아직 자료로 검증되지 않은 부분을 명확히 구분해 전했다.
혜진은 메일함을 열더니 얼굴을 굳혔다.
“오늘 오전 아홉 시 자동 발행 예약이 잡혀 있어.”
“제가 쓴 기사가요?”
“네 계정으로 올린 기사.”
서윤이 모니터를 보았다.
[단독] 익일금융 정산권 12종, 독립 검증 완료… 미지급 논란 해소
기사 본문에는 회사의 시범 서비스가 외부 대조를 끝냈으며 장기 미수 항목도 모두 정리됐다는 문장이 반복됐다. 하단에는 ‘취재·작성 한서윤’이라는 글자가 있었다.
“전 이런 기사 안 썼습니다.”
혜진은 즉시 발행을 중지했다. 편집 권한이 있는 사람이 예약 상태를 바꾸자 화면에서 ‘발행 대기’ 표식이 사라졌다. 서윤의 어깨가 조금 내려갔다.
혜진은 사무실 유리문을 닫고 보안 담당자를 불렀다. 초안을 지우지 말고 원래 상태로 보존하라고 했다. 기사 발행을 멈추는 조작과, 누가 초안을 올렸는지 추적하는 작업을 구분한 것이다.
“서윤아, 지금부터는 네 개인 비밀번호로 들어가지 마. 보안팀이 접속 기록을 먼저 확인해야 해.”
“제 계정을 누가 쓴 거면 로그인 알림이 있지 않나요?”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지. 내부 자동 배포 기능을 건드린 거라면 이야기가 달라져.”
서윤은 어느새 자신의 휴대전화를 쥐고 있었다. 잠깐 멍하니 서 있던 그녀에게 혜진이 종이컵을 건넸다. 컵에는 따뜻한 물이 들어 있었다.
“네가 기사 하나 때문에 화가 난 건 알겠어. 그런데 지금 그 초안을 함부로 읽고 다른 곳에 전달하면, 우리가 무슨 경로로 퍼졌는지 알 수 없어. 원문 보존부터 하자.”
서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자로서 누구보다 사건을 빨리 알리고 싶었지만, 이번엔 속도가 증거를 망가뜨릴 수 있었다.
편집국 복도에서는 평소처럼 휴대전화 벨소리가 울렸다. 다른 기자들은 아침 보도자료를 확인하고 있었다. 서윤은 문득 그 평범함에 화가 났다. 자신의 이름으로 칠십삼억 원이 움직일 뻔한 날에도, 세상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아침을 시작했다.
그러나 직후 화면 오른쪽에 또 다른 알림이 나타났다.
[대외 제휴 뉴스 전송 대기: 3개 채널]
“이건 또 뭐야?” 혜진이 말했다.
자체 홈페이지 게시와 별도로, 계약된 뉴스 유통 서비스로 넘어가도록 설정된 초안이었다. 전송 기록을 확인하니 외부로 넘어간 흔적은 아직 없었다. 혜진은 제휴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어 초안 전송을 중지하고 원본을 보존하라고 지시했다.
“계정 탈취인지 내부 권한 오용인지 아직 모릅니다.” 혜진이 전화기에 말했다. “확인되지 않은 문서를 기자의 기사로 내보내지 마세요.”
여덟 시 사십 분. 서윤의 휴대전화에 민석의 메시지가 왔다.
'기사 초안에 ‘독립 검증’이 들어 있습니까?'
'네. 어떻게 알았죠?'
'천억 원 실사표의 조건에도 같은 문구가 있습니다.'
서윤은 거의 동시에 걸려 온 전화에 응했다. 상대는 익일금융 데이터사업본부장 정태겸이었다.
“기자님, 아침부터 수고가 많으십니다.”
“왜 제 이름으로 발행되지 않은 기사가 준비돼 있었죠?”
“기사 제작과 저희는 무관합니다.”
“그렇다면 그 초안 내용을 어떻게 알고 계시죠?”
잠시 정적이 흘렀다.
“저희는 외부 검증이 진행 중이라는 사실만 알고 있습니다. 정확한 표현은 확인해야겠습니다.”
서윤은 통화 시각과 답변을 기록했다. 태겸이 거짓말했다는 결론을 서두르지 않았다. 다만 그가 기사 초안에 관해 질문을 받을 것으로 예상했다는 인상은 지울 수 없었다.
오전 아홉 시 정각. 흑백의 원장 화면이 휴대전화에 나타났다.
[독립 검증 공표: 실패]
[언론 승인 기록: 없음]
[손실 정산: 재산정 중]
서윤이 겨우 입을 열었다.
“막았네요.”
바로 다음 줄이 나타났다.
[기초 자산 매입 의향 금액: 7,300,000,000원]
[매입 의향 유효: 48시간]
[공표 자료 대체 경로 탐색]
막은 것은 기사 한 건이었다. 돈을 움직이려는 계획 전체가 아니었다.
민석은 세린의 사무실에서 자료를 대조하고 있었다. 예전 ‘잔여 자산 실사표’에는 천억 원이라는 총액만 있었다. 그런데 이번 문서에는 그중 일부를 실제로 매입하겠다는 투자의향서가 붙어 있었다.
매입 예정액 칠십삼억 원. 매입 대상은 지급 여부가 검증되지 않은 정산권들. 의향서는 돈이 이미 지급됐다는 증거가 아니었다. 다만 누군가 그 가치로 거래를 하려는 시도 자체는 현실의 일이었다.
“여기 제일 밑에요.” 기태가 말했다.
[독립 정보 확인: 공신력 있는 보도자료 또는 동등한 자료]
“서윤 씨 기사를 증거처럼 쓰려 했군요.” 민석이 말했다.
세린은 고개를 저었다.
“기사 하나로 권리가 확정되는 건 아닙니다. 다만 계약 당사자들이 이를 검증 조건인 것처럼 취급했다면 매입 결정에 영향을 줄 수 있어요.”
그때 서윤에게 혜진이 다시 연락했다.
“계정 문제는 보안팀이 조사 중이야. 그런데 한 가지가 더 있어. 십 년 전 네가 쓰다 만 그 기사, 기억하지?”
“네.”
“그 기사의 마지막 편집자가 오늘 아침 내게 연락했어. 이름은 남기기 싫다면서.”
“무슨 말을 했는데요?”
“기사 보류 당시 원본 대조표를 돌려준 적이 없대.”
서윤은 펜을 움켜쥐었다.
“누구한테요?”
“한빛자산신탁에서 왔다는 사람한테.”
혜진이 낮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대조표를 가져간 날, 네 이름으로 ‘검증 완료’ 도장을 찍은 사람이 있었다는 거야.”
서윤은 편집국 천장을 올려다봤다. 오래전 쓴 한 줄이 세상에 나오지 못한 이유를 이제야 묻게 된 것이다.
“그 사람 누구인지 확인할 수 있어요?”
“기록을 찾고 있어.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해. 그때도 네가 승인한 건 아니었어.”
바깥에서 정오의 종이 울렸다. 서윤은 뉴스 전송 중지 확인 메일을 받은 뒤, 취재 노트 첫 장에 새 제목을 적었다.
'기사가 아니라 기사인 척하는 문서.'
그 순간 원장에 새 문구가 나타났다.
[대체 검증 후보: 1명]
[후보: 2016년 원본 편집자]
그리고 아래에 서윤이 오래전에 알던 이름이 떠올랐다.
[신지영]
십 년 전, 그 원고를 데스크에서 지웠던 사람이었다.
제42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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