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6일 화요일 오전 아홉 시 반.
박준성은 밤을 거의 새우고 민석의 집 앞에 나타났다. 손에는 종이봉투가 있었고, 그 안에는 따뜻한 두유와 2018년 검토 문서의 목록이 들어 있었다.
“밥은 안 먹고 숫자만 보냐.” 민석이 물었다.
“두유 샀잖아.”
“너 마시려고 산 거겠지.”
준성은 웃지 않았다. 그가 가져온 자료에는 자신이 당시 외부 검토 의견을 냈던 흔적이 있었다. 수익률이나 손익을 계산하는 문서가 아니었다. 보관인이 본인 의사를 확인하지 못했을 때 누가 그 위험을 떠안을지 정하는 계약 부속표였다.
“내가 이걸 봤어. 인정할게.” 준성이 말했다.
“어디까지 알았는데?”
“서류 두 장을 합치면 승인처럼 보이는 오류가 있다는 건 알았어. 하지만 그게 실제 사람의 청구를 끝내는 데 사용될 거라고는...”
“몰랐다고?”
준성은 끝까지 문장을 완성하지 못했다. 민석은 두유를 탁자에 내려놓았다. 화가 나는 이유는 분명했다. 자신이 몇 달 동안 쫓아다닌 원인을 친구가 훨씬 전에 봤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이번엔 기억 안 난다고 하지 마.”
“내 검토 의견서에 반대 사유가 남아 있어. 문제는 내가 최종 보고서까지 확인하지 않았다는 거야.”
민석은 봉투를 열었다. 문서 여백에 준성의 필체가 있었다.
‘실제 수취인 동의 부재를 금전 정산으로 대체하지 말 것.’
그 아래 붉은 글씨가 덧씌워져 있었다.
‘운영 위험 충당액으로 처리. 지급기관 책임 범위 이관.’
세린과 예린은 오후 회의에서 그 차이를 설명했다. 백억 원은 지금 민석이 갚아야 하는 확정 채무가 아니었다. 수령 동의 확인에 실패한 자료가 하나의 통합 정산 상품으로 편입됐을 때 발생할 수 있는 최대 위험액이었다. 계약 부속표는 그 위험을 누군가의 ‘대표 확인’에 기대어 분산시키도록 되어 있었다.
“누가 대표 확인을 했다는 거죠?” 민석이 물었다.
예린은 화이트보드에 원을 하나 그렸다. 한쪽에는 ‘2016 강민석’, 다른 쪽에는 ‘USER-2036’을 적었다. 그리고 둘 사이에 점선을 연결했다.
“둘 다 실제 본인 동의라는 증거는 없어요. 시스템이 연결해 둔 식별자일 뿐입니다.”
서윤이 질문을 보탰다. “그런데 그 식별자가 위험 평가의 책임자를 가리킨다면요?”
“그게 문제예요.” 세린이 말했다. “책임 귀속의 적법성은 계약, 권한, 사실관계를 함께 살펴야 합니다. 코드 하나로 확정할 수 없어요.”
민석은 종이에 적힌 100억 원을 오래 바라봤다. 처음 그 숫자를 봤을 때 자신이 곧 망할 거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숫자가 누군가의 동의를 지워 버린 뒤 생긴 구멍을 덮는 데 사용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면 이 돈의 주인은 누구예요?”
“아직 주인이라는 말도 조심해야 해.” 준성이 대답했다. “예상 손실을 누가 떠안을지 논쟁하는 표일 뿐일 수도 있어.”
“그런데 네가 본 적 있는 표였지.”
준성은 고개를 숙였다. “그래.”
오후 다섯 시, 최유나에게 뜻밖의 연락이 왔다. ‘남기록’이라는 외부 검수 책임은 개인 이름이 아니었다. 2018년 검수 업무를 대행했던 업체가 사용한 테스트 계정의 표시 이름이었다. 계정에는 한 사람의 서명이 아니라 여러 사람의 전자 기록을 시험용으로 불러오는 기능이 연결돼 있었다.
“그럼 우리가 사람을 쫓은 게 아니라 프로그램을 쫓은 거네요.” 서윤이 말했다.
“그 프로그램을 실행한 사람은 또 있어요.” 유나가 답했다. “계정이 단독으로 모든 걸 결정했다고 생각하면 안 돼요.”
검수 계정의 운영 내역은 보관 중인 자료만으로 완전하지 않았다. 그러나 마지막 변경 날짜가 표시돼 있었다.
[2027.02.09 09:17 / 외부 비교자료 조회]
민석은 의자를 밀었다. 자신이 2016년 서명을 대조하던 바로 그날이었다. 게다가 외부 비교자료 조회는 자신들의 승인 범위에 포함되지 않았다.
“누군가 우리가 찾는 걸 보고 있네요.”
예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단순 조회가 아니라 다른 시스템에 전달된 기록이 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자료 보존을 추가 요청하죠.”
그날 밤 검은 원장은 평소와 달리 아무 금액도 띄우지 않았다.
[다음 예측 생성 보류]
[사유: 2036 확인 주체 불일치]
민석은 처음으로 숫자가 사라진 화면을 보았다. 안도할 틈도 없이 바로 아래 새 줄이 나타났다.
[대체 예측 담당자 지정 요청: 박준성]
민석은 휴대전화를 들어 친구에게 걸었다. 이번에는 돈보다 먼저 사람을 지켜야 할 때였다.
제187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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