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7일 목요일 오전 아홉 시 십육 분.
강민석은 은행 상담실에서 시계를 보고 있었다. 이번에는 검은 원장이 아니라 실제 입금 알림을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이 미리 요청한 확인 절차가 있었고, 세린에게도 상황을 공유해 뒀다. 돈이 들어오지 않으면 그걸로 끝날까. 아니면 다른 사람 이름으로 또 지급 완료가 만들어질까.
아홉 시 십칠 분.
휴대전화가 짧게 울렸다.
[입금 10,000,000원]
[보낸 분: 원본반환정산]
민석은 손을 움켜쥐었다.
창구 너머의 벽에는 새해 금융사기 예방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처음 보는 송금인에게 돈을 돌려주겠다며 개인 계좌번호를 묻는 전화에 응하지 말라는 문구였다. 민석은 그것을 두 번 읽었다. 자신이 어제까지 뒤쫓던 숫자가 실제 돈이 되는 순간, 오히려 지켜야 할 규칙이 또렷해졌다.
손바닥에 땀이 차면서 어린 시절 어머니가 말하던 문장이 떠올랐다. 남의 돈이면 빨리 돌려줘야 한다고. 그 말 자체는 여전히 맞는 것 같았다. 그러나 누구에게 어떤 근거로 돌려줘야 하는지 모르면, 급한 선의가 또 다른 잘못이 될 수 있었다. 그는 상담실 의자에 등을 기대고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제가 직접 아는 사람에게 보내면 빨리 끝나겠죠?” 그는 창구 직원에게 물었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군요. 애초에 누가 권리자인지 모른다고 했으니까요.”
직원은 예외적인 표정을 지었다. 고객이 갑자기 들어온 큰돈을 쓰겠다는 것도, 돌려보내겠다는 것도 아닌 상황은 흔치 않았다. 직원은 확인에 필요한 접수 절차와 보존할 거래 내역을 다시 설명했다. 민석은 메모를 하다가 쓴웃음을 지었다. 돈을 벌기 위해 배운 은행 업무가 아니라, 돈을 함부로 쓰지 않기 위해 배우는 은행 업무였다. 이번에는 검은 원장이 아니었다. 실제 은행 앱의 거래 내역에 날짜와 금액이 찍혔다. 잔액도 변했다.
“입금됐습니다.”
창구 직원이 거래 내역을 확인했다. “해당 금액이 고객님 계좌에 입금 처리된 것은 맞습니다.”
“누가 보냈는지, 무슨 돈인지 바로 알 수 있습니까?”
“송금인 표시는 확인되지만, 송금의 정당한 원인이나 제삼자의 권리는 여기서 확정할 수 없습니다.”
민석은 현금 인출도 이체도 하지 않았다. 자동 출금되거나 다른 거래에 섞이지 않도록 자신의 계좌 관리 방법을 상담했고, 입금 목적 및 반환 방법을 확인하는 절차를 요청했다. 그가 원한 건 천만 원을 차지하는 일이 아니었다. 그 돈이 누군가의 동의를 대신하지 못하게 막는 일이었다.
세린에게 전화하자 그녀는 먼저 물었다. “은행이 실제 입금이라고 확인했습니까?”
“네.”
“그럼 이제 외부 업체가 누구의 어떤 근거로 보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임의로 보내지 마시고, 문서와 거래 기록을 보존하세요.”
“하은 씨에게도 알려야겠죠?”
“알릴 범위는 제가 당사자와 먼저 확인할게요. 그 돈이 바로 하은 씨의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민석은 전화를 끊고 입금액을 다시 보았다. 처음 능력을 얻었을 때 꿈꾸던 숫자와 다를 바 없었다. 손가락을 몇 번 움직이면 자기 생활을 크게 바꿀 수 있는 금액이었다. 오래된 자동차를 바꾸고, 밀린 대출을 갚고, 가족에게 여행을 선물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사고 싶었던 것들의 목록을 한 줄도 적지 않았다.
오전 열 시, 정태겸에게서 공식 회신이 도착했다. 송금 요청은 외부 정산대행사의 실행 요청이었고, 참조번호 0717과 연계된 ‘원본 반환 보상금’ 항목이 사용됐다. 정산대행사는 고객사에 지급 근거를 요청했으며 조사 결과가 나오기 전에는 동일 규칙을 통한 추가 지급을 보류하겠다고 했다. 원본 비공개 보호를 해제할 권한이 자신들에게 없다는 점도 함께 명시했다.
“그럼 보호 설정은 안 풀린 거죠?” 민석이 물었다.
유정호가 말했다. “우리가 확인한 현재 시스템에서는 자동 해제 호출이 거절됐습니다. 하지만 이전에 배포된 결과표가 남아 있으니 전체를 끝났다고 하면 안 됩니다.”
하은에게는 자신과 연결된 대리 지급 처리에 이의가 접수되고, 추가 사용 보류가 요청됐다는 통지만 전달됐다. 민석의 계좌 세부 내역을 알 필요는 없었다. 그녀는 답장을 보냈다.
‘제가 돈을 받았다고 쓰지만 말아 주세요. 제 몫이 실제로 있다면 정식으로 설명받고 싶습니다.’
민석은 메시지를 두 번 읽었다.
점심 이후, 서윤은 수십 년 전 자료를 확인한다는 것이 단순히 기록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느꼈다. 공개하면 피해를 줄일 수 있는 정보와, 공개하는 순간 다시 피해가 될 수 있는 정보가 엉켜 있었다. 그녀는 자기 기사에서 하은을 특정할 수 있는 직장, 나이, 가정사를 뺐다. 단지 본인의 비공개 요청이 지급 동의로 변환된 일이 있었다는 구조만 다뤘다.
“이 기사로 누가 처벌받을까요?” 민석이 물었다.
“기사가 처벌하는 건 아니죠. 관련 기관이 사실을 조사할 자료가 모이게 도울 수는 있겠지만요.”
민석은 그 말이 마음에 들었다. 세상에는 한 편의 기사로 끝낼 수 없는 일이 많았다.
오후 다섯 시, 은행은 입금된 천만 원과 관련한 확인 요청이 접수됐다고 안내했다. 정상적인 정정·반환 절차로 진행할 수 있는지 여부는 송금 기관의 회신과 필요한 확인을 거쳐 결정하기로 했다. 민석은 돈을 그대로 둔 채 기록을 정리했다.
그러고 나서 검은 원장을 열었다.
[천만 원 입금: 실제 확인]
[수취인 동의: 미확인]
[보호 설정 자동 해제: 실패]
이전과 달리 세 항목이 따로 적혀 있었다. 민석은 눈을 비볐다.
“이렇게 쓸 수 있었잖아.”
화면 맨 아래 작은 문장이 있었다.
[원본 검증 규칙 17 / 복구 중]
그때 처음 보는 발신 번호로 문자가 왔다.
‘지급을 돌려보내면 끝날 거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당신이 받은 건 돈이 아니라 열 해의 확인권입니다.’
민석은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발신자를 추정하지도 않았다. 메시지와 수신 시각을 보존하고 세린에게 전달했다.
그리고 단 하나는 확신했다. 이제 누군가가 실제 천만 원을 움직일 만큼 이 시스템의 과거를 지키려 한다는 사실이었다.
제149화 댓글 0
댓글·공감·신고는 로그인 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전 익명 댓글은 그대로 표시됩니다.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