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여섯 시 십 분.
원장은 김예린의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복원 요청권 만료까지: 05:49:32]
강민석은 화면을 닫았다. 시간이 흐른다고 그녀가 연락해 줄 의무는 없었다. 십 년 전 그녀는 원하지 않은 계약에 이름이 들어갔다. 십 년 뒤까지 그녀에게 또 어떤 일을 해 달라고 요구한다면, 그 또한 다른 종류의 강요일 수 있었다.
“연락은 한 번만 하겠습니다.” 민석이 말했다.
오세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는 공식 연락 경로로, 목적과 위험을 적어서요. 답을 하지 않아도 불이익을 주지 않는다는 내용도 포함하죠.”
그들은 문장을 함께 작성했다. 예린이 보낸 자료를 어떻게 사용했는지, 검증 규칙을 되살리면 무엇이 달라질지, 지금까지 확인되지 않은 부분은 무엇인지 적었다. 민석이 가장 마지막에 넣은 문장은 이것이었다.
'결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 경우에도 저희가 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찾겠습니다.'
준성은 문장을 읽더니 민석을 바라봤다.
“이런 말도 할 줄 알게 됐네.”
“네가 십 년 전에 해 줬어야 했던 말 아냐?”
준성은 쓴웃음을 지었다. “맞아.”
저녁 일곱 시, 예린에게서 답이 왔다.
'제 이름으로 된 복원 요청을 원장에 제출할 수는 없습니다. 제가 다시 참가자로 연결될 위험을 검토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제가 가진 원본을 변호사를 통해 열람하게 하는 데는 동의합니다.'
민석은 메시지를 다 읽고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은 분명했다. 거절이었다. 그리고 제한된 범위의 협조였다. 둘을 하나의 동의로 묶지 않는 것이 중요했다.
“이제 어쩌죠?” 준성이 물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쪽부터 하죠.”
세린은 예린이 허락한 범위에 따라 서류를 검증했다. 그 과정에서 폐기 의결서의 뒷면에 얇은 접힌 자국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2016년 서류를 접수할 때 원래 붙어 있었던 부속서가 떨어져 나간 흔적처럼 보였다.
“이거 종이 섬유가 다릅니다.” 세린이 말했다. “여기 인쇄된 문장만으로는 당시에 무엇이 의결됐는지 단정할 수 없어요.”
문서 보관 업체의 접수 목록을 다시 확인했다. 목록에는 의결서와 함께 '조건부 시행 합의서'가 적혀 있었다. 그런데 지금 상자에는 없었다.
민석은 손바닥을 폈다. 빠진 한 장 때문에 모든 결론이 달라질 수 있었다.
“조건부라는 말이 붙어 있네요.”
“그렇습니다.” 세린이 말했다. “폐기 의결의 효력이 어느 조건에서 발생하는지 명확히 한 문서일 수 있어요.”
준성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내가 그걸 본 적이 있어.”
모두 그를 바라봤다.
“서문재가 회의실에서 의결서를 가져갈 때, 접힌 종이를 따로 떼어 냈어. 그걸 보고도 묻지 않았어.”
“왜?” 민석이 물었다.
“겁났어. 연구실에 있던 사람들 이름이 다 나올까 봐.”
민석은 화가 났다. 숨겨진 사실이 나올 때마다 친구의 침묵이 따라붙었다. 하지만 이미 지난 선택의 이유를 듣는 일이 미래의 선택까지 대신해 주지는 않았다.
“그 종이가 어디 있는지는 알아?”
“모르겠어. 이번엔 정말이야.”
한편 서윤은 밤 뉴스에 후속 보도를 내보냈다. 피해를 제보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담았지만, 누가 얼마의 돈을 받을 거라고 원장이 예고했는지는 최소한만 공개했다. 화면의 문구는 검증되지 않은 주장으로 소개했다.
방송이 끝난 뒤 시청자 한 명이 뉴스룸에 전화를 걸었다. 그는 전직 문서 보관 직원이었다.
“조건부 시행 합의서요? 그거 한빛자산신탁 자료 아닙니까?”
서윤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확인된 자료명은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그 명칭을 아시죠?”
“제가 열 해 전에 접수 번호를 썼거든요. 원본이 없어졌다고 했지만, 두 번째 사본이 남았습니다.”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제가 갖고 있지는 않아요. 맡긴 곳을 압니다.”
남자는 장소를 말하기 전에 한 가지를 요청했다. 자신의 이름과 과거 근무처를 기사에서 빼 달라는 것이었다. 서윤은 신원 보호 범위와 법적 한계를 설명했다. 그가 허락한 내용만 취재 메모에 남겼다.
서윤은 문서 보관 직원과 통화를 끝낸 뒤 곧바로 사무실을 나서지 않았다. 제보자가 알려 준 장소가 실제 공공 열람 시설인지, 열람할 문서가 어떤 기관의 자료인지부터 확인했다. 그 과정에서 접수 대장에 한 번 더 이상한 흔적을 발견했다.
2016년 제출된 같은 제목의 서류가 두 개였던 것이다. 하나는 원본, 하나는 참조 사본. 원본의 보관자는 한빛자산신탁으로 적혀 있었고, 사본의 제출자는 '연구 참가자 대리인'으로 표시돼 있었다. 서윤이 접수 기록을 확대해 보자 대리인 서명은 강민석의 필체와 달랐다.
“또 누가 민석 씨 이름을 쓴 건가요?” 기태가 물었다.
“아직 몰라요. 대리인 이름이 비공개니까요.”
준성이 서류를 내려다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서문재가 꾸민 일 같아.”
민석은 고개를 저었다. “내가 싫어하는 사람의 이름을 아무 곳에나 쓰면, 원장이 하던 일하고 똑같아져.”
서윤은 그 말을 듣고 잠시 웃었다. “인정하긴 싫지만 좋은 기사 제목이네요.”
모두에게 웃을 여유는 없었다. 전직 직원이 알려 준 접수 번호를 믿고 움직이려면 공식 기록에서 일치 여부를 확인해야 했다. 세린은 열람 목적을 명확히 하고 범위를 확인해 달라고 했다. 문서 자체가 의심스럽더라도 서류를 다루는 과정만은 뒤에 검토할 수 있도록 만들자는 것이었다.
열람실로 가는 차 안에서 민석은 과거 자신이 해 왔던 일을 생각했다. 숫자만 보고 서둘러 결론 내리던 버릇. 준성의 말을 믿었다가 화를 냈다가 다시 믿는 일. 사람들의 내일을 빨리 알아내려던 마음. 지금은 몇 분이라도 더 늦게 결론 내리는 편이 낫다는 걸 알고 있었다.
밤 아홉 시, 다섯 사람이 작은 공공 기록 열람실에서 만났다. 보관 담당자는 문서번호를 확인한 뒤 정식 절차를 통해 사본을 열람시켰다. 종이 가운데에는 검은 테이프로 가려진 부분이 있었지만, 조건 자체는 읽을 수 있었다.
'폐기 의결의 효력은 외부 대조인이 모든 당사자의 개별적 동의를 확인한 경우에만 발생한다.'
민석은 숨을 삼켰다.
“개별 동의가 없었다면 폐기도 성립하지 않았다는 거군요.”
“그럴 가능성이 있습니다.” 세린이 답했다. “원장 내부의 기준과 현실에서 법적 효력이 인정되는 문제는 따로 검토해야 합니다. 하지만 원장이 자기 규칙조차 잘못 적용했다는 단서는 됩니다.”
기태가 중얼거렸다.
“열두 개 운영 원장에 그 부속서를 보여 줄 수 있다면…”
민석은 고개를 저었다.
“보여 주는 것만으로 진짜라고 인정하게 해선 안 돼요. 사본의 출처와 대조 방법도 함께 전달해야죠.”
그들은 보관 기록, 접수 시각, 사본 대조 절차를 정리했다. 과정을 기록하다 보니 밤 열 시가 넘었다. 원장은 끊임없이 재촉했다.
[복원 요청권 만료까지: 01:41:08]
서윤이 물었다.
“마지막으로 예린 씨에게 자료를 보낼까요?”
“네. 그리고 답은 기다리되, 답이 없으면 없다고 기록합시다.”
그때 예린에게서 새로운 메시지가 왔다.
'저는 복원 요청을 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제 서명이 필요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셨다면, 당신이 해야 할 일을 하세요. 다만 단 한 사람의 권한이라도 대신 행사하지 마세요.'
민석은 자신의 화면에 생긴 새 입력창을 보았다.
[조건부 의결 검증: 제3자 자료 제출]
[검증 책임자의 단독 승인 불가]
화면 아래에는 생전 처음 보는 버튼이 하나 더 있었다.
[독립 대조인 초대]
그는 처음으로 생각했다. 모든 선택지가 함정은 아닐지 모른다. 다만 그 선택을 누가 할 수 있는지부터 따져야 한다.
제27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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