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민석은 독립 대조인을 자신 마음대로 지정하지 않았다.
김예린의 이름을 넣는 일도 하지 않았다. 오세린은 자신의 역할이 법률 검토이고 원장의 독립 대조인과 같은 것인지 알 수 없다고 분명히 했다. 황기태 역시 관리인이라는 이유로 공정성을 보장받을 수는 없었다.
“그럼 누가 남죠?” 준성이 물었다.
“우리가 누굴 믿는지가 아니라, 당사자들이 어떤 방식으로 검증자를 인정할 수 있는지가 먼저죠.” 세린이 말했다.
열두 운영 원장의 규칙을 들여다보던 기태가 뜻밖의 항목을 발견했다.
[독립 대조: 복수 검증 자료 3종 이상 필요]
[자료 제공자와 검증자는 분리할 것]
[원본 대조인: 등록자 1인 + 당사자 대표 1인 + 외부 증거 보관자 1인]
“지난번 사백열세 명의 표결에서 만든 구조랑 비슷해요.” 기태가 말했다.
민석은 반가웠지만 곧 경계했다. ‘대표’라는 말은 쉽게 남의 의사를 통째로 넘겨받는 통로가 될 수 있었다. 원장은 그 단어를 수없이 악용했다.
원장 화면의 후보 명단에는 처음부터 강민석이 세 번 나열되어 있었다. 등록자, 당사자 대표, 외부 보관자. 세 역할 모두 그의 이름이었다.
“역시 이런 식으로 나오는군요.” 준성이 말했다.
민석은 그 세 줄을 천천히 읽고 ‘후보 변경 사유’를 열었다. 직접 입력창이 나타났다.
'동일 인물이 검증 대상 자료와 검증 결론을 동시에 통제할 수 없다.'
그 문장을 제출하자 첫 번째 칸만 남고 나머지 두 칸은 비워졌다. 시스템이 오류라고 표시하더니 다시 세 명을 요구했다.
“이런 건 누가 만들었을까요?” 서윤이 물었다.
“아마 일을 빠르게 처리하고 싶은 사람이겠죠.” 민석이 답했다.
오세린은 화면에 표시된 세 사람을 현실의 회의 참석자와 혼동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어떤 이름이 들어가도 해당 인물이 실제로 그런 업무를 맡았다고 인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윤미정은 참여 요청을 받고도 선뜻 수락하지 않았다. “저는 책을 보관한 것밖에 없는데, 원장에 대조인이라고 나오면 다른 사람들 돈까지 책임지게 되는 거 아니에요?”
세린은 역할 범위를 구체적으로 정리해 설명했고, 미정은 자신의 보관 사실에 한정해 진술하는 데만 동의했다. 민석은 그 범위를 별도의 메모로 남겼다.
“이번에는 손이 느려져서 다행이에요.” 미정이 말했다. “급하게 누르라고만 했으면 거절했을 거예요.”
그들은 그렇게 세 명의 역할을 나누었다. 윤미정은 책을 보관한 경위만, 문서 보관 업체 담당자는 접수 목록의 진위만, 세린은 법률상 의미와 원장 내부 처리의 차이만 설명하기로 했다.
“그걸로 충분할까요?” 민석이 물었다.
“확실하지 않습니다.” 기태가 말했다. “하지만 거짓으로 ‘413명의 동의를 받았다’고 적는 것보다 낫습니다.”
밤 열 시 삼십 분 무렵, 서문재가 직접 나타났다. 그는 세린의 사무실 앞 복도에 서 있었다. 낡은 은색 시계는 여전히 손목에 걸려 있었다.
“강민석 씨.”
민석은 잠시 그를 바라봤다.
“대화하려면 여기서, 그리고 기록을 남기고 하겠습니다.”
서문재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선택지가 없는 사람처럼 지쳐 보였다.
복도에 선 서문재를 바라보는 동안 민석은 자신도 놀랄 만큼 차분했다. 처음 백억 원을 보여 줬을 때만 해도 서문재는 반대편에서 세상을 통째로 통제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지금은 회색 코트 소매가 닳고, 밤새 잠들지 못한 듯 눈가가 부은 중년 남자였다.
준성은 문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십 년 전 연구실에서 서문재의 지시를 받아 서류를 옮겼던 자신이 떠올랐을 것이다.
“저 사람 혼자 있는 게 아니야.” 준성이 낮게 말했다. “운영 기록에는 항상 다른 승인자가 있었어. 대부분 이름 대신 번호였지만.”
민석은 그 말을 적었다. 서문재가 모든 것을 고백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의 선택까지 혼자 설명할 수는 없었다.
세린은 회의실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서문재에게 물었다. “지금 가져오신 문서는 본인이 제출하실 권한이 있는 겁니까? 타인의 개인정보가 포함되어 있다면 보관·이용 범위를 제한해야 합니다.”
서문재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비공개 계약이 있어서 전부 드릴 수는 없습니다.”
“그럼 제출할 수 있는 것만 보여 주세요.”
민석은 뜻밖의 답에 세린을 바라봤다. 이 자리를 도망칠 구실로 만들지 않으면서도, 그가 모든 규칙을 무시하고 문서를 퍼뜨릴 명분도 주지 않았다. 강요된 고백은 진실을 설명하기보다 새로운 분쟁을 만들 수 있었다.
“내가 한 일 중 잘못되지 않은 걸 찾는 편이 빠를 겁니다.”
“왜 오셨습니까?”
“조건부 시행 합의서를 찾았다면서요. 이제 왜 그걸 감춰야 했는지 알게 될 겁니다.”
세린은 서문재의 발언을 녹음해도 되는지 묻고 동의를 받았다. 서문재는 의자에 앉자마자 자신의 손목시계를 풀었다. 뒷면에 흠집이 있었다.
“십 년 전 우리는 위험을 예측하는 시스템을 만들었어요. 하지만 투자자들은 위험 예고보다 미래의 이익을 원했습니다. 연구비는 부족했고, 사람들은 결과를 빨리 요구했지요.”
“그래서 타인의 동의를 만들어 냈습니까?” 민석이 물었다.
“그건 내 책임입니다.”
뜻밖의 대답이었다. 민석은 서문재가 온갖 변명을 늘어놓을 줄 알았다.
“그러나 내가 처음부터 모든 걸 운영한 건 아닙니다. 연구실에서 만들어진 기록이 다른 곳으로 넘어갔어요. 나는 그 뒤에 붙은 운영자였죠.”
“다른 곳이 어딥니까?” 서윤이 물었다.
“열두 개의 원장을 만들어 낸 회사들입니다. 이름은 여러 번 바뀌었어요. 공통점은 하나였지요. 자기들이 갖지 않은 동의를 다른 원장에서 빌려 왔다는 것.”
“그럼 정산 금액은요?”
“실제 돈인 것도 있고, 예정된 위험인 것도 있고, 아무 거래도 없는 허위 수치도 있었습니다. 내가 그걸 섞었습니다.”
민석은 그가 설명하는 동안 눈을 떼지 않았다. 잘못을 인정하는 말과 실제 책임을 지는 일은 별개였다.
“그럼 정도현 씨 죽음은 어떻습니까?”
서문재의 손이 멈췄다.
“그날 만나기로 했던 건 맞아요. 그러나 그는 약속 장소에 오지 않았습니다. 내가 그를 죽였다는 증거는 없을 겁니다. 나도 왜 죽었는지 모릅니다.”
민석은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모르면 모른다고 기록하겠습니다. 그 대신 도현 씨가 왜 그곳에 가려 했는지, 알고 있는 자료를 내놓으세요.”
서문재는 주머니에서 접힌 종이를 꺼냈다. 도현이 남긴 약속 메모의 사본이었다. 원본 확인이 필요하다는 표시가 있었다.
'최종 기록 보관자와 직접 대조할 것.'
서윤이 읽었다.
“보관자가 누굽니까?”
서문재는 민석을 보았다.
“내가 당신에게 백억 원을 보여 줬을 때도 말했죠. 그 돈이 당신 것이 아니라고.”
“예.”
“그때 보관자가 누구인지 알아냈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겁니다.”
“대답을 피하지 마세요.”
서문재가 말했다.
“최종 보관자는 미래의 강민석입니다. 하지만 그 사람도 원장을 통제하지 못합니다. 2036년의 그는 자기 실수를 고치려다가, 고칠 수 없는 기록을 하나 더 만들었어요.”
민석은 서늘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2036년의 자신이 잘못했다는 소리는 녹음에서도 들었다. 그러나 지금 그의 눈앞에 있는 사람까지 같은 말을 했다.
“뭐가 잘못됐다는 겁니까?”
“당신이 보호하려 했던 사람이 위험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구하려고 십 년 전으로 돌아오는 기록을 보냈죠.”
서윤은 조용히 물었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있습니까?”
서문재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2016년 11월 1일 의결서 사본을 꺼냈다. 민석의 서명 옆에 빨간색 점이 있었다.
“당신의 서명이 위조됐다는 주장은 하지 않겠습니다. 그날 실제로 서명했으니까요. 하지만 조건을 떼어 낸 것은 나입니다. 그 선택의 대가를 마주할 때가 왔습니다.”
세린은 종이를 바로 받아 들지 않았다. 원본 보관처와 사본 작성 경위부터 확인했다. 서문재는 절차에 협조했다. 그가 진심인지 아닌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민석은 마지막으로 물었다.
“오늘 우리가 원장을 멈추면, 당신에게는 어떤 일이 생깁니까?”
“내 이름도 다른 사람들처럼 정산 대상으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막으러 온 겁니까?”
“아니요.”
서문재는 오랫동안 차고 있던 시계를 탁자에 올려놓았다.
“막아야 할 이유를 알리러 왔습니다. 누군가 제 이름을 413번에 올린 날, 저도 처음으로 타인의 동의가 얼마나 무서운지 알게 됐습니다.”
민석은 그 말에 아무 위로도 하지 않았다.
그때 원장이 조용히 표시를 바꿨다.
[서문재: 자료 제공 의사 확인]
[독립 대조 후보: 3명]
준성이 놀랐다.
“이제 끝나나요?”
민석은 화면을 닫았다.
“후보 세 명이 있다고 해서 끝나는 건 아니야. 각자 뭘 확인할 수 있는지부터 알아야 해.”
제28화 댓글 0
댓글·공감·신고는 로그인 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전 익명 댓글은 그대로 표시됩니다.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