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날 오후 두 시.
문정아는 자신의 이름이 적힌 검은 화면을 보자 생각보다 조용하게 물었다.
“저것도 돈을 준다는 뜻입니까?”
“실제 입금이 확인된 건 아닙니다.” 민석이 답했다. “저 화면이 완료라고 주장하는 것뿐이에요.”
“그럼 사람들은 왜 저걸 믿어요?”
그 질문에 누구도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누군가는 원장을 기술이라 믿었고, 누군가는 보고서라 믿었다. 또 다른 누군가는 관공서처럼 생긴 문서의 제목을 믿었다. 정아는 십 년 전부터 그 믿음들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고 있었다.
윤혜라는 정아가 동의한 범위에서 당일 접수 기록을 조회했다. 정아가 정식으로 신청한 것은 과거 근무 이력의 열람이었다. 지급을 승인하거나 수취를 확인하는 신청은 없었다. 검은 원장에 뜬 ‘지급 확인 완료’와 맞아떨어지는 공식 접수번호도 없었다.
“표시가 우연히 일치했다고 해도 누군가 시스템을 잘못 연결하고 있을 수는 있습니다.” 혜라가 말했다. “하지만 여기서 바로 누가 조작했다고 단정하면 안 돼요. 접속 기록부터 보존하겠습니다.”
세린은 원본 보호를 위한 추가 의견서를 준비했다. 정아에게는 자신이 제출할 자료를 고를 권리가 있었다. 그녀는 쇼핑백 속 나머지 서류를 꺼내지 않았다. 대신 사본의 앞뒤를 사진으로 남기는 데만 동의했다.
앞면의 문구보다 뒷면이 문제였다.
`17-B / 확인 불가 / 원본 보호`.
그 아래 붉은 도장 흔적이 있었다.
`대리 서명 금지`.
2018년 보고서에선 그 문장이 빠져 있었다. 자료를 본 김예린은 화면을 가리켰다.
“아예 문서를 바꾼 게 아닐 수도 있어요. 출력 양식이 바뀌면서 ‘금지’ 표시를 제외하고 유효값만 읽도록 만든 겁니다.”
“컴퓨터가 금지라고 써 둔 걸 안 읽은 거예요?” 준성이 물었다.
“컴퓨터는 하라는 대로 읽었죠. 누가 왜 그렇게 시켰느냐가 문제예요.”
정아는 2016년 작업실을 떠올렸다. 창문 없는 방에서 직원들은 종이 상자를 옮기고 접수번호를 찍었다. 배달이 끝나면 출납표에 서명했다. 한 번은 급여 명세서를 달라는 전화가 걸려 왔고, 담당자가 그녀에게 ‘완료로 넘기라’고 했다. 정아는 지급 내역이 없다고 답했다.
“그때 제 앞에 고무도장 두 개가 있었어요. 하나는 ‘보류’, 하나는 ‘완료’. 담당자는 보류를 찍어 놓고 보고할 땐 완료라고 말했어요. 상자 수만 맞으면 된다고.”
그녀는 손가락으로 17-B의 오른쪽 모서리를 짚었다.
“이 전표는 제가 보류라고 찍은 거예요. 그런데 해마다 제 손으로 완료를 찍은 문서가 늘어났습니다.”
서윤은 정아에게 물었다.
“그러면 열일곱이라는 숫자는 사람 번호인가요, 서류 번호인가요?”
“원래는 절차 번호예요. 마지막으로 미확인 수취인을 따로 확인하는 절차. 다만 그 절차로 걸러진 사람들에게도 나중에 번호가 붙었죠. 그래서 누군가 저를 열일곱 번째 수취인이라고 불렀을 거예요.”
민석은 서랍에 넣어 둔 자신의 수첩을 떠올렸다. ‘한서윤의 질의를 받기 전에는 17번을 완료로 옮기지 말 것.’ 그 말이 지금은 다르게 들렸다. 사람 하나의 이름을 확인하라는 게 아니었다. 확인이라는 말 자체가 무엇을 뜻하는지 잃지 말라는 경고였다.
저녁 다섯 시, 세린에게 연락이 왔다. 외부 기관 한 곳이 정아 명의의 ‘확인 완료’ 보고서를 받았다는 것이다. 민석의 검은 화면뿐 아니라 실제 업무 시스템으로도 문구가 이동하고 있었다. 다만 받은 것은 원본 확인서가 아니라 자동 생성된 요약 결과였다.
“즉시 정정 요청은 들어갔어요.” 세린이 말했다. “하지만 배포받은 곳이 한 군데뿐인지 아직 몰라요.”
정아는 휴대전화에 쌓인 문자들을 보여 줬다. 처음 보는 번호에서 ‘보상금 수령 확인 바랍니다’라는 메시지가 연달아 도착했다. 마지막에는 작은 링크가 붙어 있었다.
“제가 누르지 않으면 또 다른 사람이 누르나요?”
민석은 고개를 저었다.
“누르지 마세요. 우리가 공식 절차로 이의 제기할 수 있게 돕겠습니다.”
“제가 십 년 전에 그걸 해 봤는데요.”
정아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퇴근 무렵, 혜라는 안내 창구의 첫 번째 화면을 다시 불러왔다. 그 화면에는 이름, 방문 목적, 접수 시각만 표시됐다. 아래로 스크롤하면 별도의 자동 확인 상자가 있었다. 혜라는 오늘의 신고와 동일한 기능은 아니라고 설명하면서도, 왜 이런 상자가 남아 있는지 담당 부서에 질문해 보겠다고 했다.
정아는 그 화면을 멀리서 보고 말했다. “제가 십 년 전에 쓰던 양식도 처음엔 저랬어요. 예외는 위에 붉은 글씨로 써 놓는데 나중에 출력하면 맨 아래 작은 글씨만 남는 거요.”
혜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접수된 내용과 출력 문서가 다르게 보이지 않는지, 새로 들어오는 이용자는 어떤 단어에 동의한다고 생각하는지를 점검하겠다고 했다. 오래된 사건은 보관실의 문제만이 아니었다. 오늘 사용한 화면도 내일의 다른 누군가에게 증거가 될 수 있었다.
그날 밤, 정아는 집으로 가기 전에 서윤만 남겨 달라고 했다. 기록하지 말아 달라는 조건을 먼저 건넸다.
“내가 종이를 갖고 온 건 겁이 나서예요. 누가 돈을 받았다고 쓰기만 하면, 나는 또 그걸 입증하느라 살아야 하니까.”
“그럼 지금은 무엇을 바라세요?”
“내 말이 내 이름으로 남아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게 전부예요.”
서윤은 아무것도 적지 않았다. 다만 그 말을 오래 기억했다.
건물 밖에서 민석의 휴대전화가 켜졌다.
[17-B 정정 요청 / 검토 중]
[배포 예상 요금: 48,000원]
[요금 수취 계정: 확인 필요]
확인서 한 장이 사람을 속이는 데 쓰이는 동안, 누군가는 그것을 서비스로 팔고 있었다.
제132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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