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장의 강제 정산이 멈춘 다음 날, 민석은 처음으로 평소 출근 시간에 집을 나섰다. 차가운 공기가 뺨에 닿았다. 어제와 같은 지하철, 같은 환승 통로, 같은 커피 냄새였다.
한때 그는 미래를 아는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부유할 거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내일이 정해져 있지 않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재산인지 알 것 같았다.
회사 회의실에서 보고서 합계를 확인하는 동안 휴대전화는 조용했다. 예고는 뜨지 않았다. 오랜만에 숫자 하나를 직접 계산해 틀린 항목을 찾았다. 같은 팀 직원이 수고했다며 캔커피를 건넸다. 민석은 그것이 얼마짜리인지 생각하지 않았다.
점심 무렵 서윤에게 연락이 왔다. ‘수정된 원장 사건 보고서’ 초안이었다. 그녀는 민석에게 사실관계만 확인해 달라고 했다. 그가 한 발언과 직접 목격한 사건, 다른 사람의 증언이 구분되어 있었다. '일조 원의 실제 피해 발생'이라는 문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대신 '일조 원 규모로 표시된 미확정 위험 노출'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렇게 쓰는 게 맞아요.” 민석이 말했다.
“기사에 이름을 내도 될지 다시 물어볼게요.”
“제 이름은 괜찮아요. 하지만 참가자 명단은 공개하지 말아요.”
“당사자 동의 없는 이름은 실을 생각 없어요.”
민석은 기사를 끝까지 읽었다. 글에는 서문재의 주장과 이에 대한 반론도 포함되어 있었다. 도현의 사망과 원장 사이에 직접적인 인과관계가 밝혀지지 않았다는 점도 명확했다. 누군가를 악당으로 만드는 일보다 피해자를 보호하는 데 필요한 정보가 우선이었다.
“서윤 씨.”
“네?”
“도현 씨가 남긴 메일 원본은 어떻게 됐어요?”
“보존 신청을 했어요. 날짜가 내일인 메일이라는 걸 기사에 그대로 쓰진 않을 겁니다. 확인이 안 되니까요.”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자 준성의 메시지가 왔다.
'서문재가 어제 이후 연락을 끊었어. 하지만 퇴직자 명단에선 아직 이름이 살아 있어. 도망이라고 단정하진 말자.'
민석은 ‘확인할 것’ 목록에 한 줄을 추가했다. 서문재가 왜 413번 참가자로 올라갔는지. 그리고 윤 교수의 말대로 그가 작성자가 아니라 운영자였는지. 아직 답을 찾지 못했다.
오후 두 시, 세린에게 연락이 왔다. 한빛자산신탁의 실제 지급 정지 계좌와 관련해 오래된 보관금 기록을 찾았다는 소식이었다. 백억 원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뜻은 아니었다. 수년간 법적 절차와 지급 보류가 이어져 현재 귀속을 확인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도 조사할 수 있다는 거죠?” 민석이 물었다.
“그렇습니다. 법원 기록과 신탁 수탁 내역을 차례로 대조해 볼 수 있어요.”
“감사합니다.”
“그리고 강민석 씨.”
“네.”
“어제 하신 결정으로 모든 문제가 끝난 건 아닙니다. 누군가 과거에 유효한 계약을 맺었다면 그 책임까지 없어지는 건 아니에요.”
“알고 있습니다. 그 책임은 기록과 법에 따라 따져야겠죠.”
세린은 짧게 웃었다. “그래서 제가 이 일에 계속 관심을 두는 겁니다.”
퇴근 전 민석은 회사 건물의 옥상에 올라갔다. 하늘은 붉은빛을 조금 남기고 있었다. 아래 도로에서는 퇴근 차량들이 꼬리를 물었고 건너편 사무실의 불빛이 하나씩 켜졌다. 그 모든 사람에게 내일의 잔액이 미리 보인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누군가는 기뻐할 것이다. 승진 보너스가 들어온다는 예고를 보면 가족에게 좋은 저녁을 사 줄 것이다. 누군가는 절망할 것이다. 내일 큰돈이 빠져나간다는 문구 하나로 잠을 못 잘 수도 있다. 예고가 맞든 틀리든 사람들은 오늘의 결정을 바꿀 것이다.
민석은 처음 능력을 얻었을 때를 떠올렸다. 택시비 사만 팔천 원을 아끼려고 돌아가려 했고, 결국 그 돈은 예상대로 빠졌다. 렌즈를 판매해 얻은 십이만 육천오백 원이 나타났을 때는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보험금 오백만 원이 들어왔을 때는 정말 자신이 특별해졌다고 믿었다.
그렇게 시작한 능력이 일조 원짜리 원장으로 확장됐다. 어쩌면 초능력의 가장 무서운 부분은 거대한 금액이 아니라 돈을 통해 모든 일을 설명할 수 있다고 믿게 하는 힘이었다.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윤미정이 보낸 메시지였다.
'오늘은 손님이 두 명 왔어요. 책은 안 팔렸지만 커피 한 잔씩 나눠 마셨어요. 아버지 책도 다시 서가에 꽂아 뒀고요.'
민석은 답장을 썼다.
'일상으로 돌아가셔서 다행입니다. 다만 기록 관련해서 새로운 연락이 오면 먼저 확인해 주세요.'
잠시 뒤 미정이 웃는 얼굴 이모티콘을 보냈다. 그 작고 평범한 메시지를 보니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누군가의 세계를 뒤집지 않고도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다는 사실이 반가웠다.
그는 어머니 집으로 갈 버스 시간을 확인했다. 버스는 오 분 뒤 도착할 예정이었다. 미래의 예고와 달리, 정류장 안내판에 적힌 오 분은 언제든 조금 빨라지거나 늦어질 수 있었다. 민석은 그런 불완전함이 좋았다.
그날 저녁, 민석은 어머니 집을 찾았다. 냉장고에는 반찬 통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어머니는 밥을 두 공기나 퍼 주었다.
“요즘 무슨 일 있지?”
“회사 일 말고도 조금 복잡한 게 있어요.”
“돈 문제냐?”
민석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평소 같으면 아니라고 했을 것이다. 어머니에게 자신이 본 숫자들을 설명할 자신은 없었다. 그렇지만 아무 일도 없다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돈 때문에 사람들이 힘들어지는 일을 봤어요. 제가 조금 도울 수 있을 것 같고요.”
“네가 다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하진 마.”
“네.”
어머니가 멸치를 집어 주었다. 민석은 잠시 웃었다. 어머니의 손에는 내일의 가격이 붙어 있지 않았다. 그것이 다행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 왔다. 민석은 받지 않았다. 대신 문자가 하나 도착했다.
'강민석 씨. 십 년 전 윤상필 교수의 연구 동의서에 서명했던 사람입니다. 교수님이 전하라고 하신 편지가 있어요.'
민석은 서윤과 세린에게 문자를 전달했다. 신원 확인 전까지 만나지 않기로 했다. 잠시 뒤 문자 보낸 사람이 윤 교수의 친필 편지를 사진으로 보냈다. 종이 끝에 적힌 날짜는 2016년이었다.
'사람이 내일을 소유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말게. 예측 기술이 커질수록 사람의 동의는 더 중요해지네.'
편지 마지막에는 작은 도표가 있었다. 여러 개의 원장이 위아래로 이어진 구조였다. 맨 아래에 413개의 점이 찍혀 있었고, 그 위에는 굵은 선 하나가 있었다. 선 옆에는 ‘운영 원장’이라고 적혀 있었다. 가장 위에는 빈 네모가 있었다.
'최종 기록 보관자.'
민석은 종이를 확대했다. 최상단 네모 아래 작은 글씨가 추가로 있었다.
'미래의 기록을 보내는 자는 누구인가?'
민석은 편지를 접어 가방 안쪽에 넣었다. 서명란에는 윤 교수의 익숙한 필체가 남아 있었다. 하지만 편지를 보낸 사람의 신원이 아직 확인되지 않았으므로, 그는 이것이 진짜 유품이라는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
그때 준성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내가 찾던 일기, 일부가 남아 있어.”
“뭐라고 적혀 있는데?”
“2016년 회의 다음 날, 네가 내게 이상한 말을 했대. '언젠가 모든 사람이 내일의 잔액을 보게 된다면 아무도 지금의 돈을 믿지 못할 거야.'”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았지?”
“모르겠어. 그땐 그냥 겁먹어서 한 말이라고 생각했어.”
민석은 버스 창가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봤다. 아직 서른 중반의 평범한 직장인 얼굴이었다. 이 얼굴이 십 년 뒤엔 어떻게 변할까. 그리고 십 년 뒤 자신이 무슨 선택을 했기에 과거로 편지를 보내려고 했을까.
“준성아. 나중에 누가 과거의 내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하면, 그때도 증거부터 보자.”
“알아. 이번에는 그럴게.”
통화를 끝낸 뒤 민석은 마침내 깨달았다. 기억 속에 남은 자기 자신조차 항상 올바른 사람은 아니었다. 미래에서 들려오는 자기 목소리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지금의 자신이 믿어야 할 것은 어느 시점의 강민석도 아니라, 사람에게 동의를 구하고 증거를 확인하는 절차였다.
그 순간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검은 원장 화면이 다시 열렸다.
[하위 원장 1건 동결 확인]
[상위 원장 원본 대조 시작]
[원본 작성 시각: 2036.10.29 18:30]
민석은 움직이지 못했다. 오늘로부터 꼭 십 년 뒤의 날짜였다.
이어 다음 줄이 나타났다.
[원본 작성자: 강민석]
자신의 이름이었다. 누군가 또다시 명의를 도용한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첫 번째 백억 원 서명과는 달랐다. 이번에는 아무런 수락 버튼도, 거절 버튼도 없었다.
휴대전화 스피커에서 녹음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과거의 나에게.”
민석은 숨을 멈췄다. 목소리는 분명 자신이었지만 지금보다 나이가 들어 있었다. 목 뒤가 서늘해졌다.
“서문재는 처음부터 운영자가 아니었다. 우리가 가장 먼저 막아야 할 건 돈이 아니라, 돈이 생기기 전에 사람을 서명자로 만드는 규칙이야.”
녹음은 잠시 끊겼다가 이어졌다.
“그리고 준성이가 십 년 동안 숨긴 건 그 규칙을 만든 사람이 누구냐는 사실이 아니야.”
전화기 너머에서 종이가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 규칙을 없앨 권한을 네가 한 번 사용했다는 사실이지.”
민석은 미간을 찌푸렸다. 어제 분명 규칙을 바꿨다. 하지만 십 년 뒤 자신이 말하는 ‘한 번’은 어제 일이 아닌 것처럼 들렸다.
마지막 문장은 더욱 이상했다.
“다음에 만나면 나를 믿지 마. 미래의 나는 이미 한 번 틀렸거든.”
녹음이 끝났다. 화면에는 숫자가 하나 나타났다.
[상위 원장 총 노출액: 계산 중]
민석은 휴대전화를 내려다봤다. 한때는 큰돈이 들어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제 그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의 내일을 승인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10초 뒤 원장이 계산을 마쳤다.
[상위 원장 연결 대상: 12개]
[1차 동기화 대상: 대한민국 수도권]
[승인 예정 시각: 2026.10.30 00:00]
시각은 오늘 자정이었다. 민석은 달력을 확인했다. 남은 시간은 세 시간 남짓.
그때 서윤에게서 전화가 왔다.
“민석 씨, 이상한 일이 생겼어요. 방금 서로 다른 은행을 쓰는 사람들이 같은 화면을 봤다고 제보했어요. 전부 내일의 잔액이랍니다.”
민석은 눈을 감았다 떴다. 사백열네 명의 문제가 도시 전체의 문제가 될 수도 있었다.
“서윤 씨, 도현 씨가 남긴 원본 메일을 다시 꺼내 주세요.”
“왜요?”
“거기 마지막 줄에 적혀 있었던 말이 생각났어요. '가입이라는 단어를 믿지 말 것.'”
민석은 가방에서 낡은 종이 수첩을 꺼냈다. 노트 첫 장에는 사만 팔천 원 택시비가 적혀 있었다. 그 아래에는 자신이 직접 써 둔 문장이 있었다.
'돈을 받기 전, 받을 이유부터 확인한다.'
그는 그 밑에 두 번째 문장을 적었다.
'권한을 얻기 전, 누구의 권한인지 확인한다.'
휴대전화에서는 새로운 숫자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상위 원장 접속 인원: 414 → 415 → 416]
사람들이 하나씩 원장의 목록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민석은 숫자를 세는 대신 서윤에게 말했다.
“이번엔 숫자보다 먼저 사람을 찾아야겠어요.”
제20화 댓글 0
댓글·공감·신고는 로그인 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전 익명 댓글은 그대로 표시됩니다.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