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장 규칙 변경 제안 가능]
문구는 하루가 지나도 사라지지 않았다. 민석은 화면을 볼 때마다 거대한 창고의 문 앞에 홀로 서 있는 기분이었다. 열쇠를 가진 사람은 자신인데, 창고 안 물건은 다른 사람의 것이었다.
“권한을 복원해 줬다고 해서 써야 하는 건 아닙니다.” 오세린이 말했다.
“하지만 지금 그대로 두면 다른 사람들이 계속 강제 정산을 당할 수 있어요.”
“그러면 당사자들에게 먼저 물어보세요.”
서윤은 그 말에 반응했다. 이미 윤미정과 장은재가 자신이 아는 다른 피해자에게 연락해도 좋다고 허락했다. 전체 명단을 공개할 수는 없었지만, 이들은 서로를 연결할 의사가 있었다.
“모든 사람을 한꺼번에 모을 순 없어요.” 서윤이 말했다. “당장 연락 가능한 열두 명부터 동의를 받아 의견을 들어보죠. 원장 안에서 투표가 가능하다면 그 기능도 검증하고요.”
민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준성은 별말이 없었다. 그가 기억을 숨겼다는 사실이 밝혀진 뒤부터 둘 사이에는 어색한 거리가 생겨 있었다.
모임은 서점 위층 작은 강의실에서 열렸다. 자발적으로 참석한 여덟 명과 온라인으로 연결한 네 명. 모두 같은 화면을 본 것은 아니었다. 미래 정산 금액이 휴대전화에 나타난 사람도 있었고, 자신은 본 적 없지만 부친의 투자 피해 자료에서 이름을 발견한 사람도 있었다.
“저는 삼백만 원이 들어온다고 떠요.” 한 남자가 말했다. “그 돈이 진짜라면 받고 싶습니다. 빚이 밀려서요.”
“저는 오십만 원이 빠진대요.” 다른 여자가 말했다. “무슨 계약인지도 모르겠고요.”
누군가 화를 냈다.
“그럼 이 자리에 있는 강민석 씨가 그 돈을 다 대신 내 주는 거예요?”
민석은 서서 대답했다.
“아닙니다. 저는 누구의 지급도 대신 약속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건 원장에 무엇이 적혀 있는지 검증하고, 동의 없는 정산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면 왜 당신이 승인자예요?”
“저도 묻고 싶습니다.”
그 말에 누군가 웃었다. 민석도 조금 웃었다. 사실을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할 수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서윤은 회의의 규칙을 짧게 설명했다. 참석 사실을 공개할지, 이름을 적어도 되는지, 취재에 동의할지 모두 따로 확인했다. 누구도 남의 이름을 대신 밝히지 않았다. 돈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은 쉽게 상처받는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 전에 각자의 이야기를 듣는 시간이 있었다. 가장 먼저 말문을 연 사람은 택배 일을 한다는 남자였다. 원장에는 내일 저녁 이십칠만 원이 입금된다고 떠 있었고, 그는 그 돈을 믿고 딸의 학원비를 내기로 했다고 했다. 은행 계좌에는 아직 그 돈이 없었다. 며칠째 잠도 오지 않는다고 했다.
“들어올 돈이라고 하는데, 안 들어오면 어떡하죠?”
“예고가 미래의 계약을 증명하는 건 아닙니다.” 민석이 말했다. “계좌에 실제로 입금된 돈과 약속된 지급 내역부터 확인하셔야 합니다.”
남자는 얼굴을 찡그렸다.
“그런 건 알아요. 그런데 안 믿고 싶어도 자꾸 보게 되는 게 문제예요.”
그 말에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몇 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고가 불안한 사람뿐 아니라 예고가 기쁜 사람도 원장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반대편 자리의 여자는 요양원에서 일한다고 했다. 그녀의 화면에는 '미래 치료비 회피 -120만 원'이 떠 있었고, 그걸 보고 병원 예약을 취소할 뻔했다고 했다. 예고가 돈을 아끼라는 조언인지, 치료를 포기하라는 명령인지 알 수 없어 무서웠다고 했다.
세린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의료적 결정은 이 화면이 아니라 의료진과 상의하셔야 합니다. 원장 금액으로 치료 여부를 정할 이유는 없습니다.”
민석은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며 똑같은 규칙 하나로 모든 사람을 구할 수 있을지 다시 생각했다. 예고를 없애 버리면 불안한 사람은 안심할 수 있다. 하지만 기대에 매달린 사람은 자신이 받을 수 있다고 믿던 돈을 도둑맞았다고 느낄 수도 있었다. 그래서 ‘권리를 지운다’는 표현을 함부로 쓸 수 없었다.
한 참석자가 물었다. “우리가 당신에게 왜 맡겨야 하죠?”
민석은 잠시 말이 막혔다. 그 질문은 불편했지만 가장 정당했다.
“맡기지 않으셔도 됩니다. 오늘은 제가 여러분 대신 어떤 결정을 하려는 자리가 아니에요. 원장이 무슨 권한으로 그런 결정을 만드는지 확인하려는 자리입니다.”
서윤이 참석자마다 요청할 수 있는 자료의 범위를 설명했다. 이름을 남기기 싫은 사람은 의견만 제시해도 됐고, 언제든 인터뷰를 중단할 수 있었다. 그 과정을 거치자 조금씩 표정들이 풀렸다.
미정은 아버지 책에서 나온 한 문장을 읽었다.
“위험을 나눌 사람에게 물어보지 않으면, 그건 기술이 아니라 폭력이다.”
방 안이 잠시 조용해졌다.
민석은 태블릿 화면을 회의실 모니터에 연결했다. 원장에는 새로운 규칙 작성란이 있었다. 그는 시험 삼아 아무 내용도 입력하지 않고 설명을 펼쳤다.
[규칙 변경 영향 범위: 참여자 전체]
[필요 승인: 대표 승인자 1명]
[일괄 이의 제기 허용: 아니오]
“이거 보세요.” 민석이 말했다. “사백열세 명이 영향을 받는데, 대표 승인자 한 사람만 누르면 된대요.”
한 참석자가 손을 들었다.
“그럼 우리끼리 투표를 해도 소용없는 것 아닌가요?”
“원장 안에서는 그렇습니다. 하지만 저는 여러분 대신 동의할 권리를 받지 않았어요. 이 기능을 그대로 쓰면 잘못을 반복하는 거죠.”
세린은 모임에서 나온 의견을 공식 의견서 형태로 남기자고 했다. 참석자는 각자의 범위에서 동의 여부를 선택할 수 있었고, 거부한 사람의 이름은 수집하지 않았다.
토론은 길어졌다. 지급 예고가 확실한 사람에게는 돈을 받는 기회를 없애지 말라는 주장도 있었다. 당장 위험을 멈추기 위해 모든 정산을 일시 중지하자는 의견도 있었다. 서로 다른 사정이 있었고 누구도 가볍게 양보할 수 없었다.
민석은 마지막에 화이트보드에 한 문장을 적었다.
‘개별 동의 없는 채권 성립 금지. 기존 권리 보존. 새로운 정산은 증빙 확인 전 보류.’
이것은 원장을 없애자는 말이 아니었다. 타인의 돈과 권리를 함부로 없애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제안이었다.
“찬성하시는 분?”
참석한 열두 명 중 열 명이 손을 들었다. 한 명은 반대했고, 한 명은 결정하지 않았다. 민석은 그 숫자를 그대로 기록했다. ‘만장일치’라고 적고 싶지 않았다. 두 사람의 다른 생각도 이 모임의 일부였다.
반대 의견을 낸 사람은 마지막까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손해를 입은 투자자의 아들이었다. 아버지가 평생 모은 돈을 돌려받지 못한 뒤 가족 사이가 무너졌다고 했다.
“저는 왜 원장 작동을 멈추려는지 이해합니다. 그런데 정말 돈이 들어오는 길까지 막는 건 아닌가요? 우리 아버지는 지난 십 년 동안 '검증 중'이라는 말만 들었어요.”
민석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원장에서 보고 배운 불신이 그 사람에게는 현실 금융기관에서 겪은 상처와 겹쳐 있었다.
“맞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실제 채권은 남겨 두어야 합니다. 원장이 예고한 돈을 받지 말자는 게 아니라, 예고만으로 누군가의 권리를 빼앗거나 남에게 빚을 넘기지 못하게 하자는 거예요.”
“저는 반대 표시 그대로 두겠습니다.”
“그렇게 기록하겠습니다.”
민석은 의견서에 그 사람의 반대 취지를 정확히 옮겼다. 서윤은 그 모습을 보고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기자로서는 분명한 영웅을 내세우는 기사가 읽기 좋았다. 하지만 이 사건은 누군가 영웅이 된다고 해결되지 않았다.
모임이 끝나고 사람들이 떠난 뒤 민석은 빈 의자들을 바라봤다. 열두 사람이 앉았던 공간이 이렇게 좁다는 게 이상했다. 사백열세 명이 저마다 의자 하나씩을 차지한다고 상상하자 운동장 하나로도 부족할 것 같았다.
“나머지 사람들은 어떻게 할까?”
세린이 대답했다. “오늘의 열두 명이 나머지를 대리한다고 주장하지 맙시다. 우리가 확인한 범위와 아직 확인하지 못한 범위를 분리하면 됩니다.”
민석은 그 말을 노트에 적었다. 숫자를 지우기 위해 사람을 생략하는 순간 서문재와 다를 것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때 민석의 휴대전화에 답장이 도착했다. 발신인은 관리인 4번.
[제안 문안 감지]
[참여자별 의사 확인은 원장 효율성을 저해합니다.]
[대표 승인자 단독 제출을 권고합니다.]
민석은 미간을 찌푸렸다.
“효율?”
준성이 낮게 말했다. “그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단어야. 비용을 줄인다는 이유로 누군가의 권리를 생략할 수 있게 되거든.”
“그러니까 우리가 그걸 하지 말아야지.”
모임이 끝날 무렵 미정이 다가왔다.
“원장 때문에 처음에는 칠만 사천 원이 사라질까 무서웠는데요. 지금은 조금 다른 게 무서워요.”
“뭔데요?”
“이렇게 사람이 많은데, 저마다 다 사정이 있다는 걸 한 번도 묻지 않았다는 거요.”
민석은 대답하지 못했다. 자신도 처음에는 일조 원이라는 숫자부터 보았다.
모임의 끝자락에 한 중년 남자가 다가왔다. 그는 자신이 원장에 이름이 있는지도 아직 모르지만, 십 년 전 한빛자산신탁에 투자한 아버지가 있다고 했다.
“저희 아버지는 돌아가실 때까지 자기가 바보라서 돈을 잃었다고 하셨어요. 그런데 만약 회사가 제대로 설명하지 않은 계약이었다면… 그건 좀 다르잖아요.”
민석은 그에게 헛된 희망을 주고 싶지 않았다.
“당시 계약서와 안내 자료를 확인해 봐야 합니다. 잘못된 설명이 있었다면 법적으로 어떤 구제를 받을 수 있는지도 따져야 하고요.”
“시간이 너무 오래 지났는데도요?”
“그 문제도 법률 전문가가 검토해야 합니다. 제가 여기서 된다고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남자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확인할 방법을 알려 주신 걸로 됐습니다. 그때는 질문할 데도 없었거든요.”
그는 연락처를 남기지 않고 돌아갔다. 민석은 그 뒷모습을 오래 바라봤다. 모든 사람이 원장을 함께 고치러 온 것은 아니었다. 누군가는 과거 자신이 겪은 일이 사기였는지 실수였는지만 알고 싶었다. 그것조차 누가 대신 결정해 줄 수 없는 문제였다.
미정이 책 한 권을 민석에게 건넸다. 서점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평범한 수첩이었다.
“이건 돈 안 받을게요. 아버지 책처럼 나중에 중요한 기록이 될 수도 있잖아요.”
민석은 수첩을 받아 들고 계산대에 적힌 가격을 확인했다. 그리고 정가대로 돈을 냈다.
“고맙습니다. 하지만 제 돈으로 사고 싶어요.”
미정은 웃었다. “그럼 다음에 커피는 제가 드릴게요.”
민석은 그 제안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를 돕는다고 해서 늘 돈이 오가야 하는 건 아니었다. 원장이 알아듣지 못하는 거래가 세상에는 더 많았다.
회의실 문을 나서는 순간 준성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그는 화면을 보고 굳어졌다.
[열람자 박준성]
[대표 승인자 변경 가능]
[변경 대상: 강민석 → 박준성]
[변경 시각: 오늘 23:59]
“누가 이걸 신청했어?” 민석이 물었다.
준성은 고개를 저었다.
“나도 아니야.”
서윤이 화면을 확대했다. 신청자 이름은 서문재가 아니었다.
[신청자: 강민석]
민석은 분명 그런 신청을 한 적이 없었다.
제17화 댓글 0
댓글·공감·신고는 로그인 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전 익명 댓글은 그대로 표시됩니다.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