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9일 화요일 아침, 강민석은 은행 앞에서 번호표를 뽑았다. 지난주부터 벽에 붙은 연말 영업 안내문이 몇 번이나 바뀌었다. 창구 직원들은 쏟아지는 민원에 지쳐 보였고, 로비의 커피 기계는 고장 안내문을 달고 있었다.
그는 이번엔 내일의 입금액을 들고 오지 않았다. 이미 실제로 들어온 48,000원의 경위를 확인하려고 왔다. 거래 내역에는 분명 입금이 있었지만, 이후 누가 어떤 이유로 보냈는지에 관한 정정 요청이 접수돼 있었다. 그는 아직 그 돈을 쓰지도, 돌려보내지도 않았다.
“제가 받은 거래가 실제로 처리됐다는 확인은 있습니다.” 민석이 말했다. “이제 이 돈이 다른 사람의 지급 완료 자료에 쓰였는지 확인하고 싶습니다.”
직원은 신분 확인과 절차를 거쳐 자신의 계좌에 관한 확인 사항을 안내했다. 현재 입금 처리 자체는 유효했다. 다만 외부 신청자가 송금 목적 코드 정정을 요청했다는 건 별도의 확인이 진행 중이었다. 상대의 정보와 제삼자 자료는 알려줄 수 없었다.
“그럼 돈을 바로 돌려보내면 되나요?”
“임의로 송금하면 오히려 권리 관계가 복잡해질 수 있습니다. 필요한 조치는 확인 결과에 따라 안내드리겠습니다.”
민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손에 들어온 돈이라고 해서 반드시 자신의 것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반대로 정체를 모르는 돈을 무작정 되돌리는 것 또한 누군가가 짜 놓은 절차의 한 부분일 수 있었다.
점심 무렵 서윤은 17-C 대조표의 정식 열람 심사가 일부 승인됐다는 소식을 전했다. 문정아와 관련된 항목 중 자신이 확인했던 작업 절차의 원본 요약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서윤은 취재진으로서 직접 열람하지 않고, 기록관리사가 공개 가능한 문구를 정리해 주기를 기다렸다.
요약에 적힌 문장은 짧았다.
‘2016년 10월 25일, 17-B 결손 확인. 17-C 별도 보존. 송금 요청과 수취인 동의를 동일 결과로 합산하지 말 것.’
그 밑에는 별도의 이름이 있었다.
‘기술 검증 작성: 정도현.’
서윤은 그 이름을 오랫동안 바라봤다. 대학 시절 자신이 보낸 질문을 기억한 사람이 정말 있었다. 그녀는 도현이 자신을 위해 쓴 답변일 거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 알았다. 그가 남긴 문장은 한서윤 한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확인할 기회를 빼앗긴 모두를 위한 것이었다.
“도현 씨가 나중에 2036년 계정으로 남을 줄 알았을까요?” 그녀가 민석에게 물었다.
“그 계정이 진짜 도현 씨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도 아직 모르죠.”
그때 준성에게 연락이 왔다. 2018년 검토 보고서의 보존 요청에 대한 회신이었다. 그가 경고창을 축소하는 데 동의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었다. 준성은 자료가 있다는 사실을 먼저 민석에게 알렸다.
“거기 내 서명이 있어.”
민석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내가 너한테 화낸 건 아직 안 끝났어.”
“알아.”
“그래도 네가 이번엔 말한 건 잘한 일이야.”
준성은 조용히 웃었다. 십 년 전의 결과를 되돌릴 수는 없었지만, 오늘 같은 거짓말을 하나 더 만들지는 않을 수 있었다.
오후 다섯 시, 정태겸은 외부 사용처에 보낸 정정 요청 현황을 전달했다. 마지막 남은 한 곳에서도 기존 집계 자료만으로 계약을 확정하지 않기로 했다는 공식 회신이 도착했다. 그들은 환호하지 않았다. 이미 유통된 보고서의 모든 파생본이 사라진 것도 아니고, 실제 피해액과 책임을 산정하는 일은 이제부터였다. 그래도 적어도 당장 예정된 추가 사용은 한 차례 멈췄다.
그날 밤 민석은 집으로 돌아와 불을 켜지 않은 채 소파에 앉았다. 지난 몇 달 동안 낡은 원장 하나가 자신의 삶을 얼마나 바꿨는지 생각했다. 처음엔 숫자가 미래라고 믿었다. 지금은 숫자 뒤에 숨어 있는 '완료'라는 말을 더 의심했다.
휴대전화 화면에 알림이 하나 올라왔다.
[내일의 잔액: +10,000,000원]
[예정 시각: 2026.12.30 09:17]
[거래 종류: 원본 반환 보상금]
[수취 계좌: 강민석]
천만 원.
그동안 등장한 백억 원, 천억 원에 비하면 작았다. 그러나 그의 실제 통장에 들어올 수도 있는 돈이라는 점에서 전혀 다른 무게였다. 민석은 공식 은행 앱을 확인했다. 입금 예정 안내는 없었다. 검은 원장은 그가 확인을 마치기도 전에 새로운 문구를 띄웠다.
[지급 조건: 17-C 원본 자료 열람 기록 전달]
[동의 확인 방식: 수취인이 계좌를 유지하면 동의로 간주]
그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 내어 웃었다.
“또 그 방식이야?”
수취인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받았다고 쓰는 구조. 이름이 없으면 다른 사람을 넣는 구조. 누군가의 동의를 추측해서 돈으로 만드는 구조. 이제는 그 방식이 자신의 이름을 향하고 있었다.
민석은 세린에게 화면을 보냈고, 정식 기록 보존 요청을 준비했다. 자기 계좌에 실제 돈이 들어오더라도 그것으로 17-C 자료의 공개 동의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의견을 미리 남겼다.
그러고 나서 창밖을 바라봤다. 도로에는 택시들이 지나갔다. 누군가는 내일 아침을 위해 야근하고, 누군가는 다음 달 월세를 걱정하며 잠들고 있을 시간이었다. 그 모든 사람의 내일을 누가 대신 확정할 수 있겠는가.
자정이 가까워졌을 때 원장이 마지막으로 켜졌다.
[2036년 강민석 / 메시지 1건]
‘넌 내가 보낸 돈이라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내일 천만 원을 보내려는 사람은 네가 아직 만나지 않은 사람이다.’
민석의 손끝이 멈췄다.
문장 하나가 더 나타났다.
‘그 사람이 널 만나기 전에, 누가 그 사람의 이름을 지웠는지 알아내.’
검은 화면에는 낯선 계좌의 끝 네 자리만 남았다.
`---- 0717`.
그리고 이번에는 수취인도, 송금인도 아닌 또 하나의 칸이 있었다.
[거래의 최초 요청자: 강민석]
[요청 일시: 2016.10.25 16:43]
민석은 숨을 멈췄다. 십 년 전에 자신이 남긴 접수번호와 정확히 같은 시각이었다. 그는 분명 천만 원을 보내 달라고 요청한 기억이 없었다. 그런데 누군가는 그날의 이름과 시간까지 가져다 내일의 거래를 만들고 있었다.
돈이 들어올지 안 들어올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내일 누군가 찾아온다는 예고만큼은, 처음으로 기대보다 두려움에 가까웠다.
제140화 댓글 0
댓글·공감·신고는 로그인 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전 익명 댓글은 그대로 표시됩니다.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