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오전 열 시, 금융거래 확인을 위한 공동 회의가 열렸다. 은행 관계자는 법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거래 사실만 알려 주겠다고 먼저 선을 그었다. 외부업체의 계좌나 다른 사람의 자금 내역을 마음대로 공개할 수는 없었다.
강민석은 천만 원의 거래 내역을 화면에 띄웠다. 자신에게 실제로 입금된 날짜와 금액, 확인 요청 접수번호가 표시돼 있었다. 그 옆에는 검은 원장에서 추출한 '원본 보호 해제 예정' 알림을 따로 놓았다.
“저는 돈을 받고 동의한 적이 없습니다.”
“그 점을 명확히 기록하겠습니다.” 은행 담당자가 말했다. “다만 상대 기관이 어떤 계약을 주장하는지는 검토가 필요합니다.”
세린은 자금 반환이나 보관과 별개로 지급 정보가 사용된 곳에 정정 통지와 보존 요청을 진행하자고 제안했다. 잘못된 정보를 근거로 제3자의 권리가 행사되고 있다면, 당사자의 의사가 확인되기 전까지 그 사실을 일단 문제로 표시할 수 있는 절차가 필요했다.
민석은 창가에서 잠시 전화를 받았다. 어머니였다. 평소엔 주말에 전화하던 사람이 평일 낮에 전화를 건 것이다. 그는 복잡한 상황을 다 이야기할 수 없어 밥은 먹었느냐는 질문에 짧게 대답했다.
“힘든 일 있는 것 같아서.” 어머니가 말했다.
“있기는 한데, 지금은 내가 풀 수 있는 것부터 풀고 있어.”
“돈 때문에?”
민석은 창밖을 보았다. 거액의 숫자가 자신을 끌고 다니던 때가 있었다. 그때는 돈 때문이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돈도 있지만 사람 때문에.”
통화를 끝낸 그는 회의실로 돌아왔다. 복도를 지나던 직원들이 종이컵을 든 채 사소한 이야기를 나눴다. 한 사람에게 내일은 월급날일 것이고 다른 사람에게는 병원 예약일 것이다. 이들의 내일을 한 줄의 숫자로 묶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서문재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외부 거래처였다. 그는 통화를 끝내고 회의실에 돌아와 메모를 보여 줬다.
“거래 검증 자료를 오늘 오후에 갱신한답니다. 2018년 파일의 '보류' 항목을 모두 정리할 계획이라고 해요.”
“정리라는 게 무슨 뜻입니까?” 예린이 물었다.
“확인되지 않은 항목을 오래된 오류로 처리하겠다고요.”
민석은 벌떡 일어났다. “증거를 지운다는 겁니까?”
세린이 그를 앉혔다. “실제로 삭제한다는 뜻인지는 확인해야 합니다. 우선 현재 자료의 보존을 요청하죠.”
예린과 유정호는 마지막으로 확보한 시스템 해시와 버전 이력을 정리했다. 적법하게 접근할 수 있는 자료에 한해 변경 전 상태를 증명할 수 있도록 했다. 외부 서버를 무단으로 들여다보거나 접속 권한을 우회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 멈춰야 할 것은 데이터 전체가 아니라, 확인되지 않은 동의를 사실로 취급하는 과정이었다.
오후 한 시. 한서윤은 기자로서 공개된 사실을 정리하는 기사를 냈다. 개별 피해자의 실명은 없었다. 제목은 간단했다.
‘지급 완료가 아닌데 완료가 된 기록들’.
보도가 나간 뒤 이메일은 예상보다 조용했다. 사람들은 100억 원이나 1,000억 원이 등장할 때만큼 열광하지 않았다. 누군가의 확인란이 잘못 눌린 사건은 숫자로 보면 작아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사자들에게는 다른 의미였다. 문정아는 업무시간을 쪼개 담당 기관에 연락할 수 있게 되었고, 백소희는 자신에게 없는 입금 내역을 증명하라는 요구 대신 기관의 기록 확인 요청서를 받을 수 있었다. 이하은은 이름을 밝히지 않고 정정 상황을 확인할 경로를 안내받았다.
민석은 그들의 서로 다른 요구를 메모했다. 모두에게 같은 해결책을 강요하지 않는 것이 공동 정산을 다시 시작하지 않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오후 세 시 사십 분, 외부 거래처가 정정 보존 요청을 접수했다는 회신을 보냈다. 자료 사용이 즉시 모두 중단된다는 보장은 없었다. 그러나 최소한 그들이 문제를 알았다는 사실이 문서로 남았다.
바로 그때 검은 원장에서 알림이 울렸다.
[원본 관리 상태: 보호 검증 중]
[기존 지급 완료 요약 데이터: 사용처 11곳]
[검증 전환 예정 시각: 2027.01.16 09:17]
“내일 아침이네.” 민석이 말했다.
예린은 화면을 보았다. “이 숫자 열한 곳은 원장 주장일 뿐입니다. 실제 전송 내역과 대조해야 해요. 그런데 시간이 적혀 있다는 건 누군가 이 시간에 판단하도록 우리를 몰아가려는 신호일 수 있습니다.”
민석은 오후 내내 기다리던 답을 다시 물었다.
“그럼 내일 아침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뭡니까?”
“할 수 없는 일도 정해 둬야죠.” 세린이 답했다. “누가 다급하다고 해서 확인하지 못한 동의에 대신 서명하는 일.”
밤 열한 시. 민석에게 짧은 메시지가 도착했다.
‘내일 아홉 시 십칠 분에 한 사람을 지워야 열한 곳의 기록이 멈춥니다.’
발신자에는 익숙한 이름이 적혀 있었다.
2036년 강민석.
민석은 메시지를 보존한 뒤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누군가를 지워야 누군가를 구한다는 말. 십 년 전부터 그들이 반복해 온 가장 나쁜 계산이었다.
제158화 댓글 0
댓글·공감·신고는 로그인 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전 익명 댓글은 그대로 표시됩니다.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