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범 서비스의 광고는 다음 날 아침 지하철 손잡이 광고판에도 떠 있었다.
‘월급날까지 기다리지 마세요.’
민석은 출근길 내내 같은 문구를 세 번 보았다. 금융상품 광고는 실제 회사가 구매한 정상적인 광고 지면에 실려 있었다. 하지만 광고에 적힌 약속이 곧 안전하거나 적법하다는 보증은 아니었다.
휴대전화에 들어온 메시지에는 ‘내일의 월급 90퍼센트까지 즉시 지급’이라는 문구가 있었다. 동료 하나가 흥미롭다는 듯 화면을 보여 줬다.
“요새 이런 게 있대. 급한 사람한테 괜찮지 않아?”
“어떤 계약인지 봐야겠죠.”
“넌 요즘 모든 걸 계약부터 보네.”
민석은 대답 대신 웃었다. 얼마 전의 자신이었다면 급여가 며칠 먼저 나온다는 말에 금리와 수수료만 계산했을 것이다. 이제는 내일 아직 일하지도 않은 시간까지 누구에게 넘기는지 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회사의 점심시간, 서윤이 시범 상품의 약관을 보내 왔다. 공개된 설명서에는 미래 급여를 예상하는 알고리즘과 지급 예측 실패 시의 정산 기준이 적혀 있었다. 금융 관련 인허가나 제휴 여부는 별도로 확인해야 했고, 약관에 등장하는 이름이 실제 가입자와 연결되는지도 미확인 상태였다.
그중 민석을 멈춰 세운 조항이 있었다.
'예측 자료 정합성 확보를 위해 과거 지급 이력의 보완 확인을 요청할 수 있습니다.'
“과거 지급 이력.”
그가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이 회사에 필요한 것은 미래가 아니라 과거였다. 십 년 전 지급했다고 표시된 돈이 실제로 지급됐는지 검증하려는 사람을 찾고 있었다.
“류지안 씨의 기록이 거슬리는 거네요.” 준성이 통화에서 말했다.
“아직 회사가 직접 그 기록을 요구한 건 확인 안 됐어. 다만 상품이 신뢰받으려면 과거 데이터를 확실하게 보일 필요는 있겠지.”
오후 두 시, 서윤은 첫 가입 희망자 중 한 명인 배달기사 이범우를 인터뷰했다. 범우는 공개 인터뷰에 동의했지만 실명은 기사에 내지 않기로 했다. 그는 다음 주 오토바이 수리비가 급했다. 월급을 받는 근로자도 아니어서 자신의 수입이 어떤 기준으로 예측되는지 알 수 없었다.
“수수료가 얼마인지 정확히 보여 줍니까?” 서윤이 물었다.
“미리 받을 돈은 크게 뜨고, 나중에 빠질 돈은 여러 화면으로 나뉘어요.”
“아직 신청은 안 하셨죠?”
“아니요. 오늘 밤까지 혜택이라고 해서 고민 중이에요.”
그는 자신이 가난해서 이런 상품을 본다는 식의 표현은 쓰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서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돈이 급하다는 사실은 판단력이 없다는 뜻이 아니었다.
그날 저녁, 류지안은 법률대리인을 통해 급여 확인 요청서를 제출했다. 서류에는 이천팔백칠십사만 원 전체를 달라고 적혀 있지 않았다. 자신의 사십팔만 원과 관련 거래번호의 존재 여부만 확인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민석은 그녀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이미 필요한 말을 들었고, 결과는 대리인을 통해 확인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저녁 여덟 시, 민석의 개인 통장에 낯선 돈이 들어왔다.
입금액 480,000원.
표시된 입금자는 ‘한빛 미정산 정리’.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회사의 이름이 섞여 있었다.
“무슨 돈이지?”
민석은 우선 돈을 쓰지 않았다. 은행의 실제 거래 내역에 입금이 있는지 확인했다. 이번에는 원장 속 예상 숫자가 아니라, 은행 앱에 찍힌 실제 거래였다.
서윤은 입금 확인 화면을 보고도 좋아하지 않았다.
“류지안 씨가 못 받은 돈과 금액이 같아요.”
“그래서 더 이상합니다. 왜 저한테 들어왔죠?”
오세린은 송금인 표기만으로 지급 주체를 단정할 수 없다고 했다. 출처를 확인하고 잘못 송금된 돈이라면 공식 절차로 처리하자고 했다. 민석은 은행에 문의 접수를 남겼다.
십오 분 뒤 문자 한 통이 도착했다.
'첫 번째 대조가 완료되었습니다. 앞으로 필요한 일곱 번의 대조에 협조해 주십시오.'
발신자 번호는 표시되지 않았다. 화면 아래에는 링크도 있었다. 민석은 누르지 않았다.
그 대신 문자 전체를 보존하고 세린에게 전달했다. 또 익일금융의 공개 상담번호에 상품 약관에 관한 질문을 공식적으로 남겼다.
준성이 퇴근길에 민석을 찾아왔다.
“야, 사십팔만 원 생겼으면 밥이라도 사라.”
“내 돈인지 모르는데 어떻게 써?”
“농담이야.”
“그 말이 농담으로 들리기 전까지 얼마나 걸린 줄 알아?”
준성이 웃지 못했다. 둘은 편의점 앞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삼각김밥을 먹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누구도 두 남자가 백억 원과 사십팔만 원을 같은 무게로 생각하는 이유를 몰랐다.
준성은 편의점 의자에 앉아 영수증을 정리하는 민석을 한참 바라봤다.
“너 가끔 보면 옛날이랑 아주 다른 사람 같아.”
“그래?”
“옛날에는 투자 수익률 얘기만 하면 눈이 반짝였잖아. 한 시간 동안 카페에서 수익률 표까지 그려 줬고.”
“그때도 돈을 벌고 싶었던 건 맞아.”
“지금은 아닌가?”
민석은 버려진 복권 조각이 굴러가는 길가를 바라봤다.
“지금도 벌고 싶어. 월급만으로는 모으기 어려운 돈도 있고. 집 계약 갱신할 때마다 불안하잖아. 엄마 병원비 생각도 해야 하고.”
“그럼 천억 원이면 고민 끝이네.”
“누구 돈인지도 모르는데 끝이겠냐.”
준성은 포장지를 구겼다.
“그걸 알면서도 내가 너한테 온 이유가 뭔지 알아?”
“뭔데?”
“2016년엔 내가 너보다 먼저 돈을 택했거든.”
잠깐 사이 버스 두 대가 정류장을 지나갔다. 준성은 어떤 계약을 보고 서명했는지 자세히 말하지 않았다. 지금 말할 준비가 안 됐다는 걸 민석도 알았다. 대신 그는 오래된 관계를 끊지 않으려는 듯 질문했다.
“그때 넌 얼마 받았어?”
“정확히는 받았다고 생각했지. 스톡옵션이었어. 행사할 수도 없는 주식.”
“그게 얼마짜리였는데?”
“지금 가치로 환산할 수도 없어. 회사가 없어졌으니까.”
준성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돈 한 푼 안 되는 종이 때문에 그날 말을 못 했다는 게 제일 괴로워.”
민석은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친구의 고백이 과거의 행동을 용서하게 만들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다음 질문을 할 근거는 됐다.
“그 계약서도 남아 있냐?”
“있어. 언젠가 보여 줄게.”
“언젠가가 아니라, 네가 준비되면 공식적으로 보여 줘. 내 이름은 거기 빼고.”
준성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두 사람이 먹은 삼각김밥과 음료수 값은 만 이천팔백 원이었다. 민석은 카드로 결제하면서 숫자를 확인했다. 내일 어디서 돈이 들어올지는 몰라도, 오늘 내가 쓴 돈은 안다는 사실이 소박하게 위로가 됐다.
밤 열한 시. 은행 상담 창구에서 거래 확인 회신이 왔다. 입금은 실제로 이루어졌고 송금 계좌는 국내 법인의 업무용 계좌였다. 세부 지급 사유는 송금인 확인이 필요했다.
민석은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한숨을 쉬었다.
그때 000에서 메시지가 왔다.
'그 돈은 제 몫이 아닙니다. 누군가 당신이 얼마만큼의 의심을 버릴 수 있는지 시험하고 있습니다.'
곧이어 두 번째 문장이 도착했다.
'내일은 사십팔만 원이 아닙니다.'
휴대전화의 검은 화면에 새 예고가 떠올랐다.
[내일의 정산: +100,000,000,000원]
[조건: 누락된 사람의 증언으로 과거 지급 완료 확정]
천억 원.
민석은 숫자보다 마지막 문장을 봤다. 누락된 사람의 증언. 류지안의 선택 하나에 천억 원짜리 가격표가 붙었다.
“이번에는 큰돈을 주겠다고 하네.” 민석이 낮게 말했다.
그리고 전화를 걸었다. 서윤도 준성도 아니었다. 낮에 인터뷰한 배달기사에게 전달할 공개 안내문을 준비 중인 세린이었다.
“이 회사가 지금 사려는 게 뭔지 알 것 같습니다. 내일 아침에 당장 확인해야 할 게 있어요.”
민석은 천억 원을 받기 위한 방법이 아니라, 천억 원을 미끼로 누가 무엇에 서명하게 하려는지부터 적기 시작했다.
제35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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