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정이 지났다.
민석의 휴대전화에 축하 애니메이션이 나타나지는 않았다. 금고 문이 열리는 소리도 없었다. 대신 검은 화면 한가운데 숫자 하나가 떠올랐다.
[동기화 대기 중: 00:02:57]
세 분의 유예는 현실에서도 세 분이었다. 차가운 밤공기가 베란다 문 틈으로 들어왔다. 민석은 새벽에 빛을 내는 아파트들을 내려다봤다. 누군가는 아이를 재우고, 누군가는 퇴근하고, 누군가는 내일 면접 준비를 하고 있을 시간이었다.
“서윤 씨, 편의점 직원에게서 사진을 받았습니다.”
화상 회의 화면에 사진을 띄우자 세린이 말했다.
“저 문구가 실제 동의를 의미한다는 근거는 없습니다. 화면에 적혀 있다는 사실만 확인됩니다.”
“알아요. 하지만 그 남자에게는 겁나는 일이죠.”
“본인에게 연락해서 수상한 링크를 누르지 말라고 하고, 추가적인 계좌 변동이 있는지 확인하게 해 주세요.”
민석은 남자에게 간단한 설명을 보냈다. 불필요한 개인정보는 묻지 않았다. 얼마 뒤 답장이 왔다. 취업 준비 지원금은 실제 은행 앱에 입금되지 않았다. 그러나 원장 화면에서는 이미 수령자로 분류되어 있었다.
황기태가 화면을 한참 들여다봤다.
“승인 근거가 2036년이라고요?”
“예.”
“그럼 이전 원장에는 없던 기능입니다. 십 년 뒤의 허락을 현재로 가져올 수 있다면, 누구에게든 ‘언젠가 찬성하게 될 사람’이라는 딱지를 붙일 수 있어요.”
준성이 반박했다.
“십 년 뒤 우리가 정말 동의했을 수도 있잖아요.”
“그럴 수 있지.” 민석이 말했다. “하지만 미래에 할지도 모르는 동의로 오늘의 선택을 없앨 수는 없어.”
준성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십 년 전 원장을 연구하던 자신이 똑같은 질문을 들었더라면 무엇이라고 했을까. 그는 그 답을 아는 듯 입을 다물었다.
서윤은 제보 화면들을 비교했다. 취업지원금, 병원비 환급, 장기근속 보너스, 연체이자 감면. 모두 표현은 달랐지만 공통된 작은 글자가 있었다.
'예정 금액은 참고용이며, 확정 후 조정될 수 있습니다.'
“돈은 확정되지 않았는데 의사는 확정됐다는 거군요.” 서윤이 말했다.
“맞아요.” 기태가 말했다. “원장은 금액의 미래보다 동의의 미래를 먼저 당겨 오는 구조로 바뀌었습니다.”
시계는 00:01:34.
민석은 자신의 원장 메뉴에 들어갔다. 사람들의 이름을 조회할 수 있는 탭은 닫혀 있었다. 대신 이상한 분류가 생겼다.
[운영 원장 A: 생활 보상]
[운영 원장 B: 의료 정산]
[운영 원장 C: 급여 조정]
[운영 원장 D~L: 접근 제한]
“열두 개가 각각 다른 사람을 맡는 겁니까?”
“그렇게 보이지만 단정은 어렵습니다.” 기태가 말했다. “한 사람은 여러 원장에 중복 등록될 수 있어요.”
민석은 비로소 일조 원이 어떻게 커졌는지 짐작했다. 사람의 인생은 한 장부에 딱 한 번 적히지 않았다. 같은 사람이 보험에도 있고, 대출에도 있고, 월급에도 있다. 예고만 모으면 한 사람이 열두 번 빚진 것처럼 보일 수도 있었다.
새벽의 회의는 잠시 소란스러워졌다. 제보 한 명이 다른 제보자의 스크린샷을 온라인에 올렸기 때문이다. 익명 처리됐다고 생각했지만, 문구 사이의 작은 주문번호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저걸 계속 놔두면 안 됩니다.” 서윤이 말했다. “그분이 누구인지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몰라요.”
민석은 처음 사진을 보낸 당사자에게 연락했고, 서윤은 취재 목적으로 공유받은 자료가 공개된 경위를 확인했다. 원장에 대한 불안이 커질수록 사람들은 더 많은 화면을 올렸다. 이상한 화면을 폭로하려다 자신의 실생활을 공개하는 일이 생길 수 있었다.
준성이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도움이 되는 자료는 모아야 하잖아.”
“그것도 동의받은 범위 안에서.” 서윤이 대답했다. “당사자가 위험을 감수하고 준 화면을 우리가 마음대로 공개할 수는 없어.”
공개했던 사람은 사과하고 글을 내렸다. 이미 복제된 이미지를 모두 회수할 수는 없었다. 민석은 그 불완전한 결말이 원장 사건과 닮았다고 느꼈다. 한번 퍼진 기록을 완전히 지운다고 쉽게 말할 수 없었다.
이후 서윤은 대조 자료를 정리할 때 이름뿐 아니라 거래 번호가 연결될 수 있는 부분도 분리했다. 서로 같은 코드를 지닌 항목을 비교할 때에는 당사자의 직접 승인 없이는 원본 전체를 돌리지 않았다.
“우리는 원장의 방식으로 원장을 막을 수 없어요.” 그녀가 말했다.
민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에 동의하는 동안에도 동기화 시계는 멈추지 않았다.
세린이 물었다.
“검증되지 않은 중복을 동기화 조건에서 제외하라고 요구할 수 있습니까?”
“하위 원장에서는 했어요. 여기서는 모르겠습니다.” 기태가 말했다.
“그러면 그걸 해 봐야죠.”
민석은 항목을 길게 눌렀다. 회색 메뉴가 펼쳐졌다. [중복성 검증 요청]. 바로 아래에는 비용이 쓰여 있었다.
[요청 대가: 신청자 미래 정산 기록 1건 공개]
순간 민석의 손가락이 멈췄다. 자신이 잃을 돈이 얼마인지 물었다면 차라리 쉬웠을 것이다. 하지만 미래 기록 한 건을 공개한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자신이 아직 하지 않은 선택을 보여 준다는 뜻이었다.
“기태 씨. 그 공개 범위가 어디까지입니까?”
“모릅니다. 그래서 누르시면 안 됩니다.”
민석은 메뉴를 닫았다. 급할수록 더 비싼 대가를 요구한다. 원장은 사람의 시간 부족을 비용으로 삼는 장사꾼 같았다.
“대신 지금 확보한 제보에서 중복을 찾아보죠.” 서윤이 말했다. “당사자들이 정보 대조에 동의한 사례만요.”
그들은 실명이 가려진 세 장의 사진에서 동일한 지급 코드가 반복되는 것을 발견했다. 금액은 각각 팔십칠만 원, 이백삼십만 원, 사십일만 원. 지급 코드 뒤 여섯 자리는 같았다. 직종도, 사용 은행도 달랐다.
“이게 같은 거래라는 뜻일까요?” 준성이 물었다.
“아직은 몰라요. 하지만 독립된 지급이라는 설명과 충돌한다는 사실은 제시할 수 있죠.” 서윤이 말했다.
00:02:41.
남은 시간 십육 초.
민석은 새로 열린 검증창에 입력했다.
'상호 독립적인 세 지급 예고에 동일한 지급 코드가 존재한다. 거래 원본 확인 전 대체 동의를 확정할 수 없다.'
전송.
전송 버튼을 누른 뒤 민석은 화면을 내려놓고 손끝을 바라봤다. 정보 한 줄을 적었을 뿐인데 심장이 너무 빨리 뛰었다. 누군가 영업점 창구에 서명하라고 내민 종이를 돌려놓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화면에는 실제로 연결된 사람이 많았다.
잠시 뒤 서윤이 한 제보자와 통화했다. 상대는 결제 취소 예고를 받고 밤새 카드를 정지하려 했던 사람이다. 금융기관에 문의했더니 카드 자체는 정상이라는 답을 받았다고 했다. 하지만 원장의 예고가 사라지지 않아 불안해했다.
“저희가 오늘 새벽에 할 수 있는 조치는 화면 속 대체 승인을 검증하는 일입니다.” 서윤이 설명했다. “실제 카드 거래는 카드사에서 확인해 주는 내용이 우선이에요.”
“그러면 제가 무엇을 하면 됩니까?”
“지금 당장 필요하지 않은 결제라면 서두르지 마시고, 거래 내역과 발신처부터 확인하세요. 걱정이 계속되면 공식 고객센터에 문의하셔도 됩니다.”
통화가 끝난 뒤 준성이 말했다. “우리가 세상을 너무 어렵게 만드는 것 같기도 해.”
민석은 고개를 저었다. “원래 남의 돈을 움직이는 건 어려워야 하는 거야.”
[상위 원장 동기화: 부분 보류]
[보류 원장: A, B, C]
[나머지 9개 원장: 재검증 대기]
세 사람 모두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다 막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어떤 버튼도 누르지 않고 세 개를 묶었다.
기태가 처음으로 웃었다.
“생각보다 잘하시네요.”
“제가 한 게 아닙니다.” 민석이 말했다. “제보자가 자기 화면을 보여 주기로 선택했으니까 가능했어요.”
바로 그때 회의 창의 다섯 사람 모두에게 같은 음성이 재생됐다.
“좋은 방법이야. 하지만 다음에는 그 증거가 없어.”
노이즈 섞인 낮은 목소리. 민석 자신의 목소리였다. 열 해 뒤에서 보냈다는 녹음과 똑같았다.
“아홉 개를 막으려면 네가 한 사람을 지워야 해.”
서윤이 눈을 가늘게 떴다.
“어떤 사람을요?”
목소리가 답했다.
“제일 가까운 사람.”
민석은 차갑게 식은 손으로 휴대전화를 붙잡았다. 그 순간 화면 아래 새로운 참가자가 떠올랐다.
[417번: 강정희]
[관계: 414번 참가자의 모친]
어머니의 이름이었다.
제22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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