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재가 413번이라고?”
윤미정의 서점에서 가져온 명세표에는 413번이 비어 있었다. 강민석이 414번으로 연결되기 전에도 마지막 가입자는 존재했지만, 그 자리는 이름 없이 번호만 남아 있었다. 세린은 봉투 안에서 나온 종이를 따로 보관했다.
“이걸 증거라고 인정할지는 다른 문제입니다. 발견된 경위가 비정상적이니까요.”
준성이 복잡한 얼굴로 말했다. “문재가 자기 자신을 넣었을 리는 없어. 운영자는 원장의 정산 대상이 아니라고 늘 주장했거든.”
“그 주장이 계약서에 있어?” 민석이 물었다.
“어디에도. 그 사람이 그렇게 말했다는 것뿐이야.”
“그럼 믿을 이유가 없지.”
세린은 봉투를 봉인하고, 세 사람이 발견한 시간과 상태를 각각 메모하도록 했다. 같은 광경을 봤더라도 기억은 달라질 수 있었다. 민석은 자신이 과거 기억을 잃었던 일을 떠올리며 더 꼼꼼하게 적었다.
그날 저녁, 정식 입회 절차를 마친 뒤 배송 상자가 열렸다. 상자는 낡았지만 봉인용 테이프는 새것처럼 깨끗했다. 보관 업체 담당자, 오세린 변호사, 원본 관리 주체 측 사람이 참석했다. 민석은 신분을 확인받고 보관된 서류 목록을 열람했다.
서류를 열람하는 작은 방에서는 냉방기 돌아가는 소리만 났다. 담당자는 기록 번호를 불러 주고 다음 봉투를 열었다. 민석은 거기 적힌 첫 페이지와 마지막 페이지의 번호를 따로 적었다. 같은 번호의 서류가 서로 다른 봉투에 있다면 나중에 쉽게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열람대 뒤편에 선 남자가 계속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렸다. 보관 업체 담당자는 청산 관리 측 동행인이라고 소개했지만, 민석은 그가 서류보다 휴대전화 화면을 더 자주 본다는 사실이 신경 쓰였다.
“사진은 지정된 자리에서만 찍을 수 있습니다.” 담당자가 말했다.
남자는 서류를 향해 카메라를 들이밀려다가 천천히 내려놓았다. 누군가의 행동이 수상해 보인다고 곧바로 범죄자라고 단정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기록의 수집 경로가 엄격해야 한다는 사실은 다시 확인됐다.
첫 봉투에서 한빛자산신탁의 실제 청산 기록을 대조할 수 있는 페이지가 나왔다. 과거 지급 정지 명령과 채권 신고에 관한 목록이었다. 민석이 노트를 살피자 날짜 하나가 눈에 띄었다. 2016년 10월 26일. 자신이 기억을 잃었다는 다음 날이었다.
“이날 무슨 일이 있었지?”
준성은 눈을 질끈 감았다.
“너를 학교 앞에서 만났어. 너는 회의실에서 나를 본 적이 없다고 했고, 그 회사에 간 기억도 없다고 했지.”
“그다음에는?”
“나는 네가 숨겨둔 복사본을 찾아다녔어. 그런데 하나도 못 찾았어.”
민석은 날짜 옆에 적었다. '기억 상실 진술: 박준성 / 교차 검증 필요'. 이젠 친구의 말도 객관적인 검증이 필요하다는 사실에 준성은 반발하지 않았다.
“나도 그때 일기 썼어.” 준성이 말했다. “가져올게. 내가 지금 잘못 기억하는 게 있으면 거기서 드러날 거야.”
민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친구를 믿을지 말지 결정하기 위해서는, 그가 틀렸다는 사실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했다.
첫 번째는 2016년 한빛자산신탁의 고객 예치금 정산 보고서였다. 두 번째는 지급 정지 계좌의 관리 책임 변경 요청서. 세 번째는 413건의 ‘조건부 지급 의향서’ 목록이었다. 서명란에는 이름이 있었지만 서명 자체가 비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원장에는 이미 동의했다고 나오는데요.” 민석이 말했다.
세린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원장이 그렇게 표시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문서만으로 모두가 동의했다고 말할 수는 없어요.”
네 번째 서류는 조금 달랐다. 겉장에 ‘2026년 10월 27일 최종 대조용’이라고 쓰여 있었다. 예정된 배송 날짜와 일치했다. 안에는 오늘 오전에 작성된 것 같은 합의서가 있었다.
오세린의 이름이 서명 예정자란에 찍혀 있었다.
“제가 이 문서를 본 적 없는데요.”
“그럼 서명하지 마세요.” 민석이 말했다.
“물론입니다.” 세린이 차분히 답했다. “그런데 이 문서에서 꼭 확인해야 할 부분이 있어요.”
합의서 마지막 장에는 공동 정산 책임자의 권한이 설명돼 있었다. '현재 가입자 중 원본을 대조할 수 있는 자는 모든 미확정 채권의 결과를 사전 승인할 수 있다.' 미확정 채권의 결과가 승인되면 그것을 실제 지급 이행 명령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문구가 뒤따랐다.
민석은 숨을 멈췄다.
“이거 제가 승인 버튼을 누르면 다른 사람들의 계약이 완성되는 구조잖아요.”
“그래서 당신에게 돈을 준다고 한 겁니다.”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문밖에 서문재가 있었다. 회색 정장 차림이었고, 오른손에는 오래된 은색 시계가 있었다. 보관 업체 직원은 그가 청산 관리 측의 참관 자격으로 등록되어 있다고 설명했다.
“왜 내 이름이 참가자 명단에 있습니까?” 민석이 바로 물었다.
문재는 미소를 지었다. “제가 참가자가 아니라는 근거부터 제시하셔야죠.”
“당신 방식대로 대답하지 않을 겁니다. 이건 사백열세 명의 권리에 영향을 미치는 문서예요. 누가 동의했고 누가 하지 않았는지부터 확인할 겁니다.”
“시간이 부족할 텐데요.”
“그 말은 이제 안 통합니다.”
문재의 미소가 얇아졌다.
서윤이 녹음 동의를 요청했다. 문재는 거부했다. 서윤은 그 뒤의 말은 녹음하지 않고 직접 들은 내용을 취재 노트에 적었다. 문재는 그런 태도를 오히려 비웃었다.
“기자들은 늘 증거를 찾죠. 하지만 돈의 흐름은 증거보다 먼저 움직입니다.”
민석이 대꾸했다.
“그럼 돈이 먼저 움직였다는 실제 계좌를 보여 줘요.”
“그건 미래의 장부에 있습니다.”
“그걸로 지금 사람들한테 갚으라고 할 순 없잖아요.”
문재는 잠시 침묵하다가 손목시계를 풀었다. 시계 뒤에는 오래된 숫자가 새겨져 있었다. HBT-2016-07. 민석이 처음 받은 백억 원 거래번호였다.
“이 숫자를 누가 만들었는지 아십니까?”
“당신 아닙니까?”
“아니죠. 저는 원장이 제시한 미래를 거래 가능한 형식으로 만들었을 뿐이에요.”
준성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사람이 서명하지 않은 계약까지 만든 거겠지.”
“동의는 서명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문재가 답했다. “사람은 선택을 하고, 그 선택의 결과가 기록됩니다.”
“설명을 듣지도 않은 사람의 선택을 누가 해석해요?” 민석이 물었다.
문재는 정면으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원장 화면을 바라보았다.
[413번 가입자 신원 확인: 진행 중]
[운영자 예외 조건: 검증 불가]
그의 눈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민석은 그 작은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당신에게도 숨긴 계약이 있군요.”
“강민석 씨.” 문재의 말투가 낮아졌다. “그 번호를 더 추적하지 마세요.”
“왜요?”
“누가 기록을 읽고 있는지 알게 될 테니까.”
문재가 문밖으로 나간 뒤에도 방 안에는 그의 향수 냄새가 남아 있었다. 회색 정장을 입은 남자가 방금까지 여기 있었다는 사실은 사진보다 확실한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정산 기록을 만든 사람이 그라고 단정할 근거는 아직 부족했다.
“413번이 저 사람이라는 기록은 정말 그의 원장에도 뜰까요?” 서윤이 물었다.
“확인해 보자고 해야겠죠.” 민석이 말했다.
기태라는 이름은 그때 아직 아무도 몰랐다. 다만 관리인 4번이라는 존재가 어디선가 기록을 검토한다는 흔적은 남아 있었다. 민석의 화면에는 '운영자 예외 조건 검증 불가'라는 항목이 계속 반짝였다.
준성은 한동안 문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문재는 자기 이름이 올라가는 걸 제일 싫어했어. 옛날에도 연구 참여 동의서 명단에는 절대 안 들어가려고 했지. 지시하는 사람은 연구 대상이 아니라고.”
“그런 사람을 누가 413번으로 만들었을까?”
“그건 모르겠어. 하지만 그 사람에게도 누군가의 버튼이 필요하다는 뜻이겠지.”
민석은 자신이 일곱 번째 거절을 하기 전 문재의 태도를 떠올렸다. 그 남자는 언제나 상대방에게 선택하도록 몰아붙였다. 자신이 선택할 때가 오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은 사람처럼 보였다.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아직 모르겠네.” 민석이 말했다.
세린이 대답했다. “누군가의 권한이 제한된다는 사실만으로 정의가 실현되는 건 아닙니다. 그 과정에 문제가 있으면 또 다른 피해가 생길 수 있어요.”
민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문재에게 어떤 책임이 있든, 그 역시 자신도 모르는 계약 때문에 손해를 봐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 원칙을 지키지 못하면 다시 같은 장부가 만들어질 뿐이었다.
그는 시계를 다시 차고 문을 나섰다. 세린은 서류 개봉 절차가 끝난 뒤 사본을 보관하는 방법을 담당자와 확인했다. 원본은 제자리에 봉인됐다. 민석은 그동안 다른 문서가 끼어들지 않았는지 사본 목록을 다시 세었다.
그때 마지막 장의 여백에서 아주 작은 문장을 발견했다.
'원장 작성자와 원장 운영자는 동일인이 아니다.'
그 아래에는 작성자의 이름이 인쇄되어 있지 않았다. 대신 직책만 남아 있었다.
'초기 설계 검증 책임자.'
민석은 원본 목록을 한 번 더 점검했다. 문재가 시계를 보여 준 순간 사람들이 그의 말에 휩쓸릴 뻔했지만, 방에 들어온 목적은 여전히 증거 확인이었다. 보관 업체 담당자는 각 서류의 열람 종료 시각을 기록하고 사진 사본의 사용 범위를 알려 줬다.
“이 자료가 외부로 나가면 제가 책임지게 됩니까?” 담당자가 물었다.
세린이 답했다. “보관하시는 분의 역할과 취재·소송 담당자의 역할은 다릅니다. 허용된 범위만 확보하겠습니다.”
담당자가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민석은 그 장면을 보며 문득 생각했다. 원장 속 '승인자'라는 단어는 바로 이런 구분을 지워 버린다. 서류를 보관한 사람도, 권리를 검증한 사람도, 현금을 지급한 사람도 한 이름 아래 묶을 수 있다면 어느 누구도 자기 역할 이상의 책임을 피할 수 없다.
“원장의 모든 거래가 잘못된 건 아닐 거예요.” 민석이 말했다.
서윤이 고개를 들었다. “무슨 뜻이에요?”
“미래의 위험을 알아보고 대비하는 일 자체가 잘못은 아니잖아요. 그건 보험이나 위험 관리에서도 하는 일이에요. 문제는 예측을 가지고 실제 계약을 만들어 버리는 거죠.”
준성이 낮게 말했다. “십 년 전 네가 보고서에 쓴 문장하고 똑같네.”
“그랬어?”
“응. '예측은 경고가 될 수 있으나 동의의 대체물이 될 수 없다.'”
민석은 그 문장을 그대로 적었다. 잊어버린 생각이라고 해서 틀린 생각은 아니었다. 다만 오늘의 자신이 같은 결론에 도달하기까지 너무 많은 사람이 위험에 가까워졌다.
준성은 종이를 보자 의자를 뒤로 밀었다.
“그 명칭… 우리가 대학생 때 쓰던 거야.”
민석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누가?”
“너.”
휴대전화가 짧게 울렸다.
[414번 강민석]
[초기 설계 검증 책임자 권한 복원]
[원장 규칙 변경 제안 가능]
민석은 버튼이 보이는 화면을 곧장 잠갔다. 조금 전까지는 승인만 요구하던 원장이 이제 규칙을 고치라고 권하고 있었다.
그리고 작은 글씨가 한 줄 더 추가됐다.
[규칙 변경에 따른 미확정 손익은 제안자에게 귀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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