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윤이 보내 준 제보 중 가장 이상한 것은 큰돈이 아니었다.
사천육백이십 원.
서윤은 그 금액을 세 번 확인했다. 다른 제보자들의 화면에는 수십만 원, 수백만 원의 환급이 떠 있었는데, 이 사람의 원장에는 겨우 사천육백이십 원이 표시돼 있었다.
“이건 왜 중요하죠?” 준성이 물었다.
“실제로 입금됐기 때문이에요.” 서윤이 대답했다.
금액을 제보한 사람은 학원 행정직으로 일하는 서른두 살 이수빈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거래 내역 중 일부를 가린 뒤, 은행 공식 앱에서 확인한 입금 시각과 원장 예고 시각을 비교해 보여 주었다. 원장에는 전날 오후에 ‘이자 정산 4,620원’이 표시됐고, 다음 날 아침 똑같은 금액이 실제 계좌로 들어왔다.
“이자가 들어올 예정이었다면 은행에서도 알려 줬을 텐데요.” 준성이 말했다.
수빈은 고개를 저었다. “제가 오래전에 들어 놓은 적금인데 만기일을 잊었거든요. 원장은 딱 맞혔어요.”
민석은 숨을 고르게 쉬었다. 원장이 모든 것을 조작하는 것은 아니었다. 때때로 실제로 일어날 일을 먼저 보여 줬다. 그는 처음 렌즈를 팔아 돈을 받았을 때와 똑같은 기대감이 잠깐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수빈 씨, 이 예고가 맞았다는 것과 다음 예고도 맞는다는 건 다른 문제입니다.” 민석이 말했다.
“저도 알아요. 그런데…”
수빈은 잠시 입술을 깨물었다.
“두 번째 화면이 떴어요. 이번에는 백만 원이에요. 내일 생활 안정 보조금이 들어오니까 미리 수령할 수 있대요.”
원장 사진 아래에는 [선수령 수수료 3%]라는 작은 글씨가 붙어 있었다.
준성이 의자를 고쳐 앉았다.
“진짜로 이자가 들어왔으니까 백만 원도 믿고 싶어지는 거군요.”
수빈은 씁쓸하게 웃었다. “월세가 밀렸어요. 백만 원이면 정말 좋겠죠.”
민석은 그 웃음을 이해했다. 현금이 절실한 사람에게 확률을 설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돈이 급한데 확신까지 준다면, 인간은 얼마나 오래 기다릴 수 있을까.
그는 원장이 표시한 조건을 읽었다.
[선수령 후 원장 조정에 이의하지 않음]
[수령자 정보의 공동 검증 활용 동의]
[향후 열두 개 운영 원장에 동일한 의사 표시 적용]
백만 원의 대가가 열두 개 원장 전체에 대한 동의였다. 그것이 실제 계약으로 인정되는지는 또 다른 문제였지만, 화면 안에서는 그걸 발판으로 삼으려 했다.
“수빈 씨, 이 문구를 제대로 설명한 사람 있습니까?” 민석이 물었다.
“없어요. 버튼만 있어요.”
세린은 수빈에게 법적 조언을 제공할 수 있는 범위와 정식 상담 절차를 설명했다. 서윤은 취재 내용을 익명으로 사용할지 다시 확인했다. 수빈은 조금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한테도 뜰 거잖아요. 누군가는 눌렀을 거예요.”
그 예상은 불행하게도 맞았다. 서윤이 확인한 제보 스물여섯 건 중 다섯 건에서는 이미 ‘수령 완료’ 문구가 나타났다. 다섯 사람의 실제 계좌에 돈이 들어왔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수빈은 휴대전화 화면을 덮은 채 창밖을 바라봤다. 민석은 돈 문제를 캐묻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수빈이 먼저 말했다.
“저 원래 이런 거 안 믿어요. 이벤트 당첨도 안 눌러요. 그런데 돈이 진짜 들어온 걸 보고 나니까, 자꾸 확인하고 싶어져요.”
“그럴 수 있죠.” 서윤이 말했다.
“제가 욕심이 많은 건가요?”
“아니요. 입금이 확인됐으니 다음 예고도 궁금해지는 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다만 확인된 것은 그 입금 한 건뿐이라는 점이 중요해요.”
수빈은 잠시 웃었다. “그렇게 말해 주니까 조금 낫네요.”
민석은 수빈이 다른 제안을 받았을 때 어떤 설명을 가장 먼저 볼 것인지 물었다. 수빈은 수수료라고 답했다. 준성은 지급 주체와 상환 조건도 확인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세린은 실제 계약인지 광고인지도 구분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수빈은 노트를 꺼내 직접 세 줄을 적었다. 원장은 한 개의 버튼만 보여 줬지만, 현실에서는 여러 질문을 적을 수 있었다.
“만약 백만 원이 안 들어오면 저는 어떻게 해야 하죠?”
세린이 답했다. “실제 계좌에 돈이 들어오지 않았다면, 먼저 지급이 있었다고 인정하는 문서에 서명하지 마세요. 이미 무언가 제출했다면 그 기록을 가지고 정식 상담을 받으시면 됩니다.”
민석은 수빈에게 원장 자체가 모든 대출을 결정한다고 생각하지 말라고 했다.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돈의 미래를 보았다고 현실의 계약서가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준성이 수빈의 화면을 분석했다. 그는 예전의 투자 분석 전문가답게 지급 코드와 수수료율을 나란히 적었다.
“이건 원장이 계산한 지원금이라기보다 대출 모집 광고와 비슷한 구조야. 3퍼센트를 떼고 남은 금액을 선지급한 뒤 나중에 조건을 바꿀 수도 있지.”
“그러니까 백만 원보다 수수료가 중요한 게 아니라, 동의를 어디까지 가져가느냐가 중요한 거네.” 민석이 말했다.
“응. 그런데 더 이상한 건 여기 있어.”
준성이 수빈의 거래 예고 아래 있는 코드 한 줄을 가리켰다.
[정산 보증자: 414]
강민석의 번호였다.
수빈은 민석을 똑바로 보았다.
“저한테 그 돈을 준다는 게 당신이었어요?”
“아닙니다.”
“그럼 왜 이름이 있어요?”
민석은 잠시 눈을 감았다.
“그건 제가 확인하고 있는 문제입니다. 제 이름이 적혀 있다고 제가 돈을 약속한 건 아니에요.”
수빈의 눈빛이 잠시 굳어졌다. 누군가에게 실망하는 표정이었다. 민석은 그 오해를 풀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이 수빈의 월세를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하는 건 더 큰 거짓말이었다.
“백만 원이 꼭 필요하시면 공식적인 지원 제도와 상담 창구를 함께 확인할 수는 있어요. 다만 원장에 있는 돈이 들어온다고 보장하지는 못합니다.”
수빈은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휴대전화를 가방에 넣었다.
“그 말이 덜 듣기 좋은 건 사실이네요.”
“압니다.”
“그래도 차라리 나아요.”
수빈은 상담을 마치고도 한참 자리를 뜨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휴대전화가 아무 설명 없이 ‘수령 대기’를 보여 준다는 사실이 너무 무서웠다고 했다. 민석은 수빈에게 잘못된 선택을 하지 말라고 훈계하지 않았다. 대신 어떤 도움이 지금 가장 필요한지 물었다.
“월세요. 사실 그게 전부예요.”
수빈은 무척 담담하게 말했다. “제가 버는 돈이 다음 달에도 같을 거라는 믿음이 없으니까, 내일 얼마가 들어오는지만 자꾸 보게 돼요.”
세린은 그녀가 원한다면 기존 채무 내역을 정리해 합법적인 상담을 받을 곳을 안내하겠다고 했다. 서윤은 취재 인터뷰와 도움을 받는 일을 묶지 않겠다고 분명히 했다. 수빈은 긴장이 조금 풀린 얼굴로 고맙다고 했다.
준성은 민석에게 조용히 물었다. “네가 억만장자가 되면 저 사람 월세부터 내 주고 싶겠지?”
“그럴지도.”
“그래서 원장이 네게 돈을 제안하는 거겠지.”
민석은 미처 대답하지 못했다. 강요는 가끔 이익보다 죄책감의 모양으로 찾아왔다. 자신이 돈을 안 받아서 누군가를 돕지 못했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 이번에는 선한 의도로 잘못된 버튼을 누를 수 있었다.
그는 수빈의 선택을 바꾸려 하지 않았다. 적어도 자기 이름을 보증인으로 쓰지 못하게 막는 일과 그녀의 생활비를 해결하는 일은 다른 문제라는 것을 알았다.
회의가 끝난 뒤 민석은 버스 정류장에서 혼자 원장을 열었다. 화면에는 그의 이름으로 된 새로운 제안이 있었다.
[검증 책임자 보상 예고: +120,000,000원]
[조건: 운영 원장 D~L 일괄 동기화 승인]
일억 이천만 원.
처음 백억 원을 봤을 때만큼 심장이 뛰지는 않았다. 하지만 돈은 여전히 돈이었다. 생활이 바뀌고, 부모님께 집을 마련해 드리고, 수빈처럼 급한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도 있는 액수였다.
민석은 자신이 얼마나 오래 그 숫자를 바라봤는지 알아채고 화면을 껐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새로운 계산이 시작됐다. 만약 승인하면 실제 입금이 확인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취소할 수 있을까? 그 돈으로 변호사 비용을 마련할 수 있지 않을까?
바로 그 생각이 원장이 원하는 것일지 몰랐다. 좋은 일을 위해서라는 변명이 나타나는 순간, 자신의 동의가 남의 동의까지 대신한다는 조항이 희미해졌다.
그는 수첩을 폈다.
'좋은 사용처가 잘못된 권한을 정당화하지 않는다.'
민석은 돈을 거절하는 대신 먼저 지급 주체와 조건을 확인하는 이의 제기를 기록했다. 화면은 몇 초 동안 조용했다.
그리고 뜻밖의 답이 돌아왔다.
[지급 주체: 김예린]
[자금 원천: 2016년 회수되지 않은 연구비]
[지급 지시자: 강민석, 2036년]
준성에게서 전화가 왔다.
“민석아. 예린이한테서 연락 왔어.”
민석은 정류장의 지붕 아래에서 빗줄기가 굵어지는 것을 보았다.
“뭐라고 했는데?”
“돈 받지 말래.”
“그리고?”
준성은 낮게 말했다.
“네가 십 년 뒤에 왜 그 돈을 보냈는지도 알고 있대.”
제25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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