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원장이 내놓은 선택지는 잔인할 만큼 단순했다.
원본 거절을 보존하면 마이너스 백억 원. 삭제하면 영 원.
강민석은 검은 화면을 손가락으로 훑었다. 언뜻 보면 한 번의 누름으로 거대한 손실을 막을 수 있는 것처럼 보였다. 처음 능력을 발견했을 때라면 그는 주저하지 않았을 것이다. 잔액은 돈의 세계에서 가장 단단한 사실처럼 보였으니까.
지금은 달랐다. 그 백억 원이 현금 부채가 아니라 일부 보고서의 위험 평가액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문정아가 십 년 동안 붙잡고 있던 말은 버튼 하나로 없어질 수도 있었다.
그는 화면을 촬영해 보존하고 아무것도 누르지 않았다.
“왜 나한테 묻는 거지?”
정답을 알고 있지 않아서 하는 질문이 아니었다. 자신에게 그 결정을 내릴 권한이 없기 때문이었다.
다음 날 오전, 서윤은 정아가 동의한 범위에서 회의를 마련했다. 정아와 백소희가 직접 말할 수 있도록 각자의 대리인이 배석했고, 누군가 못 오면 화상으로 진술할 수 있게 했다. 강민석에게는 진행을 맡기지 않았다. 그가 할 일은 자신에게 나타난 경고를 설명하는 것뿐이었다.
정아가 먼저 말했다.
“원본 거절을 남기는 데 제 동의를 묻는다면, 저는 남기겠습니다. 제가 쓴 ‘확인할 수 없음’이니까요.”
소희가 이어 말했다.
“제 미수령 기록도 지우지 마세요. 제가 돈을 받았는지는 따로 확인해야 합니다. 받지 않았다는 이의 제기를 없애는 건 해결이 아니에요.”
세린은 각자가 서명한 의견서와 제출 범위를 확인했다. 누구도 자신 외 다른 피해자의 의사를 대표하지 않았다.
예린은 17-B를 기준으로 만든 완료 집계가 다른 수취인들에게도 사용됐는지 조사하는 동안 자료가 더 보존되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관련 기관에 보존 요청이 접수되면, 민석의 화면에서 무엇을 눌렀든 그것으로 공식 증거가 삭제되지는 않았다.
“다행이네요.” 민석이 말했다.
“그렇지만 외부 서비스에서 어떤 보고서를 계속 띄우는지는 별도 문제예요.” 예린이 답했다.
오후에는 성우데이터솔루션의 내부 검토자가 조사 결과의 일부를 회신했다. 17-B라는 명칭은 2018년에 검증 결손값을 채우기 위한 대체 규칙으로 등록돼 있었다. 그 규칙이 원래 무슨 뜻이었는지를 기술팀 일부가 알고 있었는지는 추가 확인이 필요했다. 다만 원본과 달리 ‘확인 불가’를 ‘완료’로 변환할 수 있게 설계됐다는 사실은 기록에서 확인됐다.
“일부러 그랬을까요?” 준성이 물었다.
“실수였다고 하기엔 관련 승인 단계가 너무 많아요.” 유정호가 말했다. “그래도 의도는 자료와 진술로 입증해야 합니다.”
그날 저녁 민석은 서문재를 다시 만났다. 서문재는 입술이 바짝 말라 있었지만 더는 자신의 피로를 먼저 이야기하지 않았다.
“내가 그때 거절 기록을 보존하자고 했으면, 비용 문제로 해고됐을지도 모릅니다.”
“그럴 수 있었겠죠.” 민석이 말했다.
“그런데 그때 불이익을 당한 건 저만이 아니군요.”
민석은 그에게 답 대신 정아가 동의한 공개 의견서의 첫 문장을 보여 줬다.
‘나는 지급 여부를 확인하지 못했으며, 완료라고 서명한 적 없다.’
서문재는 한 줄을 세 번 읽었다. 이 문장이 자신이 서명한 구매 승인 문서 옆에 있었다면 그는 어떤 결정을 했을까. 십 년 전으로 돌아가도 같은 선택을 했을지, 그는 자신 있게 답하지 못했다.
복도에서 한서윤은 정아와 마주쳤다. 정아는 오후 회의 내내 허리에 힘을 주고 앉아 있었지만, 이제는 벽에 등을 기대고 있었다.
“이런 걸로 정말 달라질까요?”
“오늘 바로 모든 문서가 바뀌진 않을 거예요.”
“전 십 년 동안 '받지 않았다'는 말만 했어요. 다른 사람이 그걸 듣기만 해도 조금 나아질 줄 알았는데.”
서윤은 한동안 생각하다 말했다. “오늘은 그 말이 정아 씨의 이름으로 접수됐어요. 누군가 다른 뜻으로 고치려면, 왜 고쳐야 하는지 설명해야 할 겁니다.”
정아는 처음으로 웃었다. “그럼 이제 제 아들한테도 말할 수 있겠네요. 엄마가 뭘 확인했는지.”
“뭐라고 하시려고요?”
“확인하지 못한 건 못했다고.”
서윤은 그 말을 수첩에 적었다. 그러나 기사에 옮기기 전에 반드시 정아에게 확인받겠다고 마음먹었다.
민석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검은 원장은 여전히 두 개의 버튼을 띄우고 있었다. 하지만 그 아래 새로운 상태가 생겨 있었다.
[원본 거절 기록 / 공식 보존 요청 접수]
[강민석의 승인 여부 / 무관]
그는 웃음이 나왔다. 처음으로 원장이 자기 선택을 필요로 하지 않는 순간이었다. 누군가의 말을 지키는 일에는 본인의 승낙과 실제 기록이 필요했다. 자기가 거대한 돈을 걸고 구세주처럼 등장할 이유는 없었다.
그때 화면이 다시 바뀌었다.
[원본 거절 기록을 보존했습니다.]
[백억 원 위험 평가액: 재산출 대기]
민석은 그 문구가 누구의 조작인지 알지 못했다. 다만 자신은 버튼을 누르지 않았고, 필요한 일은 공식 절차로 이미 시작됐다.
그 다음 줄에 또 하나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네가 거절하지 않아도 되는 날이 왔다.’
발신자 표시: 2036년 강민석.
그 문장 다음에는 낯선 문장이 붙었다.
‘그러면 이제 네가 받았던 최초의 돈을 돌려볼 차례다.’
민석은 48,000원의 은행 거래 내역을 열었다. 그동안 그는 받지 않은 사람들을 찾았지만, 정작 자기 계좌에 들어온 최초의 돈이 어디서 왔는지는 끝내 알아내지 못했다.
제139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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