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일 0시.
도시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길거리 전광판은 광고를 바꿨고, 편의점 냉장고는 평소처럼 웅웅거렸다. 버스가 종점으로 들어왔고, 어느 집에서는 늦은 설거지 소리가 났다. 그러나 세린의 사무실 한쪽에 놓인 노트북에는 열두 개의 작은 자물쇠가 나란히 떠 있었다.
[미확인 동의 복제 제한: 12개 운영 원장]
[실제 계약·채권 상태: 별도 확인 필요]
[원장 내 자동 대체 승인: 보류]
민석은 그 문장을 오래 읽었다.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처음으로 원장이 누군가 대신 결정하는 것을 멈췄다. 하지만 그 화면에서 이루어진 변화가 세상의 모든 빚과 분쟁을 지웠다는 뜻도 아니었다.
서윤은 제보자들에게 확인 전화를 걸었다. 윤미정의 서점 단말기에는 더 이상 정산 경고가 뜨지 않았다. 이수빈의 휴대전화에서는 백만 원 선수령 버튼이 사라졌다.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에게는 취업 축하금 수령 완료 문구 대신 '검증 필요'라고 표시됐다. 세 사람 모두 실제 계좌를 별도로 확인했다. 아직 돈이 빠져나간 기록은 없었다.
“이 정도면 다행이네요.” 서윤이 말했다.
“끝났다고는 못 하겠죠?” 민석이 물었다.
“그 말은 기사에서도 안 할 거예요.”
세린은 확보한 자료 목록을 다시 정리했다. 오래된 투자자들의 권리와 분쟁, 정도현의 사망에 관한 사실 확인, 서문재가 인정한 기록 조작의 경위. 원장 속에서 보류했다고 현실의 책임까지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이후에는 실제 기관과 절차에서 다뤄야 합니다.” 세린이 말했다. “원장 화면만 보고 누가 빚을 갚았다거나 면책됐다고 주장해서는 안 돼요.”
민석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미래를 안다는 능력은 그에게 세상을 건너뛰고 싶은 마음을 주었다. 이제는 건너뛸 수 없는 절차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보호하는지 알게 됐다.
자정이 지나자 민석은 어머니에게 짧은 메시지를 보냈다. 알림창에서 그를 보증인으로 내세우던 문구가 보류됐다는 사실과, 실제 통장에 문제가 없는지는 은행에서 확인해야 한다는 설명을 함께 적었다. 어머니는 자고 있을 시간이었으므로 답장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는 수빈에게도 전화를 하지 않았다. 전날 수빈은 늦은 시간 긴급한 피해가 확인될 때만 연락해 달라고 했다. 지금은 문제가 더 커지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했을 뿐이었다. 아침에 정식 안내를 보낼 생각이었다.
기태는 커피 대신 미지근한 물을 마셨다. “열두 개가 한 번에 보류되는 걸 처음 봅니다.”
“영구적인 상태는 아니죠?” 민석이 물었다.
“예. 누가 규칙을 바꾸려 할 수도 있고, 새로운 원장이 생길 수도 있어요. 그렇지만 지금은 자동 복사가 끊겼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네요.”
기태는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 완벽히 예측해 주는 세상보다, 틀릴 수 있다는 경고가 살아 있는 세상이 낫죠.”
민석은 그 말을 수첩에 적으려다가 그만뒀다. 이젠 좋은 문장을 모으는 것보다, 다음번에 같은 문제가 생겼을 때 다른 사람도 이해할 수 있는 설명을 남기는 일이 필요했다.
그는 세린에게 정리된 검증 절차를 설명 문서로 남기자고 제안했다. 오세린은 동의했지만, 대중에게 공개할 부분과 증거로만 보관할 부분은 구분해야 한다고 답했다. 그 당연한 절차가 민석에게 작은 희망처럼 느껴졌다.
새벽 한 시가 되어 준성은 사무실 앞 자판기에서 커피 다섯 잔을 뽑아 왔다. 그는 예전처럼 농담을 하려다 멈췄다.
“이제 나 좀 용서해 줄 수 있어?”
민석은 종이컵을 받았다.
“십 년 전 일은 아직 확인할 게 많아. 네가 숨긴 것도 그렇고.”
“알아.”
“그래도 이번에 사실을 말해 준 건 고마워.”
준성은 웃다가 눈을 내리깔았다. 그 말이면 충분하다는 표정이었다. 용서와 신뢰는 원장처럼 한 번 누르는 버튼이 아니었다.
새벽 두 시, 김예린의 세 번째 메시지가 도착했다.
'당신들은 이번에 내 이름을 쓰지 않고도 원장을 멈췄군요. 그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저는 앞으로도 제 자료를 제공할지 선택할 겁니다. 그리고 2016년의 강민석 씨가 나에게 해 준 일은 기억합니다.'
민석은 답장을 쓰다가 멈췄다. 변명도 사과도 긴 설명도 떠올랐지만, 상대가 더 긴 대화를 원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알겠습니다. 선택을 존중하겠습니다. 도움이 필요할 때에는 연락해 주세요.'
그것만 보냈다.
서윤은 마지막으로 그에게 물었다.
“2036년 보고서는 어떻게 할 겁니까?”
민석은 휴대전화를 꺼냈다. 보고서의 표지에는 자신의 이름과 작성 날짜가 있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출처였다. 누가 어디서 만들었는지 확인되지 않았다. 그는 파일을 원본 상태로 보존하고, 손상되지 않는 별도 복사본을 만든 뒤 세린에게 존재 사실만 알렸다.
“혼자 읽진 않겠습니다.” 민석이 말했다.
“무섭습니까?”
“예.”
서윤은 웃지 않았다.
“저도요.”
그들은 독립된 컴퓨터에서 보고서를 열었다. 첫 장에는 예상한 대로 기록 보관에 대한 설명이 나왔다. 여러 버전의 원장이 존재했고, 과거의 변경이 미래의 기록에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기술적 설명은 단편적이었다. 이를 사실로 인정하려면 더 많은 근거가 필요했다.
둘째 장에는 놀라운 항목이 있었다.
[2036년 검증 실패 목록]
[2026년 공동 정산 참가자 414명 중 상태 추적 불가: 1명]
민석은 숫자 1을 오래 들여다봤다. 414명 중 한 명. 이 숫자는 앞서 예린에게 남겨 둔 독립적인 선택권과 다르게 보였다. 상태 추적 불가라는 말은 실종도 사망도 의미하지 않았다. 단지 원장이 더는 그 사람의 상태를 기록하지 못한다는 뜻일 수 있었다.
“이름을 찾아볼까요?” 서윤이 물었다.
“그 사람을 찾아보자는 뜻이 아니라, 왜 기록이 없는지 확인해 보죠.”
그들은 마지막 장을 펼쳤다.
[상태 추적 불가 참가자: 017번]
[기록 시각: 2036.10.30]
[사유: 원본 대조 대상의 자발적 기록 거부]
017번.
정도현이었다. 죽은 것으로 알려졌고, 원장에서는 '이관 대기'에 남아 있던 사람. 민석은 숨을 멈췄다.
“죽은 사람의 자발적 기록 거부라니요.” 서윤이 중얼거렸다.
“그렇다고 살아 있다고 단정할 순 없어요.” 민석이 말했다. “누가 그의 이름을 썼을 수도 있으니까.”
민석이 문서를 넘겼다. 마지막 장에는 정도현의 가족이 2026년 어느 날 기록 보관을 거부했다는 메모가 붙어 있었다. 가족의 의사가 본인의 생전 의사를 대체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문서에는 그 구분이 누락되어 있었다.
“또 똑같은 문제네요.” 세린이 말했다. “사망한 사람의 이름으로 누가 결정할 수 있는지.”
서윤은 책상을 바라봤다. 그녀는 그동안 정도현의 죽음이 남긴 공백을 사실관계로 메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원장은 죽은 사람의 빈자리마저 동의로 계산하려 했다.
민석은 2036년 보고서의 마지막 파일을 확인했다. 음성 녹음 하나였다. 오래된 지하철 안내 방송 같은 잡음이 섞여 있었다.
“과거의 나에게.”
민석은 소리를 낮췄다. 이번에도 자신의 목소리였다.
“너는 이번에 열두 개의 원장을 멈췄다. 내가 십 년 전에 하지 못했던 일이지. 하지만 원장이 멈춘 다음에야 기록되지 않은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잠시 종이가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틀린 건 돈의 미래를 예측한 일이 아니야. 기록에 없는 사람은 책임질 필요도 없다고 믿은 거야.”
녹음은 거기서 끊겼다.
민석은 017번 화면을 다시 보았다. 하위 원장의 강제 정산이 멈춘 뒤에도 이관 대기로 남은 기록. 실제 서류와 원장의 분류가 일치하지 않는다면, 누군가의 죽음조차 이상한 숫자로 계속 이용될 수 있었다.
그때 민석의 오래된 수첩 사이에서 작은 종이쪽지 하나가 떨어졌다. 분명 여러 번 넘겼던 첫 장 뒤쪽이었다. 종이에는 흐릿한 글씨가 있었다.
'도현은 마지막 날 누구를 만나러 간 것이 아니다. 누구를 원장에서 빼내러 갔다.'
민석의 필체와 닮아 있었다. 그러나 언제 썼는지는 알 수 없었다.
서윤이 종이를 보며 물었다.
“누구를 빼내려고 했을까요?”
그 순간 휴대전화가 켜졌다. 동기화도, 선입금도, 승인 요구도 아니었다. 처음 보는 상태 메시지였다.
[기록되지 않은 참가자 발견]
[번호: 000]
[성명: 확인 필요]
[원장 외부에서 보내는 요청]
화면에 짧은 문장이 나타났다.
'강민석 씨. 이제 내일의 잔액이 아니라 어제의 빈칸을 확인해 주세요.'
민석은 화면을 닫지 않았다. 이번에는 누구의 이름을 대신 적지 않을 것이다. 먼저 그 메시지가 어디에서 왔는지, 누가 그것을 보냈는지 확인해야 했다.
그런데 마지막 줄이 추가됐다.
[발신자 확인용 질문]
[2016년 10월 25일, 회의실 문을 처음 잠근 사람은 누구인가?]
민석은 고개를 들었다. 서문재에게서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그날 문은 서문재가 잠갔다. 그러나 화면이 묻는 것은 '누가 잠갔다고 들었는가'가 아니었다.
'처음 잠근 사람.'
어떤 기록에도 없던 한 사람이 십 년 전의 문 앞에 서 있었다.
제30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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