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희는 새벽 한 시가 넘어서도 깨어 있었다.
민석이 전화를 걸자 어머니는 두 번째 신호음에 받았다.
“왜? 무슨 일 났어?”
“아니요. 엄마, 휴대전화에 이상한 알림 안 왔어요?”
“왔지. 병원비 돌려준다고.”
민석은 말을 잃었다. 어머니는 지난달 건강검진 때문에 결제한 돈이 있었다. 크지 않은 금액이지만 원장은 그런 생활의 틈새를 놓치지 않았다.
“누르셨어요?”
“아니. 네가 전에 모르는 문자 링크 누르지 말라고 했잖아.”
“그랬죠.”
“그런데 네 이름이 나오더라. 네가 대신 확인해 줬다고.”
민석은 침대 가장자리에 주저앉았다. 자신이 보호하고 싶었던 사람에게 원장은 가장 그럴듯한 보증인을 붙였다. 강민석이라는 이름이었다.
“저 그런 거 승인한 적 없어요. 문자도 원장도 믿지 마세요.”
“그래. 그런데 너 목소리가 왜 그러니?”
민석은 한참 대답하지 못했다. 어머니에게 전부 설명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설명하려는 사실 중 자신조차 확인하지 못한 것이 너무 많았다. 거짓으로 안심시키는 것도, 확인되지 않은 공포를 전하는 것도 싫었다.
“제가 아는 사람들하고 조사하고 있어요. 엄마 통장이나 비밀번호를 물어보는 사람이 있으면 절대 알려주지 마세요. 이상한 화면은 그대로 놔두시고요.”
“계좌번호는 알려 주면 안 되는 거지?”
“네. 제가 먼저 연락드릴게요.”
어머니는 한숨을 쉬더니 뜻밖의 말을 했다.
“민석아, 남의 일 해결하러 다니는 것도 좋지만 네 몸부터 챙겨. 너 또 밥 안 먹었지?”
민석은 웃음이 나올 뻔했다. 상위 원장 열두 개가 도시를 뒤덮을 위기에도 어머니는 저녁 밥부터 물었다.
“먹었어요.”
“편의점에서 먹은 건 밥 먹었다고 하지 마.”
민석은 자신이 조금 전 편의점에 들렀다는 사실을 말한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나 곧 생각을 멈췄다. 어머니의 말투는 늘 그랬다. 예상 가능한 잔소리를 초능력이라고 부를 수는 없었다.
전화를 끊자 어머니의 항목에 새로운 상태가 나타났다.
[417번 정산 승인 방식: 가족 대리]
[대리인 자격: 장남]
[위임 증빙: 미제출]
민석은 그 마지막 줄을 다시 읽었다. 위임 증빙이 없다는 것을 원장 스스로 인정하고 있었다.
그는 곧바로 서윤과 세린에게 연락했다. 서윤은 어머니를 취재 대상으로 삼아도 되는지 먼저 물었다. 민석은 그 결정을 자신이 대신 할 수 없다고 대답했다. 당사자가 원할 때까지 이름과 내용을 공개하지 말자고 했다.
“그럼 증거를 못 쓰겠네요.” 서윤이 말했다.
“지금은 그래야겠죠.”
“민석 씨, 괜찮아요?”
“잘 모르겠습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서윤은 질문을 더 하지 않았다. 민석이 말할 시간을 기다려 주는 침묵이었다.
민석은 잠을 포기하고 식탁에 물 한 컵을 올렸다. 어머니의 항목에서 ‘가족 대리’라는 단어가 지워지지 않았다. 원장의 버튼을 누르면 그 한 줄을 없앨 수 있을지도 몰랐다. 과거에 그는 그렇게 수많은 화면을 움직였고, 그때마다 더 깊은 곳에서 새로운 명세가 나타났다.
그는 어린 시절의 일을 떠올렸다. 학교에서 적금 통장을 만들던 날, 어머니는 신청서의 보호자 서명란에 이름을 적었다. 민석은 아무 생각 없이 돈이 생겼다며 좋아했다. 다음 해 어머니가 해지 신청을 할 때에는 자기가 왜 동의해야 하느냐며 투정을 부렸다. 어머니는 차분히 설명했다. ‘네 돈이니까 네가 알았으면 좋겠어.’
그 기억이 떠오른 까닭을 민석은 알고 있었다. 어머니가 보호자로 사인했던 일과 지금 원장이 대리인으로 자신을 올린 일은 정반대였다. 그때 어머니는 아들에게 물었고, 이번에는 아무도 어머니에게 묻지 않았다.
민석은 은행 공식 거래 내역을 대신 확인하겠다고 제안할 생각도 버렸다. 어머니에게 계좌를 보여 달라고 강요할 이유가 없었다. 아침에 어머니가 스스로 확인하겠다고 한다면 방법을 안내하면 됐다.
창밖 도로에서는 청소차가 천천히 지나갔다. 사람들의 어제 쓰레기를 치우는 시간이었지만, 민석의 휴대전화에는 아직 살지도 않은 내일의 기록이 쌓이고 있었다.
새벽 두 시, 박준성이 낡은 일기장 사진을 보내 왔다. 2016년 10월 26일. 젊은 준성이 쓴 글이 선명했다.
'민석은 일곱 번째 테스트에서 원본을 없애겠다고 했다. 윤 교수님은 한 번만 지울 수 있다고 경고했다. 지운 사람이 대가를 치른다고 했다.'
사진 아래 준성의 메시지가 이어졌다.
'나머지는 만나서 말할게. 이번엔 거짓말 안 해.'
민석은 시간 약속을 잡았다. 준성에게 지금 당장 털어놓으라고 재촉하고 싶었지만, 서둘러 얻은 말은 다시 확인하기 어려워질 수 있었다.
그 대신 그는 아직 잠들지 않은 황기태에게 전화를 걸었다.
“규칙을 없애는 권한을 한 번 썼다던데요. 무슨 뜻입니까?”
기태는 숨소리만 들릴 정도로 오래 망설였다.
“제게 남은 설명서는 일부예요. 초기 검증 프로그램에는 ‘역기록 삭제’가 있었어요. 미래의 예상 거래가 오늘의 계약으로 기록됐을 때, 그 연결을 되돌리는 장치죠.”
“그걸 사용하면요?”
“원본 장부에서는 거래가 없어진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 거래를 참조하고 있던 다른 기록은 남습니다. 그래서 상위 원장이라는 게 생긴 겁니다. 취소한 것을 누가 취소했는지 영원히 보관하려고요.”
“그럼 삭제가 아니라 복사였네요.”
“그렇게 이해하셔도 됩니다. 문제는 그때의 민석 씨가 왜 그걸 사용했는지예요.”
민석은 창문 밖을 보았다. 골목의 가로등 아래 고양이 한 마리가 쓰레기봉투 사이를 지나갔다. 십 년 전 자신은 무엇을 지키려다 어떤 기록을 지웠을까.
“기태 씨. 미래의 제가 보낸 녹음은 진짜입니까?”
“2036년이라는 날짜는 보았습니다. 누가 녹음했는지는 모릅니다.”
“제 목소리잖아요.”
“목소리라는 것도 조작될 수 있어요. 무엇보다 미래의 사람이 말한다고 해서 지금보다 진실을 더 잘 아는 건 아닙니다.”
기태가 덧붙였다.
“제가 그때 연구실에 있었거든요. 사람들은 원장이 맞춘 숫자를 기억하고 틀린 숫자는 잊었습니다. 원장도 그걸 이용했죠.”
민석은 통화를 마치고 수첩을 폈다. 첫 장의 두 문장 아래에 세 번째를 적었다.
'미래에서 왔다는 말도 오늘의 증거는 아니다.'
통화를 끝낸 뒤 민석은 새벽 네 시의 고요한 식탁에 홀로 남았다. 2036년 목소리는 여전히 저장돼 있었다. 삭제 버튼을 누르고 싶었지만, 그는 파일의 최초 수신 상태를 기록해 뒀다. 진짜인지 가짜인지 아직 몰라도, 그를 압박하기 위해 쓰였다는 사실은 잃어버리고 싶지 않았다.
민석은 친구에게 짧은 메시지를 보냈다. ‘과거 기록이 언제부터 내 기억에서 빠졌는지 함께 정리해 보자.’
준성의 답은 십 분 뒤에 왔다. ‘예린이가 연구실을 떠난 일주일 뒤부터 네가 같은 질문을 반복했어. 네가 걱정돼서 의사도 찾아봤었어. 그런데 진료기록은 내가 대신 볼 수 있는 게 아니니, 기억나는 사실만 적어 둘게.’
민석은 그 답에 잠시 안도했다. 준성이 모든 일을 알고 있었다면 배신감만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보다 불완전한 친구의 기억이 조금씩 맞춰지는 것이라면, 아직 어떤 사실도 단정할 수 없었다.
그는 어머니에게 물을 말도 생각했다. 십 년 전 젖은 우산을 들고 왔다는 친구의 표정과 말투. 그녀가 정말 김예린이었다면 무엇을 원했는지. 그러나 아침이 오면 먼저 물어볼 것은 하나뿐이었다. ‘어제 그 이상한 알림 때문에 돈이 나가거나, 뭔가 서명한 것은 없으세요?’
아침 일곱 시, 어머니에게서 다시 연락이 왔다.
“민석아. 이상해서 네가 말한 대로 은행에 물어봤어. 그런 병원비 환급은 없대.”
“잘하셨어요.”
“그리고 내가 너한테 할 말이 있는데.”
“무슨 말인데요?”
“어제 네가 오기 전에 낯선 남자가 찾아왔어. 십 년 전 네 학교 사람이라고 하더라.”
민석은 몸을 일으켰다.
“이름은요?”
“서문재라고 했어. 아주 예의 바르게 말하더라. 네가 잊어버린 걸 전해 주러 왔다고.”
어머니는 잠시 망설였다.
“그런데 네가 받으면 안 되는 편지라면서 나한테만 봉투를 줬어.”
“봉투는 어디 있어요?”
“서랍에. 그리고 그 봉투 겉에 이런 글이 적혀 있어.”
어머니가 천천히 읽었다.
“‘강민석이 처음 지운 사람의 이름.’”
제23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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