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정까지 남은 시간이 스물네 분이라는 사실을 민석은 뒤늦게 깨달았다.
거울처럼 서로를 비추는 열두 개의 운영 원장. 한 원장이 ‘동의했다’고 쓰면 다른 원장은 그 문장을 원본처럼 복사했다. 내용이 사실인지보다 어디에 먼저 기록됐는지가 중요했다.
김예린이 열람을 허락한 자료, 윤미정이 보관해 온 책, 공공 기록 열람실의 조건부 합의서, 서문재의 진술, 수빈의 이자 내역. 자료는 많았지만 서로 다른 사람에게서 왔다. 오히려 그 점이 힘이 될 수 있었다. 한 사람의 거짓말로 모든 자료를 한꺼번에 바꾸기는 어려웠다.
“원장 D부터 L까지는 뭐라고 합니까?” 서윤이 물었다.
황기태는 화면에 열두 개의 칸을 띄웠다.
A부터 C까지는 노란색. 그들은 전날 중복 지급 코드 때문에 부분 보류 상태에 들어가 있었다. D부터 K까지는 회색. 마지막 L만 붉은색이었다.
“L이 다른 원장에 승인 결과를 배포하고 있어요. 나머지 여덟 개는 그걸 읽고 따라갑니다.”
“그럼 L을 막으면 끝인가요?” 준성이 물었다.
기태는 고개를 저었다.
“L의 기록을 삭제하면 다른 원장에 ‘기록 손실’이 남습니다. 원본이 사라졌는데도 왜 삭제했는지 추궁하는 문구가 생기겠죠. 이번에는 삭제보다 출처와 검증 상태를 같이 전해야 합니다.”
세린은 세 종류의 검증 자료를 정리했다. 하나는 공공 기록에 남은 접수증, 하나는 실제 은행 거래 대조 자료, 하나는 피해자가 직접 부인한 동의 기록이었다. 서로 다른 사실을 증명하므로 ‘원장이 모두 틀렸다’는 단순한 결론을 강요하지 않았다.
밤 열한 시 삼십육 분, 첫 번째 독립 대조가 시작됐다. 원장 A가 중복 지급 코드를 받아들이자 B는 해당 코드의 출처를 물었다. C는 같은 코드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급여 정산과 관련된 금액 전체를 보류하지 않겠다고 표시했다.
“이게 정상인가요?” 준성이 물었다.
기태는 손가락을 가리켰다. “처음으로 원장끼리 의견이 달라졌어요. 이전에는 하나가 승인하면 나머지가 그대로 복사했는데.”
서윤은 손에 쥔 펜을 내려놓았다. “그럼 의견 차이가 남아 있는 건 좋은 신호네요.”
“좋은 신호일 수 있죠. 다만 현실의 채권자를 입증한 것은 아닙니다.”
모니터에는 작은 물음표가 열두 개 표시됐다. 전에는 모든 것이 ‘정산 완료’나 ‘승인 대기’ 두 갈래로 나뉘었지만, 이제 각 기록에 설명이 달렸다. 지급 시점 미확인, 당사자 연락 불가, 중복 코드 검토 중. 눈에 띄는 숫자는 줄지 않았는데 화면은 이전보다 훨씬 복잡해졌다.
민석은 잠시 웃었다. 모든 문제가 단순해졌다면 오히려 의심했을 것이다. 누군가의 한 달 생활비를 다루는 기록에는 이 정도 복잡함이 남아 있는 편이 낫다.
갑자기 L의 빨간 창이 깜빡였다.
[원본 대조 실패 시 검증 자료 보관자에게 결과 책임 이관]
세린이 화면을 지적했다. “이 문구 역시 우리가 동의한 바 없습니다. 보관자에게 결과를 떠넘길 수 없다는 이의도 같이 남기세요.”
민석은 그 말을 별도의 기록으로 제출했다. 그 뒤에야 원래 적으려던 검증 의견을 쓰기 시작했다.
민석은 원장에 글을 적었다.
'원장 간 복사된 동의는 원래 당사자의 동의 원본이 될 수 없다. 검증되지 않은 표시에는 대체 승인 효력을 부여하지 말 것.'
입력창 아래 새로운 문구가 나타났다.
[독립 대조 검증을 시작합니다]
[검증 자료 제공자: 3]
[당사자 전체 동의: 확인되지 않음]
[검증 조건: 불충족]
준성이 책상을 쳤다.
“또 불충족이야?”
“아니.” 민석은 화면을 가리켰다. “이번엔 불충족이 필요한 답이야.”
원장은 당사자 전체 동의가 없다고 스스로 표시했다. 처음에는 그것이 장애물이었다. 그러나 민석이 복원하려는 규칙에 따르면 동의를 확인하지 못했다는 상태는 전송을 멈춰야 할 이유였다.
기태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그렇군요. 억지로 ‘모두 동의’라고 만들 필요가 없어요.”
“애초에 아무도 그런 동의를 얻지 못했으니까.”
민석이 최종 검증 의견을 제출하자 D부터 K까지의 회색 칸에 작은 자물쇠 표시가 생겼다.
같은 시각, 윤미정이 자신이 보관한 책 사진을 원래 보내기로 한 범위에서 다시 전송했다. 책의 마지막 장은 사진 촬영 각도에 따라 숫자 하나가 보였다가 안 보였다. 민석은 처음에 그걸 새로운 암호라고 생각했다.
“아니에요.” 미정이 통화로 설명했다. “아버지가 책에 붙여 둔 도서관 관리 라벨이에요. 낡아서 떨어진 거예요.”
민석은 웃었다. “요즘은 평범한 숫자도 무섭네요.”
“그러게요. 전 책값에 적힌 칠만 사천 원이나 잘 받고 싶어요.”
그 농담에 모두 조금 웃었다. 윤미정의 서점은 원장의 참가번호로도, 미래의 지급 예고로도 설명할 수 없는 일을 계속하는 곳이었다. 어떤 날은 책 한 권을 팔고, 어떤 날은 아무것도 팔지 못하지만 사람은 매일 문을 열었다.
화면에 남은 여덟 개 자물쇠를 보며 준성이 말했다. “이제야 일이 된 것 같다.”
기태는 아직 빨갛게 깜빡이는 L을 가리켰다. “마지막 문제는 우리보다 미래 기록을 더 믿도록 설계된 규칙이에요.”
민석이 대답했다. “그럼 그 규칙이 왜 근거 없는 믿음인지 보여 줍시다.”
[미확인 동의 복제 제한: 8개 운영 원장]
서윤이 환호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L이 여전히 빨갰다.
[운영 원장 L: 독립적인 미래 동의 원본 존재]
[검증자: 강민석, 2036년]
“원본이 미래에 있으면 우리가 대조할 방법이 없잖아요.” 준성이 말했다.
“그게 바로 문제예요.” 기태가 대답했다. “원장은 비교할 수 없다는 이유로 미래의 원본을 가장 높은 우선순위로 두고 있습니다.”
민석은 화면을 오래 바라봤다. 지금 당장 그 원본을 지우면 이전과 같은 문제가 반복된다. 그렇다고 2036년의 자신을 믿을 수는 없었다.
그때 서문재가 말했다.
“보관자가 정하는 규칙이 하나 더 있습니다. 원본이 존재하지만 접근할 수 없을 때는 ‘검증 보류’ 상태를 유지한다는 거예요.”
기태는 기록을 뒤졌다. 정말로 옛 문서에 그 조항이 있었다. 이상하게도 2016년 버전과 2036년 버전이 둘 다 똑같았다.
“왜 지금까지 말하지 않았습니까?” 민석이 물었다.
“그 조항을 쓰면 미래 원본의 유효성을 보류합니다. 그리고 제가 쌓아 온 운영 수익 기록도 함께 재검토되니까요. 저는 그게 두려웠습니다.”
“그럼 지금도 두렵습니까?”
서문재는 민석을 똑바로 보았다.
“두렵습니다. 하지만 그 두려움이 다른 사람의 동의는 아닙니다.”
민석은 그 말을 그대로 받아 적었다. 서문재가 불리한 조건을 인정했다는 사실이 곧 면책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검증에 필요한 문서는 확인할 수 있었다.
시간이 십이 분 남았을 때 민석은 운영 원장 L에 새 의견을 보냈다.
'2036년 미래 원본은 오늘의 당사자가 접근하거나 검증할 수 없다. 확인 전까지 현재의 동의 원본으로 사용할 수 없다.'
원장은 잠시 멈췄다. 그리고 붉은색 칸에 [보류 심사 중]이라는 글자가 나타났다.
정적.
누구도 화면을 만지지 않았다. 민석은 엄마에게 걸어야 할 안부 전화와 수빈이 내일 치러야 할 월세를 생각했다. 원장의 대답이 무엇이든 그들의 하루는 계속되어야 했다.
[심사 결과: 보류]
[열두 개 운영 원장 간 미확인 동의 복제: 일시 중단]
준성이 두 손을 들어 올렸다.
“됐다!”
서윤이 시계를 보았다. 밤 열한 시 오십구 분 십이 초.
“아직 사십팔 초 남았어요.”
민석도 알고 있었다. '일시 중단'이라는 말이 종결을 뜻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때 2036년에서 왔다는 자신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이번에는 제대로 했구나.”
민석은 서둘러 화면을 끄지 않았다.
“누가 보낸 건지 모릅니다.” 그가 말했다. “녹음이든 진짜든, 저는 당신 말에 동의한 적 없습니다.”
목소리가 몇 초 조용해졌다.
“맞아.”
그리고 낮게 덧붙였다.
“그러니까 이제 내가 저지른 일을 확인해 줘.”
화면에 파일 하나가 도착했다.
[2036년 최종 기록 보관 보고서 — 열람 가능]
민석은 파일을 열지 않았다. 적어도 자정이 오기 전까지는.
제29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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