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본 보관인이라는 다섯 글자는 윤혜라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십 년 동안 기록을 다뤘지만 누군가의 돈을 대신 받을 자격을 가진 적은 없었다. 보관은 정보를 손상 없이 관리하는 일이지 소유권을 얻는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검은 원장의 한 줄은 그 두 역할을 마치 같은 것으로 적고 있었다.
새해를 하루 앞둔 오후, 세온기록관리의 회의실에서는 변호사와 기록관리사가 같은 단어를 두고 서로 다른 뜻을 말하고 있었다.
“우리가 가진 건 원본 자료와 접수 이력입니다.” 혜라가 말했다. “지급 계좌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보관인을 수취인으로 매핑했는지 확인해야겠죠.” 세린이 답했다. “확인 전에는 이 시스템에 어떤 계좌도 넘기지 않습니다.”
정태겸은 외부 거래처가 받은 화면 사본을 보여 줬다. ‘보관인 대체 지급’ 항목에 천만 원이 표시돼 있었다. 한쪽 작은 글씨에는 ‘지급 가능’이라고 적혀 있었고, 다른 화면에는 ‘지급 완료’라고 적혀 있었다. 어느 쪽도 은행 거래의 존재를 증명하지 못했다.
“그럼 금액은 어디서 나온 겁니까?” 민석이 물었다.
태겸은 회계 자료를 한 장 꺼냈다. “2016년에 미지급 분쟁에 대비해 보류한 기금의 일부를 2018년부터 ‘원본 반환 인센티브’라는 상품처럼 계산한 흔적이 있습니다. 열 해 동안 발생한 평가액이지만, 실제 현금으로 예치됐는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그 돈을 내 계좌로 보내면 내가 하은 씨의 동의까지 준 셈이 되는 거네요.”
“그렇게 표시하려는 설계가 보입니다. 그러나 민석 씨가 돈을 받는다고 하은 씨의 동의가 법적으로 생기는 건 아닙니다.” 세린의 말이었다.
“법적으로 생기지 않아도, 다른 회사는 생겼다고 읽죠.”
모두가 잠시 침묵했다. 그것이 이 사건의 가장 끈질긴 병이었다.
하은은 회의실 끝자리에 앉아 있었다.
회의가 시작되기 직전, 하은의 휴대전화로 부재중 전화가 세 통 와 있었다. 같은 번호였다. 목소리를 남긴 사람은 '보상금을 받으려면 전화로 신원만 확인하면 된다'고 했다. 연락한 회사명도, 어느 법률에 따른 절차인지도 말하지 않았다. 하은은 번호를 저장하지 않았고, 상대가 요구한 정보도 주지 않았다. 대신 문자와 통화 시각을 기록했다.
“내 이름을 가려 준다면서 왜 자꾸 내 이름을 말하래요?” 하은이 낮게 물었다.
세린은 고개를 들었다. “정식 통지가 왔는지부터 확인해야 합니다. 출처를 확인하지 않은 요청에 개인정보를 더 제공하지 마세요.”
“누가 저를 보호한다고 할 때마다 결국 제가 해야 할 일이 늘어나요.”
그 말에 민석은 아무런 위로도 하지 않았다. 자기에게는 버튼을 누르지 않는 선택지가 있었지만, 하은은 이미 전화를 받지 않는 것까지 설명해야 하는 처지였다. 그는 회의실 한쪽의 물병을 그녀 쪽으로 밀었다. 하은은 고맙다는 말 대신 컵에 물을 따랐다. 자신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남이 만든 숫자들을 공부해야 한다니 어처구니없었다. 그녀는 일을 쉬고 이곳에 왔고, 회사에는 가족 문제라고 말해 두었다. 마감이 밀린 업무를 생각하면 속이 타들어 갔다.
“제 이름을 다시 공개하지 않으면 이걸 막을 수 없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혜라가 말했다. “당사자 확인은 비공개로 하고, 외부에는 잘못된 규칙을 사용하지 말라고 알릴 수 있습니다.”
“그걸로 충분해요. 보상금을 달라고 온 게 아니라, 저를 받았다고 만들지 말라고 온 거니까.”
오후 세 시 십 분, 예린은 오래된 2016년 설계도를 칠판에 펼쳤다. 애초 보관인 계정에는 수취 권한이 없었고, 데이터를 되돌려 주는 행위의 확인 권한만 있었다. 그런데 2018년 변경표에서 ‘보관 확인’을 ‘보관인 지급 확인’으로 대체한 항목이 나타났다.
문재가 낮게 말했다. “이건 제가 승인한 효율화 문서 아래에 있네요.”
“누가 작성한 건지는 아직 모릅니다.” 유정호가 말했다. “버전 관리 기록에 작업자 계정이 남아 있어도 실제 작업자가 같다는 보장은 없어요. 접속 환경과 당시 결재를 함께 봐야 합니다.”
문재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서명을 했다는 건 적어도 검토할 책임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민석은 그 말을 받아 적었다. 책임을 인정하는 척하면서 범위를 흐리지 않는지 확인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문재의 목소리가 평범하게 들렸다. 사람이 아주 늦게서야 자기 문서의 뜻을 배울 수도 있었다.
해질 무렵 은행에서 공식 회신이 도착했다. 전날 오전 민석의 계좌에는 천만 원이 입금된 적이 없었고, 입금 취소 기록도 없었다. 다만 특정 외부업체가 별도 금융기관에 지급 요청 자료를 전달했는지는 그 은행에서 확인할 사안이었다.
민석은 답변을 하은에게 보여 줬다. 하은도 자신의 은행에서 실제 입금이 없었다는 확인을 받았다고 했다.
“두 통장 모두 돈이 안 들어왔는데, 지급 완료는 두 번이네요.” 하은이 말했다.
“맞아요.” 민석이 답했다. “그래서 이번엔 누가 돈을 받았는지만 찾지 않을 겁니다. 누가 지급 완료라는 말을 팔았는지 보려고요.”
그날 밤 원장은 천만 원 아래 새 문장을 띄웠다.
[원본 보관인 지급 실패]
[최종 대체 경로: 실명 확인 면제]
예린의 얼굴이 굳었다.
“이 경로는 원래 미성년자 보호를 위해 신원을 노출하지 않고 이의를 접수하게 만든 기능이에요.”
“그것도 뒤집힌 겁니까?”
“누군가 뒤집으려 하는 것 같아요.”
민석은 즉시 화면을 저장했다. 보호를 위해 만든 길이, 또 한 번 보호받을 사람을 지우는 길로 바뀌려 하고 있었다.
제144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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