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억 원을 제안한 사람은 화면 속 목소리가 아니라 실제 사람으로 나타났다.
다음 날 오전 열 시. 오세린의 사무실에 예약된 방문객이 있었다. 정태겸. 익일금융 데이터사업본부의 본부장이라고 명함에 적혀 있었다. 마흔 중반쯤 되어 보이는 그는 회색 정장 소매에서 회사 출입증을 꺼내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서문재 씨와 다른 사람입니다.”
민석은 그 말을 듣고도 손을 내밀지 않았다.
“다르다는 걸 어떻게 증명할 수 있습니까?”
“증명할 일이 아닙니다. 제 제안서에 적혀 있을 겁니다.”
정태겸은 가죽 서류철을 열었다. 맨 앞에는 ‘과거 지급이력 정합성 검증 협력’이라는 제목의 계약서가 있었다. 세린은 전자 사본 제공을 요청하고, 참석자 전원의 동의를 받아 회의 내용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귀사에서 저희와 접촉해야 할 이유가 뭡니까?” 서윤이 물었다.
“공개 기사에서 이름이 거론된 장부가 당사 서비스와 혼동되고 있습니다. 이 오해를 정리하고 싶습니다.”
“오해가 뭔데요?”
“불명확한 과거 기록 몇 개 때문에 정상적인 금융서비스가 위험한 것처럼 보이는 상황이죠.”
민석은 계약서의 지급 조건을 읽었다.
[검증 협력 인센티브: 최대 1,000억 원]
[지급 형태: 조건부 정산권 및 장기 성과 배분]
“현금 천억 원이 아니네요.”
정태겸이 희미하게 웃었다.
“당연히 아닙니다. 누가 현금을 한 번에 지급합니까? 대조가 끝난 후 평가한 정산권입니다.”
“그럼 제 휴대전화에 뜬 천억 원은 어디서 알았습니까?”
웃음이 사라졌다.
“금액이 일치한다고 해서 저희가 그 화면을 만들었다고 단정하시는 겁니까?”
“묻는 겁니다.”
정태겸은 차분한 말투를 되찾았다.
“계약조건이 유사하다면 저희 산정 모델과 관계가 있는지 확인해 보겠습니다.”
세린은 장기 성과 배분 조건을 짚었다. 당사자들이 받지도 않은 급여를 받았다고 진술하면 금융상품의 예측 성능이 높아지는 것으로 계산하는 구조. 확인되지 않은 급여 지급을 확정된 수익 이력으로 분류하는 데 필요한 문장들이 여러 항목에 흩어져 있었다.
“이건 누락된 노동자들의 서명에 관한 계약이군요.” 민석이 말했다.
“그분들이 실제로 임금을 받았다면 문제될 게 없겠죠.”
“받았는지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그럼 확인하면 됩니다.”
“왜 하필 제게?”
정태겸은 서류철 마지막 장을 펼쳤다. 십 년 전 강민석의 검증자 코드가 찍힌 종이였다.
“당신이 이 시스템에서 가장 오래 살아남은 검증자이기 때문입니다. 회사는 기록을 확인할 때 기준점이 필요합니다.”
“제가 기준점이 되면 류지안 씨가 직접 이야기하지 않아도 됩니까?”
“그렇게 간소화할 수 있는 길은 있습니다.”
민석은 계약서를 다시 덮었다.
“그 길은 안 갑니다.”
“후회할 겁니다.”
“계약을 거절하면 어떤 불이익이 있습니까?”
정태겸은 물컵을 내려놓았다.
“없습니다. 단지 기회를 잃는 거죠.”
서윤이 물었다.
“그럼 저희가 이 제안을 공개해도 되겠습니까?”
“비밀유지 조항을 확인하셔야 합니다.”
“아직 서명하지 않았습니다.”
세린이 조용히 끼어들었다.
“대화 사실을 보도할 수 있는 범위는 별도로 검토하겠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는 무엇이 사실이고 무엇이 제안인지 구분해 주세요.”
정태겸은 잠시 민석을 바라봤다.
“강민석 씨. 세상은 사람마다 설명서를 읽고 돈을 지급할 만큼 느긋하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속도를 만들어야 합니다.”
“속도가 필요하면 지급 확인을 빨리 하세요. 없는 동의를 만들어 붙이지 말고.”
회의가 끝났다. 정태겸은 서류를 모두 회수하려 했지만, 세린은 참석 전에 요청했던 검토용 사본의 보관 범위를 다시 확인했다. 회사가 제공하기로 한 범위의 문서만 남았다.
태겸이 복도로 나간 뒤에도 방 안에는 그의 향수 냄새가 남았다. 준성은 분을 참지 못하고 책상 모서리를 손바닥으로 쳤다.
“천억을 미끼로 사람을 들여다보겠다는 거잖아.”
“처음부터 천억이라는 돈은 없을 수도 있어.” 민석이 말했다.
기태는 방금 받은 검토용 계약서를 펼쳤다. 가장 큰 글씨로 적혀 있던 ‘최대 천억 원’ 뒤에 주석이 붙어 있었다. 확정 지급액이 아닌 목표 평가액. 사업 수익이 발생하지 않으면 영 원이 될 수도 있고, 조건을 변경하면 수령권이 양도될 수도 있었다.
“우리가 처음 본 마이너스 백억 원도 비슷했지.” 준성이 말했다.
“그때는 돈을 잃기 싫어서 놀랐고, 지금은 남의 이름이 너무 쉽게 가격표가 돼서 놀라.”
세린은 외부 전문가에게 계약 구조의 검토를 의뢰하기로 했다. 금융상품인지 일반적인 수익 배분 계약인지조차 문구만으로 결론 내리기 어려웠다.
“한 가지는 분명해요.” 세린이 말했다. “이 제안서의 목적은 피해자를 위해 임금을 대신 지급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업에 유리한 검증 의견을 확보하려는 계약이에요.”
민석은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태겸이 말한 것 중 틀리지 않은 말도 있었어요. 돈이 급한 사람은 검증 결과가 나올 때까지 기다릴 여유가 없다는 거요.”
서윤이 고개를 들었다.
“그래서 선지급 자체를 악이라고 쓰지 않을 겁니다. 어떤 비용과 위험을 누가 부담하는지가 문제죠.”
민석은 의외로 마음이 가벼워졌다. 익일금융의 서비스가 전부 악하다고 선언하면 쉬울 것이다. 그러나 그 서비스가 필요한 사람도 실제로 존재한다. 그 사람들을 무시하면 태겸이 말한 속도에 다시 모든 판단을 빼앗긴다.
“앞으로 기사에서 제가 피해자를 대표한다고 쓰지 마세요.”
서윤이 그를 바라보며 웃었다.
“그러면 당신은 뭘 하는 사람인데요?”
“잘못된 합계를 발견한 사람 정도.”
“독자한테는 그게 더 믿음직하겠네요.”
회의록 마지막 줄에 세린은 이렇게 적었다. ‘협력 제안 수령. 계약 체결 없음. 제삼자의 권한 행사 없음.’ 길지 않은 문장이었지만, 민석은 그것만큼은 정확히 남기고 싶었다.
그가 떠난 뒤, 민석의 실제 통장에 들어왔던 사십팔만 원의 입금 사유가 확인됐다. 송금 법인은 익일금융의 용역 정산 대행사였다. 송금 요청인 칸에는 민석의 검증자 코드가 사용됐지만, 민석의 서명은 없었다.
“제 코드를 써서 입금까지 시킨 거군요.”
세린은 고개를 저었다.
“코드가 적혔다는 것까지가 확인된 사실입니다. 사용자가 누구인지는 별도로 확인해야 해요.”
민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작은 차이를 지켜야 했다.
정태겸이 두고 간 명함에는 개인 휴대전화 번호가 있었다. 번호 아래 작은 글씨가 적혀 있었다.
'프로젝트 000 — 잔여 자산 실현.'
그리고 그날 오후, 류지안의 대리인에게서 연락이 왔다.
“류지안 씨가 만나겠다고 합니다. 다만 조건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강민석 씨가 오시면 안 됩니다.”
민석은 잠시 말을 잃었다. 그날 처음으로 원장이 아닌 사람에게서 명확한 거절을 들었다. 그는 그 거절을 받아들였다.
“알겠습니다. 제가 없어도 그분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이 참석하도록 하겠습니다.”
전화기를 내려놓자 익일금융의 광고 문구가 다시 떠올랐다.
‘더 빠른 정산, 더 정확한 내일.’
그 말은 이제 위협처럼 들렸다. 빠른 정산으로 가장 먼저 사라지는 것은 누군가의 확인할 시간이었다.
제36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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