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석에게 사십팔만 원을 돌려주고 싶냐고 묻는다면, 그는 망설이지 않고 그렇다고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은행 창구에서는 ‘돌려주고 싶다’는 말만으로 일을 처리하지 않았다.
“입금인의 확인이 필요합니다. 임의로 다른 계좌에 보내시면 실제 반환으로 인정되지 않을 수 있어요.” 상담 직원이 설명했다.
민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창구 앞에 앉은 사람에게 설명을 반복해 달라고 요청하는 일도 이제는 부끄럽지 않았다.
“지금 이 금액을 쓰지 않고 보존한 상태로, 반환 사유를 기록할 수 있습니까?”
직원은 가능한 절차를 안내했다. 민석은 확인 번호를 적었다. 은행의 공식 절차가 원장처럼 미래의 결과를 알려 주지는 않았다. 대신 오늘 누가 무엇을 요청했는지 확인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창구를 나오자 휴대전화가 울렸다.
[내일의 잔액: -480,000원]
[반환 시 손실 확정]
“돌려주면 손해라는 거냐.”
민석은 화면을 껐다. 그 돈이 자기 것이 아니라면 반환은 손실이 아니었다.
오후 세 시, 서윤은 류지안의 대리인이 마련한 면담을 마치고 돌아왔다. 류지안은 직접 참석하지 않은 민석의 선택을 확인한 뒤 일부 자료의 인용을 허락했다.
“지안 씨가 원장에 입력되지 않은 번호를 왜 000이라고 부르는지 설명했어요.”
서윤은 봉투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십 년 전 B-07에서 사용한 스캔 작업표였다. 001부터 413까지는 계약서 묶음의 식별 번호였다. 그 아래, 접수되지 않은 서류를 임시로 놓는 칸이 있었다.
[000 — 대조 전 보류]
“원래는 사람 번호가 아니었던 거예요.” 민석이 말했다.
“맞아요. 지안 씨는 그 칸에 실제 지급 확인이 안 된 종이를 따로 넣었어요. 그런데 나중에 누군가 그 칸을 원장 가입자처럼 해석한 겁니다.”
준성은 작업표를 보고 탄식했다.
“우린 000번 참가자를 찾고 있었는데.”
“거기에 사람은 없었네요.”
“사람이 없던 건 아니지.” 민석이 대답했다. “그 칸에 종이를 넣은 사람이 있었고, 그 종이마다 돈을 받아야 할 사람이 있었으니까.”
세린은 작업표의 사용 목적과 현재 원장 화면의 번호 체계가 어떻게 연결되는지 확인할 추가 자료가 필요하다고 했다. 너무 아름다운 설명 하나로 복잡한 사건을 끝낼 수는 없었다.
그때 서윤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편의점에서 일하던 아르바이트생이었다.
“기자님, 제 친구가 그 월급 선지급에 가입했거든요.”
“무슨 일 있나요?”
“돈은 받았어요. 정말 빨리 들어왔는데, 정산 예정 금액이 갑자기 늘어났대요.”
그의 친구는 본인이 확인한 범위의 계약 화면을 직접 제공했다. 실수로 타인의 계정 내용을 보낸 것이 아니었다. 실제 입금액은 120만 원이었다. 이후 예상 소득 보정이라는 항목 아래 43만 원이 추가 표시됐다.
“사십삼만 원이 진짜 빚입니까?” 민석이 물었다.
“아직 확인 못 했습니다.” 세린이 대답했다. “계약서에 어떤 계산 방식이 들어 있는지, 법적으로 유효한지 봐야 해요.”
서윤은 목소리를 낮췄다.
“그분 지금 돈을 모두 썼대요. 오토바이 수리하고 월세 냈다고.”
민석은 하루 전 만난 배달기사 이범우의 얼굴을 떠올렸다. 당장 필요한 돈을 쓴 사람이 나쁜 선택을 했다고 탓하고 싶지 않았다. 계약의 핵심 조건이 사람에게 읽히지 않았다면 그 책임은 다른 데 있을 수도 있었다.
그는 범우와 연결해 달라는 생각을 곧바로 접었다. 본인이 원할 때 상담을 연결받을 수 있도록 공개된 지원 경로만 전달했다.
배달기사 이범우는 며칠 전에 민석이 다른 제보자와 만날 때 마주쳤던 사람과 별개였다. 서윤은 그가 원한다면 피해 지원 상담 창구를 연결해 주겠다고 안내했다. 그는 일단 혼자 계약서를 읽어 보겠다며 주소만 받아 갔다.
“같은 서비스에 가입했는데, 어떤 사람은 일주일치 수입을 받고 어떤 사람은 고정 급여를 받는 것처럼 계산됐대요.” 서윤이 말했다.
민석은 의자에서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예측에서 중요한 건 사람이 어떤 일을 하는지잖아요. 같은 금액이 들어와도 매달 반복되는 월급하고 어제 하루 벌어들인 매출은 다르니까.”
“그래서 더 많은 정보를 입력시키는 걸지도 몰라요. 처음 화면에는 금액만 크게 보이고, 다음 화면부터는 직업과 거래 내역을 계속 요구하거든요.”
세린은 상품 화면을 살펴보고 제보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세 가지 질문을 따로 정리했다. 실제 수령한 금액은 얼마인지, 상환 의무가 언제 어떤 근거로 생기는지, 추정치를 수정할 때 당사자가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지.
“고객이 알아서 알아보면 된다고 쓰면 안 됩니다.” 서윤이 말했다. “확인하기 어렵게 만든 쪽의 책임도 따져야죠.”
민석은 메모를 다시 읽었다.
“사람들이 대출을 받으면 안 된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건 아니에요.”
“그럼 뭐가 하고 싶은 거죠?”
“자기 돈을 빌리는 사람도 자기 결정에 필요한 내용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요.”
서윤은 그 말을 기사에 옮기지는 않았다. 대신 서비스 가입 화면의 실제 배치를 취재하려 했다. 휴대전화에서 수수료 표시를 찾는 데 몇 번의 화면 이동이 필요한지, 어떤 항목이 미리 선택돼 있는지 검증했다. 누군가의 부주의를 탓하는 기사보다 설득력 있는 증거가 될 수 있었다.
그날 밤 민석은 이범우가 전날 했던 말을 떠올렸다. ‘돈은 급하지만 아무 데서나 받고 싶진 않아요.’ 그 문장에는 도움을 받아야 할 사람의 무지나 욕심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책임지려는 평범한 판단이 담겨 있었다.
밤이 되자 익일금융의 새로운 광고가 시작됐다.
‘먼저 받은 월급, 다시 확인할 필요 없습니다.’
서윤은 광고 문구를 보자마자 담당 부서에 문의를 보냈다. 광고는 회사가 처음 공개했던 약관 설명과도 달라 보였다.
민석은 회사 앞 버스 정류장에서 오래 서 있었다. 사람들은 대부분 휴대전화를 보고 있었다. 어떤 이는 가족과 통화하고, 어떤 이는 쇼핑 목록을 확인하고, 어떤 이는 자신의 카드 잔액을 확인했다.
그 작은 화면에 ‘확인할 필요 없다’는 말이 끼어드는 것이 이렇게 위험할 줄 몰랐다.
밤 열한 시, 익일금융의 고객센터가 공식 답변을 보내 왔다.
'시범 서비스 일부 신청 건에서 예상 소득 보정 항목에 오류가 발견되어 신규 접수를 일시 중단했습니다. 상세 정산은 개별 안내 예정입니다.'
서윤은 중단 사실을 확인한 뒤 보도를 준비했다. 회사가 문제를 인정한 범위와 피해자의 주장 범위를 구분해 쓰기로 했다.
민석은 조금 안도했다. 그러나 수신된 문자 하나가 그 마음을 다시 조였다.
[과거 지급 대조 대상: 52건]
[현실 거래 재확인 완료: 1건]
[새로운 대조 제안: 강민석]
그 아래에 물음표가 없는 문장이 나타났다.
'사십팔만 원을 돌려놓으면 다음 기록은 사라집니다.'
민석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송금 반환 상담 번호를 사진으로 남기고 수첩을 덮었다.
이번에는 정말로 돈 하나가 어디서 왔는지 알아내야 했다. 천억 원이 아니라 사십팔만 원부터.
제37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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