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점 문을 닫는 시간은 저녁 아홉 시였다. 윤미정은 손님이 없는 걸 확인하고 블라인드를 내렸다. 그사이 민석은 영상 재생을 멈춘 채 화면을 바라봤다.
“원본은 내일 도착해.”
십 년 전 준성이 말한 그 문장은 우스갯소리처럼 들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일어난 일들을 생각하면 단순한 농담으로 넘기기 어려웠다.
“이 영상 정말 네가 찍은 거야?” 민석이 물었다.
준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교수님이 연구 기록을 남기라고 하셨어. 그때는 네가 한 달 동안 대조한 자료를 서문재가 통째로 바꿔 끼운 걸 알았지. 넌 회의장에서 바로 따졌고.”
“내가?”
“그날 이후 네 기록이 순서대로 흐려지기 시작했어. 처음에는 이름 하나를 잊더니, 나중에는 우리가 같이 일했다는 사실까지 잊었지.”
“그래서 넌 그냥 내버려 뒀어?”
준성이 말없이 시선을 내렸다. 화를 내는 것보다 그 침묵이 더 납득되지 않았다.
서윤은 둘 사이에 끼어들지 않았다. 대신 영상의 메타데이터를 확인했다. 파일 생성 시각이 2016년이라고 해서 그때 촬영됐다고 증명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동영상에 등장하는 회의실, 당시 사용하던 노트북, 참석자의 얼굴은 종이 명단과 대조할 수 있었다.
“증거로 쓰기 전에 원본 장치와 이관 과정을 확인해야 해요. 영상이 진짜여도 중간에 편집되면 반박당합니다.”
“교수님이 원래 쓰던 카메라가 있을까요?” 민석이 물었다.
미정이 서랍을 열었다. “아버지가 카메라를 버리셨다는 기억은 없어요. 다만 오래된 집 창고를 정리하면서 동생이 가져갔을 수도 있어요. 내일 연락해 볼게요.”
준성이 손목의 낡은 가죽 시계를 벗었다. 그 아래에는 작고 흐릿한 화상 자국이 있었다.
“그날 서문재가 서류를 소각했어. 내가 한 장을 꺼내다가 이렇게 됐고.”
“영상에 보이는 피는?”
“종이 가장자리에 손을 베었어. 네가 말렸지. 증거가 중요하지 손가락이 중요하냐면서.”
“그런 말을 했다고?”
“맞아. 네 성격은 원래 그랬어.”
민석은 듣고 싶은 답을 이미 알고 있는 듯 말하는 친구가 싫었다. 그가 믿을 수 있는 건 자기 기억뿐이었는데, 그 기억조차 온전하지 않았다.
영상의 마지막 몇 초를 다시 재생하자 화면 바깥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윤 교수의 목소리로 추정됐다.
“미래 원본이라는 말을 기록에 남기지 말게. 사람들은 마술로 생각할 거야. 그 대신 배송 접수증을 남기게.”
화면은 거기서 끝났다.
“배송 접수증?” 서윤이 고개를 들었다. “미래에 올 문서를 택배처럼 받았다는 거예요?”
준성은 USB의 다른 폴더를 열었다. 스캔본 한 장이 나타났다. 물품명 '정산 전표 원본', 접수일 2016년 10월 25일, 예정 도착일 2026년 10월 27일.
민석은 시각을 확인했다. 내일이었다.
“십 년 배송 계약이라도 맺었단 말이야?”
“그게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표현이었어. 원장에서는 미래에 작성한 기록이 과거의 접수번호를 갖고 도착하거든.”
“그럼 배송 회사가 실제로 존재했어?”
“있었어. 지금도 있어. 다만 이 영수증 번호를 조회하면 발송인 정보가 비어.”
서윤은 바로 업체 이름과 고객센터를 찾아 공개된 보관 기간부터 확인했다. 접수증이 위조됐을 가능성도 적지 않았다. 그녀는 단정하지 않았다.
서윤은 택시를 기다리며 영상 속 회의 테이블을 다시 확대했다. 참석자들이 사용한 수첩과 컵의 위치는 촬영 내내 일관됐다. 다만 영상은 두 군데에서 끊겼다. 누군가 파일을 편집했을 수도 있고 오래된 카메라가 촬영을 멈췄을 수도 있었다.
“이게 진짜라는 사실보다 왜 끊겼는지가 중요하겠어요.” 서윤이 말했다.
준성은 한 장면에서 재생을 멈췄다. 문재가 화이트보드에 적어 놓은 두 줄이었다.
'개별 동의: 심사 지연 18일'
'대표 동의: 즉시 상품화 가능'
민석은 숫자를 바라봤다. 18일이라는 말은 누군가 계산해 만든 근거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 아래에는 심사 지연이 고객에게 실제로 어떤 위험을 만드는지 설명이 없었다. 속도가 빠른 상품이 항상 좋은 상품은 아니었다.
“한빛자산신탁은 왜 급했어?”
“그때 해외 투자사에 사업을 넘기는 이야기가 있었어.” 준성이 말했다. “시연 날짜가 정해졌는데 모델이 아직 사람들의 권리를 제대로 분류하지 못했지.”
“그래서 동의 절차를 없앤 거야?”
“문재는 동의가 아니라 예측 결과의 확인이라고 설명했어. 우리는 그 말을 믿었고.”
서윤이 물었다. “그 투자사가 누구였습니까?”
“영어 이니셜로만 기억나. 계약서에 적혔을 거야. 그때 기록 중 남은 게 있으면 찾아볼게.”
민석은 영문 세 글자로 시작된 프로젝트가 십 년 뒤 사백열세 명을 묶었다는 사실에 서늘함을 느꼈다. 투자가 위험하다는 말은 늘 들었지만 투자 계약을 성사시키기 위해 위험을 다른 사람에게 넘겼다는 이야기는 달랐다.
서윤은 말을 이어갔다.
“녹화 장소의 주소를 확인하죠. 건물이 남아 있다면 대관 기록이나 관리 회사 자료를 찾아볼 수 있어요.”
“아직 남아 있어요.” 준성이 말했다. “한빛자산신탁 본사는 없어졌지만 회의실 건물은 다른 회사가 쓰고 있어.”
민석은 그 주소를 노트에 적었다. 원장을 따라다니다 보면 만질 수 없는 미래만 잔뜩 남았다. 오늘은 만질 수 있는 벽과 바닥이 있는 장소를 하나 찾았다. 거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확인하는 편이 훨씬 나았다.
밖으로 나왔을 때 거리는 이미 어두웠다. 민석은 휴대전화에 뜬 일조 원을 다시 확인했다. 숫자는 여전히 커다랗게 남아 있었지만, 총 노출액이라는 설명이 생긴 뒤로 공포의 종류가 달라졌다. 이제 그 숫자는 검증할 대상이었다.
서윤에게 메일이 하나 도착했다. 발신인은 ‘관리인 4번’이었다.
제목은 '원본 도착 시각 안내'. 본문에는 문장 세 줄이 있었다.
'예정 수취인 강민석. 본인 수령을 거부할 수 있음. 다만 미수령 전표는 증빙 부재로 판단되지 않음.'
“이것도 함정이네요.” 민석이 말했다. “받으면 계약에 동의했다고 주장할 수 있고, 안 받으면 증거가 사라져요.”
준성이 고개를 저었다. “수령과 수락은 구분해야 해. 그런데 그 사람들이 계속 둘을 같은 버튼에 넣어 놔.”
민석은 메일에 답장을 적었다. 수령은 검증을 위한 것이며 계약 이행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문장이었다. 서윤은 그 문장을 서명한 종이로 따로 남겨 두자고 했다.
민석은 집으로 가는 길에 오래된 녹화 영상을 다시 떠올렸다. 젊은 자신은 무서운 줄도 모르고 회의실에서 계약서의 문제를 지적했다. 지금의 그는 손에 쥔 서류를 읽을 때마다 몇 번이고 그 내용을 의심했다. 열정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대가가 무엇인지 조금 더 알게 된 것이었다.
“그날 회의가 끝나고 무슨 일이 있었어?” 민석이 물었다.
준성은 걸음을 늦췄다.
“네가 원본 목록을 들고 나왔어. 회사 사람들이 돌려 달라고 했는데 거절했지. 그다음 날 너를 찾아갔을 때, 네가 내 이름도 잘 기억하지 못했어.”
“병원엔 갔어?”
“갔어. 검사에서 특별한 문제는 발견되지 않았어. 그래서 내 책임이라고 생각했지. 네가 그 프로젝트와 멀어지는 게 낫겠다고.”
“그래서 아무 말도 안 했고?”
“맞아.”
민석은 잠시 화가 치밀었다. 친구가 자신을 보호한다는 핑계로 선택권을 빼앗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원장이 벌이고 있는 일과 닮아 있었다.
“너도 내 대신 판단했네.”
준성은 아무 변명도 하지 않았다.
“그래. 그건 내 잘못이야.”
“지금이라도 다 말해 줘. 다 기억하지 못하면, 뭐가 확실하고 뭐가 추측인지 구분해서.”
준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걸음을 다시 옮겼다.
서윤은 두 사람보다 조금 뒤에서 따라왔다. 그녀는 준성의 사과를 취재 자료에 적지 않았다. 사건을 조사하는 데 필요한 것은 미안하다는 말보다 당시 문서의 위치와 서명 권한, 누가 어떤 지시를 내렸는지였다. 하지만 사람 사이에 다시 작은 대화가 시작됐다는 사실은 적어도 사건을 끝까지 추적할 힘이 될 것 같았다.
사무소가 있는 건물 앞에는 비둘기 두 마리가 빗물 웅덩이 옆에 서 있었다. 민석은 생각했다. 미래에서 온 원본이 실제로 나타난다면 세상은 뒤집힐 것이다. 그러나 증거를 받아야 하는 지금도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은 다르지 않다. 누가 언제 작성했는지, 왜 그 사람의 권리를 침해하는지, 책임을 질 수 있는 거래인지. 낯선 미래 앞에서 오히려 오래된 원칙이 또렷해지고 있었다.
서윤은 사무소 문을 열기 전에 전화를 한 통 더 걸었다. 도현이 생전에 취재를 도왔던 동료 기자였다. 그 동료는 당시 취재 수첩에 '미래 원본'이라는 단어를 적어 놓았다고 했다.
“무슨 뜻인지 몰라서 기사에서는 뺐어요.” 수화기 너머 남자가 말했다. “그 친구가 갑자기 이상한 말을 해서 걱정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무언가 보였던 것 같아요.”
“그 수첩을 확인할 수 있습니까?” 서윤이 물었다.
“원본은 제가 가지고 있어요. 다만 취재원이 준 자료라서 이름은 가리고 보여 드리겠습니다.”
서윤은 통화를 끝내고 민석에게 말했다.
“이게 도현 씨의 사망 원인까지 설명해 주진 않아요. 하지만 그가 죽기 전에 비슷한 말을 했다는 독립된 기록은 될 수 있어요.”
“사람이 죽기 전에 남긴 말을 우리가 제대로 읽고 있는지도 모르겠네요.”
서윤은 잠시 민석을 바라봤다.
“그래서 지금 함부로 결론 내리지 않으려는 거예요. 사람들은 죽은 사람에게서 듣고 싶은 말만 골라 들을 수 있으니까.”
민석은 그 말이 아팠다. 자신도 도현의 경고를 곧바로 서문재를 무너뜨릴 열쇠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경고가 누구를 향한 것인지 아직 알지 못했다. 그들이 정말 원하는 진실은 복수할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을 방법이었다.
그날 밤 세 사람은 서점에서 가까운 작은 법률사무소를 찾았다. 서윤이 전에 금융사기 취재를 하며 알게 된 오세린 변호사가 있었다. 세린은 자료를 찬찬히 보더니 가장 먼저 물었다.
“원장을 실제 은행 계좌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서문재라는 남자가 그랬습니다.”
“계좌 존재와 계약 유효성을 각각 입증하라고 하세요. 채권자 확인 없는 집단적 채무 인수도, 남의 이름으로 된 보증도 그 자체로 효력이 생기진 않아요. 이 낯선 앱은 법원에 신청서를 대신 내 주지 않습니다.”
세린은 설명을 마치고 덧붙였다.
“그런데 이 자료에 제가 아는 판례가 있어요. 한빛자산신탁 사건 중 공개되지 않았던 합의 부속서. 그건 당시 기록에 있었을 수가 없는데.”
“왜요?”
“그 합의는 내일 오전에야 법원에 제출될 예정이거든요.”
민석은 고개를 들었다. 미래의 합의 부속서가 십 년 전 배송 접수증과 한자리에 나타났다. 누군가 내일 일어날 일을 이미 거래에 반영하고 있었다.
세린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문서 보관 업체에 바로 보존 통지를 보냅시다. 오늘 밤에 없어질 수 있는 건 미래가 아니라 현재의 증거입니다.”
그 순간 민석의 원장에 작은 알림이 떴다.
[증거 보존 시도 감지]
[대체 원본 작성 개시]
원장은 누가 내일을 바꾸려 하는지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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