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아가 동의한 비공개 대조 회의는 12월 24일 오전 세온기록관리의 독립 회의실에서 열렸다. 그녀는 참석하지 않았다. 참여할 사람과 회의를 지켜볼 방식에 대해 스스로 결정한 결과였다. 대신 17-B 양식의 기능이 잘못 쓰인 부분만 조사해도 좋다는 동의서를 남겼다.
회의실 화면에는 글자가 빼곡했다. 예린과 유지보수 담당자 유정호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서문재는 한쪽 끝에서 손을 모았다. 준성은 노트북을 펼쳤지만 운영 환경에 접속하지 않았다. 분석은 별도로 제공된 검증용 사본으로 진행됐다.
“이건 실제 고객 데이터가 아니라 규칙만 재현한 샘플입니다.” 예린이 말했다. “실제 피해 규모를 단정할 자료는 아직 없어요.”
샘플의 첫 번째 항목에는 수취인이 있었다. 지급 요청, 입금 확인, 당사자 수령 확인 세 칸 모두 각자 다른 자료로 증빙됐다. 표시 결과는 ‘완료’였다.
두 번째 항목은 입금 기록이 없었다. 정상적이라면 ‘미확인’이 나와야 했다. 그런데 2018년형 변환표를 적용하자 ‘대체 확인 적용’이라는 문장이 뜨고 결과가 완료로 바뀌었다.
“대체 확인자가 누구냐고 묻지도 않네요.” 민석이 말했다.
“이 파일에선 이름 칸 자체가 비어 있어요.” 유정호가 설명했다. “별도 검증이 없는 경우 17-B 대표값을 복사합니다.”
준성은 키보드를 두드리던 손을 멈췄다. “왜 그런 규칙을 넣었습니까?”
“2018년 배포 문서에는 중복 입력을 줄이기 위한 임시 규칙이라고 돼 있습니다.”
“중복 입력이 아니라 사람을 없애는 규칙이잖아요.”
서문재가 입을 열었다.
“그때 우리는 자료 보존 비용이 부족했습니다. 예외 항목이 너무 많으니 미정 상태를 한꺼번에 관리하자는 제안을 받았어요.”
“관리와 완료는 다릅니다.” 예린이 말했다.
“압니다. 지금은 압니다.”
세린이 서문재에게 물었다. “당시 문서에 직접 서명했습니까?”
“구매 승인 서명은 했습니다. 기술 매핑표까지 읽었다고는 말하지 못하겠습니다.”
회의실엔 한동안 빔 프로젝터의 팬 소리만 들렸다.
서윤은 표의 상단을 가리켰다. ‘미확인’이 완료가 되는 동안 보고서의 아래쪽에는 녹색 숫자가 늘어나고 있었다. 계약 이행률 81퍼센트가 97퍼센트로 바뀌었다. 보상 준비금 평가액이 줄었다. 정태겸이 과거 고객에게 설명했을 법한 '안전성 개선'이라는 말이 이제 무엇을 숨겼는지 보이기 시작했다.
“그럼 마이너스 백억은요?” 민석이 물었다.
예린은 차분히 답했다. “그건 여러 보고서에서 잘못된 완료를 되돌릴 경우의 위험 평가액입니다. 민석 씨 개인이 빚진 돈도, 누군가 반드시 현금으로 잃을 돈도 아니죠. 다만 그 평가액을 거래 조건으로 쓰는 사람들이 있을 수는 있어요.”
“1천억 정산권도 마찬가지겠죠.”
“실제 지급 청구권과 결과를 재판매한 계약 가치를 분리해야 합니다.”
점심 무렵, 세린은 전날 확인된 자동 생성 문서에 대한 긴급 정정 요청이 한 곳에서 수용됐다는 연락을 받았다. 여전히 몇몇 외부 사용처의 회신은 도착하지 않았다.
민석은 정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회의의 내용 중 공개해도 좋다고 허락한 범위만 간단히 설명했다.
“제 이름 하나가 아니라 규칙 문제라고요?”
“네. 하지만 정아 씨 기록이 어떻게 쓰였는지 확인한 덕분에 드러났어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렇게 말하면 꼭 제 이름이 또 필요한 것 같네요.”
민석은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또 다른 사람의 역할을 정해 주고 있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앞으로 어떤 자료를 내실지는 정아 씨가 정하시면 됩니다.”
정아는 한참 뒤에야 “그 말은 믿어 보겠다”고 했다.
김예린은 출력된 샘플을 가지고 회의실을 한 바퀴 돌았다. 각 사람에게 첫 번째 문서를 보여 준 뒤 모두 같은 질문을 했다.
“이건 지급이 끝났다는 뜻일까요?”
대부분은 그렇다고 답했다. 종이 맨 위의 녹색 도장 때문이었다. 두 번째 문서에는 도장을 지우고 원본 세 칸을 그대로 남겼다. 이번에는 모두가 '알 수 없다'고 답했다. 동일한 자료를 두고 답이 바뀌었다.
“이게 핵심이에요.” 예린이 말했다. “원장 속 문구는 이용자가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까지 바꿔 버립니다. 검증의 빈칸을 화면 장식으로 가리면, 사람들은 빈칸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잊어요.”
태겸은 가만히 듣고 있다가 자신이 쓰던 상품 설명 자료를 조용히 덮었다. 거기에도 녹색으로 채워진 진행 막대가 있었다. 그는 처음 그 막대를 만든 사람의 의도를 몰랐지만, 그것이 판매에 도움이 됐다는 사실만큼은 알고 있었다.
그날 오후 서윤의 편집국에는 발신자가 없는 우편물이 도착했다. 작은 투명 봉투 안에 영수증 종이 한 장이 있었다.
[확인 결과 유통료: 48,000원]
[대상 건수: 17-B 적용 286건]
[청구 상태: 내일 예정]
서윤은 실제 청구서인지도 확인되지 않은 종이를 증거로 취급하지 않았다. 그런데 우편물 뒷면에는 손글씨 한 줄이 있었다.
‘당신들이 찾아낸 건 오류가 아닙니다. 오류를 거래로 바꾼 사람을 찾으세요.’
그때 민석의 검은 원장에 새로운 알림이 나타났다.
[2026.12.25 09:17]
[예정 항목: 확인 결과 286건 판매 완료]
[승인 필요: 없음]
내일은 공휴일이었다. 정식 업무 창구가 닫혀 있는 동안, 누군가는 잘못된 결과를 팔기로 예약해 두었다.
제134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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