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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내 통장에 내일의 돈이 입금된다 · 145화
PAYLUA ORIGINAL · 제145화

145화. 열 해 전의 서명

내 통장에 내일의 돈이 입금된다 · 2,767자

오프라인 책장
12월 31일 밤, 서울의 바람은 철제 난간을 흔들었다. 강민석은 옥상에서 도시의 불빛을 바라봤다. 곧 새해가 온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몇 달 사이 자신은 많은 숫자를 보았고, 어떤 것은 현실에서 맞았으며, 어떤 것은 원장 속 글자만 바뀌었다. 그럼에도 예고가 나타날 때마다 심장이 먼저 반응했다. 전화가 울렸다. 발신자는 박준성이었다. “2016년 자료에 네 서명이 하나 더 있어.” “내가 모르는 서명은 이제 그만 나와야 하는 거 아니냐?” “그렇게 말할 수 있으면 좋겠지. 이번엔 문서 사진 말고 원본 접수대장과 연결되는 기록이야. 내일 확인할 수 있게 보존 요청 넣었어.” 민석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자신이 과거에 무엇을 했는지 타인의 서류를 통해 알아가는 일은 우스웠다. 주인공이 아니라 자기 기억의 목격자를 구하는 사람 같았다. 다음 날, 2027년 1월 1일. 공휴일이라 기록 열람은 바로 이뤄지지 않았다. 윤혜라는 긴급 보존 대상과 공휴일에 할 수 없는 열람 절차를 구분해 안내했다. 사람들은 법보다 빨리 흘러가는 숫자에 익숙해져 있었지만, 그녀는 기록의 출처가 무너지면 무엇도 증명할 수 없다고 믿었다. “종이를 오늘 당장 꺼낼 수 없으면 기다려야죠.” 민석이 말했다. 서윤이 놀린 듯 웃었다. “몇 주 전 민석 씨가 그런 말을 했다면 전 안 믿었을 텐데.” “저도요.” 그들은 카페에서 2016년 민석의 근무표와 현재 확인 가능한 접수 일정을 맞춰 봤다. 10월 25일 오후 네 시 사십삼 분, 민석은 지원금 관련 임시 데이터 이관 업무를 맡고 있었다. 이전에는 그의 이름 옆에 ‘지급 승인 요청’이라는 단어만 보였다. 그러나 새로 찾은 접수대장 목차에는 ‘보호 당사자 자료 비공개 요청 접수’라는 항목이 있었다. “완전히 다른 업무네요.” 서윤이 말했다. “원래는 두 장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준성이 답했다. “보호 요청을 접수하고 지급을 보류하는 게 연속된 일이었을 테니까.” 하은은 집에서 그날의 이야기를 떠올리고 있었다. 그해 가을의 접수 창구는 낡은 지하 상가 안에 있었다. 인쇄소 옆이라 복사기가 돌아갈 때마다 종이 먼지 냄새가 났고, 번호표를 뽑는 사람들은 모두 서둘렀다. 하은은 교복 재킷을 손에 들고 줄을 섰다. 누군가 계속 어른을 데리고 오라고 했지만, 어머니는 야간 근무를 마치고 잠들어 있었다. 접수 직원 하나가 책상 밑에서 여분의 의자를 꺼내 주었다. 그가 자기 이름을 말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그가 '원하시면 나중에 결정하세요'라고 말했던 건 선명했다. 그때 하은은 생각했다. 어른이 되면 무슨 일이든 당장 결정해야 하는 줄 알았는데, 이 사람은 오늘 결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지금 돌아보면 그 역시 직원 한 명이었고 정해진 권한 이상을 약속할 수는 없었다. 그가 해 준 일은 그리 크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말한 '아직 받지 않았다'를 접수지에서 지우지 않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 작은 일이 남지 않았다면, 하은은 열 해 뒤 자기 이름을 찾으러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몰랐을 것이다. 공무원도 은행원도 아닌 젊은 계약직 직원이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이름은 가릴 수 있지만, 받지 않았다는 기록까지 지우면 나중에 아무도 믿어 주지 않을 수 있습니다.’ 당시 그녀는 그 말을 반쯤 이해했다. 다만 그 직원이 볼펜을 하나 건네며 무섭다면 읽기만 해도 된다고 했던 건 기억했다. 그 기억을 민석에게 바로 말하지 않은 건 이유가 있었다. 그는 자신을 구해 준 사람처럼 행동하지 않았다. 하은도 누군가를 은인으로 만들기 위해 이곳에 오지 않았다. 오후 다섯 시, 하은은 오래된 필통에서 파란 볼펜을 꺼냈다. 바래진 뚜껑에 작은 회사명이 인쇄돼 있었다. ‘서한문서관리’. 볼펜 아래 붙어 있던 스티커에는 ‘2016.10.25 / 16:43’이 적혀 있었다. 그녀는 사진을 찍었다가 삭제했다. 자신에게 소중한 물건이 다른 사람의 사건 자료가 되는 게 두려웠다. 그러다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그때 자신이 원했던 것은 이름을 지우는 것이지, 말을 없애는 것이었나. 그날 저녁 하은은 서윤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 사람, 십 년 전에 저를 본 것 같아요.” “강민석 씨요?” “네. 그런데 지금은 저를 기억하지 못하나 봐요.” 서윤은 전화기 너머로 한동안 숨을 고르다가 말했다. “그 기억을 민석 씨에게 알려줄지는 하은 씨가 정할 수 있어요. 먼저 기록과 대조할 수도 있고요.” “왜 기억 못 할까요?” “십 년 전 일을 전부 기억하는 사람은 드물죠. 더 중요한 건 지금 무슨 기록이 남아 있는가예요.” 하은은 볼펜을 손바닥 위에 놓았다. 십 년 전 그는 자신이 무엇을 확인했는지조차 알지 못했고, 열 해 뒤에는 천만 원을 먼저 보았다는 이유로 누군가를 대신 받아 줄 뻔했다. 한편 민석의 검은 원장에는 신년 첫날 새 메시지가 도착했다. [2016.10.25 16:43 / 서명 대조 요청] [대상: 강민석] [결과: 비공개 보호 유지] 그리고 이상한 문장이 붙었다. ‘네가 잊은 건 그 사람의 이름이지, 네가 했던 선택이 아니다.’ 발신자: 2036년 강민석. 민석은 한참 화면을 바라봤다. 이것은 자신을 위로하는 문장 같기도 했고, 십 년 전 접수 기록을 보고 누군가 만든 문장 같기도 했다. 휴대전화가 조용해질 무렵 하은에게서 짧은 문자가 도착했다. ‘저를 기억하지 못하셔도 괜찮습니다. 다만 그때 제가 받지 않았다는 말만은 기억해 주세요.’ 민석은 답장을 썼다. ‘기억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대신 그 기록을 확인하고 지키겠습니다.’ 새해 첫날, 그는 처음으로 확신 없는 대답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음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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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5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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