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오전, 민석은 작은 회의실 테이블에 봉투 다섯 개를 나란히 올렸다. 택배 업체에서 온 것은 아니었다. 윤미정과 이선주 가족, 그리고 서윤의 취재 요청에 자발적으로 응한 두 명의 피해자가 전달한 서류였다.
“누가 이런 걸 모으자고 했어요?” 오세린 변호사가 물었다.
“원장에 적힌 금액을 줄이려고요.” 민석이 대답했다.
“금액이 줄면 사건이 해결되는 겁니까?”
민석은 입을 다물었다. 세린은 각 봉투의 출처를 적고, 열람 동의가 있는 자료와 없는 자료를 구분했다.
“사람이 원장에 올라간 이유부터 확인하세요. 숫자가 줄더라도 당사자가 받아야 할 돈이 사라지면 안 됩니다.”
그 말은 민석에게 필요한 제동이었다. 어젯밤 그는 원장의 총액을 계산하느라 잠을 거의 자지 못했다. 일조 원을 영으로 만들 수 있다면 모든 문제가 끝날 것처럼 생각했다. 하지만 누군가 실제로 받아야 할 돈이 그 숫자에 섞여 있을 수 있었다.
서윤이 회의실 화이트보드에 세 칸을 그렸다. '실재하는 채권', '조건부 권리', '증빙 없는 기록'.
“우선 이 세 가지부터 나누죠.”
준성은 첫 봉투에서 서류를 꺼냈다. 2016년 원금 100억 원의 채권 신고와 지급 정지 자료였다. 세린은 채권이 실제로 존재했는지와 현재 누가 권리를 갖는지는 별개라고 설명했다.
두 번째 봉투는 윤미정이 보내 온 서점 판매 기록이었다. 실제 판매가 없는 칠만 사천 원의 복원 청구. 세 번째는 이선주 아버지의 근무 기록과 투자자 명부를 분리한 자료였다. 회사 직원이 고객 돈을 운용했다는 사실이 곧 그 돈의 채무자가 된다는 뜻은 아니었다.
네 번째 봉투는 54번 가입자가 보내 온 계약서 사본이었다. 이름은 장은재. 구십 대 노모의 간병비를 마련하려고 보증 상품에 가입했다는 사람이었다.
“이 사람은 돈을 실제로 받은 적이 있어요.” 서윤이 말했다. “원장이 가짜라고 해서 지급된 돈까지 가짜가 되는 건 아니에요.”
세린이 계약서를 읽었다. “원래 채무는 별도로 검토해야 합니다. 원장에 나온 마이너스 삼천만 원과 실제 계약서의 대출 잔액을 일치시켜서는 안 됩니다.”
다섯 번째 봉투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보내겠다고 한 사람이 갑자기 연락을 끊었다. 서윤은 이유를 추측하지 않았다. 다만 발송 약속과 연락 중단 시각을 적었다.
민석은 화이트보드 앞에 서서 말했다.
“제 목표는 일조 원을 없애는 게 아니네요.”
“이제야 아셨군요.” 세린이 말했다.
“누군가의 권리를 지우지 않으면서, 근거 없는 금액만 걸러 내는 겁니다.”
네 사람은 분류표를 만들었다. 확인된 사실에는 날짜와 출처를 적고, 불분명한 항목에는 물음표를 남겼다. 원장의 화면 숫자는 시시각각 바뀌었지만 종이 위의 구분은 쉬이 흔들리지 않았다.
민석은 서류를 분류하는 도중 이선주 가족의 자료 앞에서 손을 멈췄다. 진료비 지원이 어디서 들어왔는지 아직 알 수 없다는 사실이 마음에 남았다. 원장에서는 이백만 원이 '정산 완료'로 처리됐지만 자신의 계좌로 돈이 들어온 적은 없었다. 실제로는 선주의 병원비 일부가 면제되었을 뿐이었다.
“여기 5화 때의 이백만 원은 어느 분류에 넣어야 할까요?”
“실제 돈을 주고받은 근거는 없으니 별도의 확인 항목으로 둬야겠죠.” 세린이 답했다. “병원 기록과 지급 주체를 알아보되 환자 본인의 동의가 우선입니다.”
서윤은 선주의 언니가 보내 온 메시지를 보여 줬다. 가족은 여전히 도움이 고맙지만 누가 부담했는지 알고 싶어 했다. 이상한 정산 시스템을 설명하지 않아도 자연스러운 질문이었다.
민석은 조심스럽게 답장을 적었다.
'병원비 지원의 실제 지급 주체를 확인 중입니다. 결과가 확인되기 전에는 특정인이나 회사가 부담했다고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확인에 필요한 정보 제공은 선주 씨 본인이 편한 범위에서 동의하실 때만 진행하겠습니다.'
세린은 그 문장을 읽고 고개를 끄덕였다.
“복잡한 일을 할수록 쉬운 말로 써야 합니다. 당사자가 알아들을 수 없는 설명으로 동의를 받는 게 이 사건의 시작이었으니까요.”
민석은 자신이 모은 다섯 봉투가 실제로 다섯 사람의 전부를 말해 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서류 한 장에는 생활비가 밀린 사람의 사정이 적혀 있지 않았고, 돈을 빌려 준 사람의 두려움도 드러나지 않았다. 증빙을 보되 종이 뒤의 사람을 놓치지 말아야 했다.
“원장에는 권리 분류가 몇 가지로 나뉘어 있어?” 그가 준성에게 물었다.
“기본적으로 네 가지. 확정 지급, 조건부 지급, 예상 손실, 대체 정산.”
“그럼 이백만 원 같은 건?”
“처음에는 대체 정산이었을 거야. 그런데 수취인이 아직 태어나지 않은 채권자라고 나왔지? 그건 나도 이해 못 했어.”
민석은 종이에 네 개의 칸을 더했다. 이해하지 못한 칸도 지우지 않았다. 의문이 남았다는 사실을 남겨 두는 것 역시 원본을 지키는 방법이었다.
점심 무렵 54번 장은재에게서 전화가 왔다. 원장에는 더 큰 돈을 갚을 수 있다는 광고가 표시되어 있었고, 버튼을 누르면 연체 기록이 없어진다고 했다.
“이미 대출이 있는데 또 다른 돈을 받으라는 거예요?” 민석이 물었다.
“네. 갚는 건 내일의 제가 할 일이라면서요.”
“누른 적은 없으시죠?”
“없어요. 그런데 문자만 봐도 자꾸 마음이 흔들려요. 어머니 요양병원비가 밀렸거든요.”
민석은 섣불리 위로하지 않았다. 돈이 필요한 사람에게 버튼을 누르지 말라고 하는 말은 쉬웠다. 그다음에 어떻게 살지 함께 고민하지 않으면 단지 겁을 주는 일이었다.
세린이 통화를 넘겨받아 일반적인 채무 조정 제도와 법률 상담 경로를 안내했다. 상황에 맞는 지원이 가능한지는 정식 서류를 보고 확인해야 한다고 했다. 은재는 오랜 침묵 끝에 고맙다고 대답했다.
전화가 끊기자 민석의 원장에 숫자가 떴다.
[54번 권리 검증 시작]
[예상 추가 차입 취소]
[공동 정산 총 노출액 감소: 30,000,000원]
“삼천만 원이 줄었어!” 준성이 외쳤다.
“잠깐.” 민석이 말했다. “그분 실제 빚이 없어졌다는 건 아니야. 새로 생길 뻔한 차입만 기록에서 빠진 거지.”
서윤은 원장 숫자 대신 은재에게 받은 서류를 다시 살폈다.
“이건 기사로 써도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겠어요. 장부의 예고를 갚아야 할 돈으로 믿지 말라는 이야기요.”
“실명은 제외해 주세요.” 민석이 말했다.
세린은 민석을 바라봤다. “원장 때문에 달라진 건 숫자가 아니라 태도군요. 처음에는 당신도 백억 원을 자기 돈인 것처럼 생각했잖아요.”
민석은 부정하지 않았다. 그때 자신은 어머니의 빚을 한 번에 갚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누군가의 내일을 담보로 한 돈일지 모른다는 사실은 나중에야 알았다.
같은 날 오후, 세린이 준비한 법률 검토 의견서 초안이 완성됐다. 서윤은 초안에 적힌 표현 중 하나를 가리켰다.
“‘모든 채권은 무효’라고 읽힐 수도 있어요.”
“그래서는 안 되죠.” 세린이 바로 문장을 고쳤다. “원장에서 확정됐다고 표시된 미확정 청구를 검증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어야 합니다.”
준성이 계산기 화면을 띄웠다. 중복 가능성이 있는 항목을 단순히 하나만 남기는 경우, 상당한 금액이 줄어들었다. 하지만 민석은 그 결과에 선을 그었다.
“이건 가설이야. 원본 채권끼리 실제로 독립적인 계약일 가능성도 있어. 아무것도 확인하기 전에 원장에서 빼자고 할 수는 없어.”
“예전에는 이렇게까지 신중하지 않았는데.” 준성이 말했다.
“예전에는 내가 버튼 누르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준성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러다 조심스럽게 말했다.
“사실 운영진이 좋아한 건 네 그런 성격이었어. 검증을 지독하게 했으니까. 네가 검사한 장부라고 말하면 투자자들이 안심할 거라고 생각했지.”
“그럼 내 이름이 상품에 쓰였어?”
“그럴 가능성이 있어. 내가 본 자료에는 네 검증 결과를 강조한 문구가 있었어.”
민석은 어이없어 웃었다. 대학생의 이름으로 거대한 프로젝트를 믿게 만들었다니. 그 과정에서 자신도 뭔가 잘못한 것은 아닌지 두려웠다.
“그 자료도 찾아.”
“알았어.”
그는 친구를 잠시 바라보다가 덧붙였다.
“찾으면 네가 보기 좋은 부분만 보여 주지 마.”
“그렇게 할게.”
사무실 복도 끝에서는 프린터가 보고서를 뱉고 있었다. 민석은 매일 회사에서 보던 광경이 이제 낯설지 않았다. 종이에 찍힌 숫자가 제대로 이해되고 검증된다면 그 자체로 위험한 것은 아니었다. 위험한 것은 권한을 가진 사람이 숫자 뒤에 서 있는 사람을 지워 버리는 순간이었다.
오후 세 시, 보관 업체에서 문자가 왔다. 원본으로 추정되는 봉인 상자가 배송 경로에 등록됐다는 내용이었다. 발신인은 과거 청산 관리인이었다. 세린은 업체에 전화해 정식 수령 절차를 확인했다.
“참 이상하네요.” 담당자가 말했다. “서류 등록번호는 2016년 접수 장부에 있는데, 실제 봉인은 오늘 처음 스캔됐어요. 저희도 조사 중입니다.”
“상자를 개봉하기 전에 봉인 상태를 기록해 주세요.” 세린이 요청했다. “관계자 입회도 신청하겠습니다.”
세린은 휴대전화로 보관 업체의 공식 문자 발신 번호를 확인했다. 그 문자에 배송 번호가 들어 있긴 했지만, 업체가 서류를 배달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원본이 진짜임을 보장하지는 않았다. 담당자는 봉인 테이프를 열기 전 사진을 남기고 열람자 명단을 작성하겠다고 했다.
“왜 이렇게 절차가 많죠?” 민석이 물었다.
“누군가 나중에 '몰래 바꿔치기했다'고 주장할 수 있으니까요. 우리가 지금 해야 할 일은 상대방이 누구든 같은 방식으로 검사할 수 있게 만드는 겁니다.”
민석은 평소라면 답답하게 느껴졌을 절차가 오히려 믿음직하다고 생각했다. 원장의 열 분짜리 선택지에는 그런 시간이 없었다. 그곳에서는 서류를 읽을 시간이 곧 비용이었다.
“서문재가 오늘 안에 상자를 열라고 요구할까요?”
“그럴 수 있죠. 하지만 우리가 시간을 빼앗길 의무는 없습니다.”
준성이 씁쓸하게 웃었다. “그 사람은 기다리는 사람이 가장 먼저 진다고 말했어.”
민석이 대답했다. “지금은 기다렸기 때문에 원본을 볼 수 있게 됐잖아.”
잠시 세 사람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틀리지 않는 예언보다 틀릴 수 있는 자료를 검토하는 시간이 더 낫다는 사실을 모두가 조금씩 받아들이고 있었다.
민석은 책상 위의 다섯 번째 빈 봉투를 바라봤다. 연락이 끊긴 피해자가 남긴 공백이 마음에 걸렸다. 그런데 빈 봉투 뒷면에 처음 보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413.
“이건 누가 쓴 겁니까?”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분명 아침에는 없던 숫자였다. 세린은 봉투를 만지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그 순간 봉투 안에서 휴대전화 진동과 같은 짧은 소리가 났다.
봉투를 들어 빛에 비추자 안쪽에 종이 한 장이 생겨 있었다.
[413번 참가자: 서문재]
[상태: 신원 확인 요청]
민석은 준성을 돌아봤다.
“서문재가 참가자라고?”
준성의 입술이 하얗게 질렸다.
“그 사람은 원장을 만든 쪽이야. 참가자가 될 리 없어.”
민석은 떨리는 손을 가라앉히며 말했다.
“그럼 누군가 원장을 만든 사람까지 이 장부에 묶어 버렸다는 뜻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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