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31일 목요일 오전.
박준성은 세온기록관리 회의실에 들어서자마자 칠판 한구석의 숫자를 지웠다.
전날 밤 민석은 준성에게 화를 냈다. '계좌 끝자리를 알아냈다'고 친구에게 메시지까지 보낸 뒤였기 때문이다. 준성은 전화를 끊지 않고 같은 말을 세 번 반복했다. 먼저 참조값인지 계좌인지 구분해야 한다고. 민석은 그 말이 자신을 무시하는 것처럼 들렸지만, 결국 밤새 문서 속 용어를 뒤졌다. 어릴 때부터 계산이 빠른 준성은 이상하게도 이번 사건에서는 아무 숫자도 빨리 믿지 않았다.
“너도 처음엔 내일 주가만 알면 큰돈 벌겠다고 했잖아.” 민석이 툭 내뱉었다.
“그래서 더 무서운 거야. 아직도 그런 생각이 들거든.”
두 사람은 잠시 마주 봤다. 서로가 어느 순간부터 의인이 된 척하는 게 싫었다. 돈에 흔들렸던 사람들끼리여서 오히려 상대의 흔들림이 보였다.
“칠판은 네 마음대로 지워도 돼.” 민석이 말했다. “근데 내 착각까지 없던 일로 만들진 말자.”
“그래.” 준성이 답했다. “여기에 적자. 0717을 계좌로 읽었던 건 우리다. 그리고 그게 틀렸을 수 있다.”
그들은 지운 자리 아래에 작은 글씨로 대조 이유까지 덧붙였다. 틀렸다는 사실을 기록하는 것이 처음으로 부끄럽지 않은 날이었다. 강민석이 써 놓은 ‘계좌 끝 네 자리 0717’이었다. 대신 그는 같은 자리에 ‘거래 참조 0717’이라고 썼다.
“이렇게 적어야 해. 끝자리라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계좌를 찾으려고 할 거고, 누군가의 개인정보를 달라고 할 거야.”
“원장이 끝 네 자리만 남았다고 했잖아.” 민석이 반박했다.
“그 원장이 은행 계좌라 했던가? 그건 우리가 읽은 방식이야.”
준성은 어제부터 성우데이터솔루션에 근무하던 시절의 자료를 하나씩 제출하고 있었다. 2018년 검토 보고서의 부속 표에는 ‘거래 참조 코드는 승인 화면에서 마스킹된 수취 계좌처럼 출력될 수 있음’이라는 주석이 있었다. 정식 담당자가 확인한 원본 사본과 부합한다는 회신도 받았다.
“왜 그걸 이제야 찾아냈어?”
“그땐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거든.”
준성의 대답은 비겁할 만큼 간단했다. 하지만 그는 변명하지 않았다. “같은 줄을 여러 번 봤으면서도 계좌라고 착각한 건 나도 마찬가지야.”
하은이 참석한 비공개 면담에서는 숫자보다 다른 것이 중요했다. 그녀가 가져온 2016년 접수증에는 ‘보호 대상 07 / 17번 확인’이라고 적혀 있었다. 0717은 은행의 숫자가 아니라 기록 두 개를 이어 붙인 참조값일 가능성이 있었다.
“제가 받은 접수증에는 이게 뭔지 설명이 없었어요.” 하은이 말했다. “직원이 번호표라고만 했죠.”
혜라는 그 말을 그대로 회의록에 옮겼다. “가능성만으로 결론을 낼 수는 없습니다. 2016년 원본 색인과 대조해야 합니다.”
그때 서문재가 보낸 법무 대리인 동반 면담 요청이 도착했다. 이틀 전까지만 해도 서문재는 최소한의 책임만 인정하려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자기 명의의 승인 기록과 실제 작업 범위를 구분하는 자료를 제출하겠다고 했다.
오후 한 시, 그는 문을 열고 들어왔다. 고급 양복의 어깨가 전보다 많이 좁아 보였다.
“십 년 전 저는 보호 대상의 개인정보를 다루는 사업에 투자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수익을 내기 시작한 순간, 보호 표시는 불필요한 지연이라고 불렀죠.”
“하은 씨가 있는 자리입니다.” 윤세린이 말했다. “책임을 인정하는 말씀과 사실 확인은 구별해서 해 주세요.”
문재는 말을 멈췄다. 하은은 그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손을 내밀지 않았다.
“제 이름을 지워 달랬더니, 받지 못한 돈도 없었던 것으로 됐어요. 그 결정에 참여하셨나요?”
“기술 변경의 개별 항목은 기억하지 못합니다. 다만 2018년 효율화 승인에 서명했습니다.”
“모른다는 말이 끝이 되면 안 되는 거 아시죠?”
“알겠습니다. 제가 확인할 수 있는 범위의 기록을 내겠습니다.”
면담이 끝난 뒤 서윤은 문재의 표정을 기사에 쓰고 싶지 않았다. 반성하는 얼굴은 증거가 아니었다. 그녀는 하은이 비공개로 남기를 원한다는 사실과, 자료 공개 범위를 본인이 결정했다는 사실만 취재 메모에 적었다.
저녁 무렵 유정호가 오래된 프로그램의 색인 구조를 대조한 결과를 들고 왔다. 원본 보호 구분 07, 보류 확인 17. 두 번호가 합쳐져 0717로 출력되는 재현 시험이 성공했다. 실제 피해 파일의 같은 경로를 거쳤는지는 아직 남아 있었지만, 최소한 번호 하나를 계좌로 오인할 이유는 없어졌다.
민석은 허탈하게 웃었다. “우린 열 해 동안 존재하지 않는 계좌를 찾았던 건가.”
“열 해는 아니죠.” 예린이 말했다. “당신이 그 앱을 본 건 몇 달 전이니까요. 하지만 잘못된 이름 하나가 열 해 동안 어떻게 따라다녔는지 이제 알겠어요.”
하은은 색인 표 옆에 자신의 이름을 써 달라고 하지 않았다. 대신 ‘당사자 승인 없는 대체 수령 금지’ 문장을 추가해 달라고 요청했다. 혜라는 그 문장을 공식 의견으로 접수했다.
밤이 되자 민석의 원장은 다시 천만 원을 보여 줬다.
[거래 참조: 0717]
[예정 지급액: +10,000,000원]
[수취인 변경 횟수: 3]
마지막 항목에 그가 모르는 이름이 있었다.
[현재 대체 수취인: 원본 보관인]
그들은 자신에게 돈이 들어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안심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누군가를 대신하는 자리가 남아 있었다.
제143화 댓글 0
댓글·공감·신고는 로그인 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전 익명 댓글은 그대로 표시됩니다.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