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9일 화요일 오전 여덟 시 사십 분.
강민석은 지하철 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며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오른손에는 2016년 수첩 사본, 왼손에는 어젯밤 검은 원장에서 저장한 문서 사진이 있었다. 낡은 수첩의 자기 이름은 기울기가 심했고 마지막 획이 길었다. 화면 속 이름은 반듯했다. 누가 봐도 같다고 하기에는 이상했고, 다르다고 단정하기에는 너무 익숙했다.
“내가 쓴 글씨도 십 년 지나면 낯설구나.”
옆에서 출근하던 직장인이 슬쩍 그를 바라봤다. 민석은 휴대전화를 내렸다. 사람들은 저마다 목적지가 있었다. 자신도 오늘 목적지가 분명했다. 돈이 들어온 은행이 아니라, 세온기록관리의 원본 열람실이었다.
아홉 시 십 분. 세린과 한서윤, 최유나가 자리에 앉았다. 박준성은 연락을 받고 조금 늦게 들어왔다. 열람실 직원이 보여 준 것은 원본 자체가 아니라 보존 절차에 따라 출력된 고해상도 비교용 이미지였다. 실물은 따로 관리 중이며, 열람 목적과 권한을 확인한 사람에게만 제한적으로 공개한다는 설명이 붙었다.
“사진으로만 할 수 있는 말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세린이 먼저 못을 박았다. “서명이 비슷하다고 곧바로 위조라고 주장할 수는 없어요.”
“그럼 오늘 아침 아홉 시 십칠 분까지 뭘 확인할 수 있죠?” 민석이 물었다.
유나가 투명 종이 한 장을 꺼냈다. 두 문서에 있는 서명 이미지를 크기만 같게 맞춰 놓은 것이었다. 그녀는 수첩의 자기 서명을 문서 위에 겹쳤다가, 서명의 마지막 자음 위에 작은 점을 찍었다.
“이쪽은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여기요. 잉크의 번짐까지 같아요.”
준성이 고개를 숙였다. 수첩 사진에는 종이 섬유 때문에 생긴 검은 점이 있었다. 원본이라고 주장하는 문서의 서명에도 같은 자리에 같은 점이 있었다. 사람이 열 해 전의 잉크 번짐까지 다시 그릴 수는 없었다.
“같은 이미지를 복사해 붙였을 가능성이 있다는 거지, 누가 했는지는 모르겠네요.” 서윤이 기록했다.
아홉 시 십칠 분. 민석이 휴대전화를 확인했다.
[2016.10.25 확인 책임 삭제 / 미완료]
[원본 대조: 외부 이의신청 접수 확인]
[확인 주체: 판정 보류]
검은 원장은 사람을 한 번에 지워 버리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이 실제 행정 절차의 결과라는 보장은 없었다. 세린이 공식 접수번호를 다시 확인했고, 그곳에는 단 한 줄이 있었다.
‘서명 진위 확인 요청 접수. 기존 이의신청 유지.’
“화면에는 실패라고 쓰여 있어도 우리가 오늘 실패한 건 아니에요.” 세린이 말했다.
민석은 2016년 수첩의 그 페이지를 떠올렸다. 그는 그날 누군가에게 원본을 돌려줘야 한다는 문장을 적었다. 그런데 왜 훗날 그 메모의 서명이 정산 승인란에 들어갔을까.
열람실 직원이 추가 문서를 건넸다. 2016년 원본 문서의 앞장을 찾은 것이다. 표지에는 수령 확인이 아닌 다른 제목이 적혀 있었다.
[반환 거부 접수 대장 / 예비 열람인 기록]
서명이 찍혀 있던 곳의 원래 이름은 ‘동의자’도 ‘책임자’도 아니었다. 그 옆에는 손으로 쓴 작은 화살표가 남아 있었다.
‘대신 받지 마시오.’
민석의 머릿속에서 오래전 사무실의 형광등 소리가 잠깐 되살아났다. 접수 창구의 종이 더미. 누군가 급하게 뛰어 들어오던 발소리. 자기 이름을 써 달라는 부탁이 아니라, 절대로 다른 사람이 대신 서명하지 못하게 막아 달라는 부탁.
그는 수첩을 덮었다.
“이하은 씨가 나한테 뭘 맡겼는지부터 다시 들어야겠어요.”
그때 서윤의 휴대전화로 문자 한 통이 도착했다.
‘2016년 문서는 두 장이 아니라 세 장입니다. 마지막 장을 찾으면 이름을 훔친 사람이 나옵니다.’
보낸 사람은 발신자 표시 제한이었다. 서윤은 바로 답장하지 않았다. 대신 도착 시각과 문구를 저장했다.
세린이 물었다. “세 번째 장이 있다는 사실을, 누가 알고 있었을까요?”
민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늘 처음으로 그의 이름을 지우겠다는 협박보다 무서운 것이 생겼다. 누군가 자신들보다 먼저 원본을 보고 있다는 가능성이었다.
제181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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