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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내 통장에 내일의 돈이 입금된다 · 13화
PAYLUA ORIGINAL · 제13화

13화. 마지막 장에 남은 사람들

내 통장에 내일의 돈이 입금된다 · 5,497자

오프라인 책장
윤미정의 서점은 오래된 주택가 골목에 있었다. 비가 내린 뒤 젖은 벽돌 담이 오후 햇빛을 받아 어둡게 빛났다. 출입문을 밀자 작은 종이 울렸다. 커피 향 대신 오래된 종이와 나무 냄새가 났다. “한서윤 기자님?” 책장 사이에서 나온 여자는 마흔 후반쯤 되어 보였다. 앞치마 주머니에 볼펜 세 자루가 꽂혀 있었다. 서윤은 기자증을 보여 주고 취재 목적과 기록 보관 방식을 다시 설명했다. 미정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소설 같아서 처음엔 안 믿었어요. 하지만 보이는 건 보이니까요.” 카운터 아래에서 꺼낸 책은 검은색 헝겊 표지로 제본되어 있었다. 제목은 《신탁과 미래의 가격》. 십 년 전 발행된 학술 자료집이었다. 민석은 출판사와 발행 연도부터 확인했다. 표지 뒤에는 정가 칠만 사천 원이라는 스티커가 남아 있었다. “이 책을 아버지가 구입하셨어요.” 미정이 말했다. “경제학 교수셨는데, 돌아가신 뒤 제가 이 서점을 맡았어요.” “아버님 성함을 여쭤봐도 될까요?” “윤상필이요.” 준성의 표정이 달라졌다. “한빛자산신탁 연구 자문위원 윤상필 교수?” “맞아요. 아세요?” “이름만요.” 준성은 대답한 뒤 입을 다물었다. 민석은 책을 펼쳤다. 책갈피처럼 끼워진 메모 한 장이 마지막 장 사이에 있었다. 미정은 그것이 자기 아버지 필체라고 했다. 펜으로 적힌 문장은 간단했다. '원금은 시각을 건너지 않는다. 건너가는 것은 지급 청구의 순서뿐이다.' 마지막 장에는 낯선 표가 찍혀 있었다. 본래 인쇄된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 앞뒤를 살피니 종이 색이 조금 달랐다. 뒷면에는 청색 잉크로 찍힌 접수 번호가 남아 있었다. [HBT-2016-07 관련 채권 검토 명세] [원장 참여자 1차 분류] 표에는 사람 이름 대신 네 자리 번호가 나열되어 있었다. 그중 207번 옆에는 윤미정, 그 위에는 정도현이라는 이름이 손글씨로 적혀 있었다. “도현 씨도 이 책을 본 적이 있군요.” 서윤이 말했다. “저는 그분을 모릅니다.” 미정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이름을 오늘 처음 봤어요.” “누가 마지막 장에 글씨를 썼는지는 아직 확인할 수 없어요.” 민석이 말했다. “미래 앱처럼 책도 저절로 바뀌는 건지, 누군가 종이를 끼워 넣은 건지부터 구분해야 합니다.” 그는 휴대전화로 사진을 찍었다. 이번에는 글씨가 온전히 찍혔다. 서윤도 동의를 받고 촬영했다. 사진에는 오늘의 실제 사물이 남았다. 이 사실이 희미한 희망이었다. 민석은 명세표의 금액들을 더하기 시작했다. 첫 줄에는 백억 원의 원본 채권이 있었다. 둘째 줄에는 이를 담보로 한 청구권, 셋째 줄에는 그 청구권의 지급 실패에 대비한 보증이 있었다. 각 항목은 서로 다른 금액으로 기록됐지만 채권 코드는 같았다. “세 개를 단순히 더하면 원금보다 커집니다.” 서윤이 물었다. “보증과 원금을 둘 다 빚으로 잡은 거예요?” “가능성은 있어요. 다만 실제 계약에 따라 별도 책임이 성립할 수 있으니까 지금 무조건 중복이라고 하면 안 돼요. 하지만 손실이 이미 발생했다는 표시는 틀렸죠. 서로 다른 조건이 모두 동시에 실행된다고 가정했으니까요.” 미정은 계산대를 정리하다가 질문했다. “그 말은 제 칠만 사천 원도 누군가 잃을 수 있었던 돈이라는 뜻인가요?” “예. 적어도 장부는 그렇게 기록했어요. 그런데 일어나지 않은 판매와 취소를 한 거래처럼 묶었죠.” “그럼 이런 예고를 믿고 행동하면….” “그 행동 때문에 예고에 적힌 사건이 실제로 생길 수도 있습니다.” 미정은 마지막 말을 곱씹었다. 서점이 조용해졌다. 바깥에서는 초등학생들이 운동화를 끌며 골목을 지나갔다. 서윤은 사진과 자료를 각각 분리해 저장했다. 출처가 다른 자료를 한 파일로 합치면 나중에 누가 무엇을 기록했는지 알기 어려워진다고 했다. 준성은 책의 원가와 제본 방식에 대해 묻고, 미정은 아버지가 책을 보관하던 서랍 위치까지 알려 주었다. 특별한 능력보다 그런 세부적인 사실이 중요해지는 순간이었다. “윤 교수님은 왜 이런 걸 연구하셨을까요?” 민석이 물었다. 미정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답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직전에 그러셨어요. '금융은 위험을 나누는 기술인데, 위험을 나눌 사람에게 물어보지 않으면 그건 기술이 아니라 폭력이다.' 저는 무슨 뜻인지 몰랐죠.” 준성이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민석은 그 얼굴을 보았다. 준성은 한빛자산신탁에 관해 다른 사람보다 훨씬 많이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알고 있는 양만큼 말하지 않았다. 미정은 책을 자신이 구매했을 때의 기억을 말했다. 사실 구매한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병원에 입원하기 전 직접 가져와 카운터 서랍에 넣었다고 했다. 책을 넘겨보면 뒤쪽에 작은 종이가 끼워져 있으니 함부로 버리지 말라고 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아버지가 자주 하시던 농담인 줄 알았어요. 세상에서 가장 비싼 책이라고 하셨거든요. 정가가 칠만 사천 원인데 뭐가 그렇게 비싼가 싶었죠.” 민석은 책장을 다시 덮었다. 책 한 권의 가격과 그 안에 든 진실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윤상필 교수님은 가족에게 한빛자산신탁 이야기를 하셨나요?” 서윤이 물었다. “회사 이름은 몇 번 들었어요. 어떤 계산은 미래를 맞힌다고 해도 사람이 거기에 갇히면 안 된다고 하셨어요.” 준성이 입술을 다물었다. 미정이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버지가 당신 이름도 말씀하셨어요. 박준성 학생은 숫자를 잘 다루는데, 가끔 사람이 기다릴 시간을 잊어버린다고요.” 준성은 고개를 숙였다. 그동안 능숙하게 문서를 설명하던 얼굴에서 자신감이 사라졌다. “맞는 말씀이었어요.” “아버지는 당신을 나쁜 사람이라고 하진 않으셨어요.” “그건 교수님이 끝까지 나를 믿으려고 하셔서 그래요.” 민석은 그 대화를 들으면서 친구가 왜 자꾸 말끝을 흐리는지 조금 이해했다. 준성은 단순히 사실을 감춘 것이 아닐지도 몰랐다. 과거 자신의 선택이 누군가에게 해를 끼쳤다고 믿고 있는 듯했다. 서윤은 미정에게 더 묻지 않았다. 아버지의 죽음과 관련된 이야기를 취재용 질문으로 밀어붙이고 싶지 않았다. 대신 책의 수집 경위와 사진 사용 허락을 확인했고, 미정에게 추후 기사에 가족사를 담지 않을 수 있다는 선택권을 줬다. 미정은 한동안 생각하다가 말했다. “아버지가 여기까지 남겨 두신 건 언젠가 누가 사실을 확인하길 바라서였을 거예요. 그렇지만 기사 제목에 제 이름은 넣지 말아 주세요.” 서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민석은 책 표지의 헝겊이 닳은 자리를 손끝으로 만졌다. 돈을 버는 능력의 시작에서 그는 가격표만 봤다. 지금은 가격표 없는 것을 먼저 보려고 애쓰고 있었다. 서점 안쪽 창고에서 오래된 상자가 발견됐다. 윤 교수의 연구 자료였다. 미정이 봉투를 펼치니 복사된 계약서와 2016년 회의 참석자 명단이 나왔다. 서윤은 정식 촬영 허락을 받았다. 그리고 이름 사이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했다. “박준성. 당신 이름도 있네요.” 준성이 눈을 감았다. “연구 보조였어.” “그때 우린 대학생이었잖아.” 민석이 말했다. “그래. 너는 원본 대조 담당 아르바이트였고, 나는 시뮬레이션 자료를 정리했지.” “그런데 왜 난 아무것도 기억 못 하지?” “지워졌다고 생각했거든. 원장에 들어간 선택지가 현실에서 폐기되면, 그 기록과 연결된 기억도 흐려지는 사람이 있어. 정확한 이유는 나도 몰라.” 민석은 분노를 누르며 물었다. “그럼 너는 기억해?” “전부는 아니야. 나는 종이에 적어 놨으니까 남은 것뿐이야.” “왜 처음부터 말 안 했어?” 준성은 대답 대신 상자 속에서 작은 봉투를 찾아 꺼냈다. 봉투 모서리에 자신의 필체로 '본인 확인 이전 개봉 금지'라고 적혀 있었다. “네가 일곱 번 거절할 때까지 이걸 보여 줄 수 없었어. 서문재가 아니라 내 약속 때문이야.” “누구와 한 약속인데?” “너.” 민석은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나?” 준성이 봉투를 건넸다. 그 안에는 오래된 USB 저장장치와 종이 한 장이 들어 있었다. 종이에는 작은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다섯 번째 거절 이후, 기억을 잃은 나에게: 숫자를 계산하기 전에 사람을 확인하라. 특히 준성을 믿지 마라. 다만 준성이 가진 원본은 반드시 보라.' 맨 아래는 분명 자신의 필체였다. 민석은 서명을 손가락으로 더듬었다. 낡은 잉크는 종이에 깊게 스며 있었다. “너를 믿지 말라는데?” 준성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지. 나를 믿지 마. 이걸 확인해.” 준성은 민석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민석이 한 번 더 물었다. “네가 믿지 말아야 할 사람이란 건 무슨 뜻이야?” “내가 그때 네 편을 끝까지 들지 않았다는 뜻이야.” “구체적으로.” “네가 원본 채권 대조표를 세상에 공개하겠다고 할 때, 나는 회사가 제시한 비밀유지 계약에 서명했어. 앞으로 프로젝트에서 정식 연구원이 되게 해 주겠다고 했거든. 장학금도 걸려 있었고.” 민석은 말문이 막혔다. 십 년 전의 둘은 돈이 없었다. 월세를 맞추기 위해 야간 아르바이트까지 뛰던 시절이었다. 그 상황에서 연구원 자리는 준성에게 인생을 바꿀 기회였을 것이다. 그렇다고 친구를 속인 일을 가볍게 볼 수는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왜 도와주는 거야?” “내가 서명한 문서가 사람들의 동의를 대신했다는 걸 나중에 알았어. 도현이 그 사실을 찾아냈고. 그가 죽은 뒤엔 더 못 모른 척하겠더라.” 서윤이 물었다. “도현 씨를 마지막으로 만난 날은 언제였습니까?” 준성은 날짜를 말했다. 서윤이 갖고 있던 취재 메모와 하루 차이가 났다. 준성은 곧 자신이 시간대를 잘못 기억했을 수도 있다고 했다. 진실을 찾겠다는 사람에게 여전히 애매한 기억이 남아 있었다. “준성 씨, 나중에 진술서를 따로 작성해 주세요. 기억나지 않는 건 기억나지 않는다고 적어도 됩니다.” 서윤이 말했다. 준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민석은 그를 용서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용서도 아직은 증빙이 필요한 감정 같았다. 대신 USB를 검증하는 작업에는 함께하겠다고 했다. 준성이 비밀유지 계약으로 잃은 것이 과거뿐인지, 지금도 계약에 묶여 있는지도 확인해야 했다. USB는 인터넷이 연결되지 않은 서점의 오래된 노트북에서 읽었다. 파일 하나가 있었다. 이름은 '공동 정산 413인 - 원본 대조 결과'. 수정 시각은 2016년이었다. 안에는 영상이 들어 있었다. 녹화 화면 속 회의실에 스물셋쯤 되어 보이는 민석이 앉아 있었다. 그 옆에는 젊은 준성이 있었다. 맞은편 남자의 오른쪽 손목에서 은색 시계가 반짝였다. 영상 속 민석이 말했다. “사백열세 명 중 계약 내용을 충분히 설명받았다고 답한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그때 서문재가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 “설명받지 않았다는 증거가 어디 있습니까?” 젊은 민석은 장부를 닫았다. “없다고 동의한 건 아닙니다.” 화면이 잠시 흔들렸다. 이어서 녹화 날짜가 나타났다. 2016년 10월 25일. 민석은 입술을 깨물었다. 십 년 전의 자신은 이미 지금과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영상 마지막 장면에서, 젊은 준성이 카메라를 향해 손을 들었다. 그의 손에는 피가 묻은 서류 한 장이 있었다. “이건 원본이 아니야.” 준성이 화면 속에서 말했다. “원본은 내일 도착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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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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