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식 기관의 회의실에는 기자가 없었다.
12월 12일 오전, 관계자들은 민석과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는 기록 담당자, 법률 대리인, 보관 기관 실무자들과 함께 앉았다. 전날 검은 원장이 보여 준 ‘미확인 수취인 11’이라는 문구가 실제 당사자 열한 명을 뜻하는지도 확인되지 않은 상태였다. 누구도 그 숫자를 사람의 이름으로 취급하지 말자고 합의했다.
“우리가 요청하는 것은 돈의 일괄 지급이 아닙니다.” 세린이 말했다. “각 당사자가 자신에게 관련된 기록이 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절차입니다.”
기록 담당자는 수첩에 그 문장을 적었다.
“명부가 실제 자료라면 이해관계인에게 통지할 근거와 범위를 검토하겠습니다. 다만 시험 계정의 표시만으로 개인을 특정하거나 개인정보를 공개할 수 없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민석이 대답했다. “저도 그래서 여기 온 겁니다.”
백소희는 자신의 경험을 담은 짧은 진술서를 제출했다. 그녀가 공개에 동의한 것은 ‘돈을 받지 않았다고 주장한 사실’과 ‘그 주장이 보존된 문서로 확인됐다는 사실’뿐이었다. 통장번호나 주소는 첨부하지 않았다.
명숙의 경우도 달랐다. 지원금이 실제로 다른 비용에서 차감됐는지 추가 대조가 필요했다. 정훈의 경우는 애초 신청 사실부터 확인해야 했다. 회의 참석자 누구도 세 사람을 같은 피해액으로 묶지 않았다.
회의가 길어지자 민석은 창밖의 은행 간판을 바라봤다. 처음 검은 원장을 봤을 때 그는 미래를 들여다보는 눈을 얻었다고 생각했다. 내일의 주가, 내일의 월급, 내일의 행운을 남보다 빨리 알 수 있는 능력. 그러나 이제 그 화면이 알려 주는 것은 다른 것이었다.
사람들이 오늘 말할 수 있는 것을 누군가 내일의 기록으로 바꾸어 버리고 있다는 사실.
점심 무렵 정태겸에게서 연락이 왔다. 마지막까지 회신이 없던 판매사도 위험 설명 자료의 배포를 중단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그 회사가 이전에 설명받은 고객에게 정정 내용을 전달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민석은 그 부분을 다시 문의하도록 했다.
“끝이 없군요.” 태겸이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없을 수도 있죠.” 민석이 답했다. “하지만 잘못된 설명을 받았던 사람에게 바로잡을 기회는 있어야 하잖습니까.”
태겸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고는 짧게 답했다. “그 문장을 제 이름으로 회의록에 남기겠습니다.”
오후 두 시, 공식 기관에서 회신했다. 2016년 P00 원천 보류와 관련된 자료는 기존 원천 자료에 덮어쓰지 않고 별도로 보존하며, 검토가 끝날 때까지 지급 완료의 증거로 사용하지 않는다는 취지였다. 대조가 필요한 건은 개별 접수 경로를 열어 두기로 했다.
준성은 회의실을 나와 계단에 앉았다.
“우리가 십 년 전에 해야 했던 일이 이거였네.”
“어떤 거?”
“완료라고 적힌 칸 옆에 왜 완료인지 쓰는 일.”
“그리고 모르면 모른다고 쓰는 일.”
준성은 웃었다. “그거 진짜 어려운 거더라.”
서윤은 늦은 오후, 기사 후속편을 송고했다. 제목은 길었다.
‘지급 완료 기록의 정정 시작…실제 수령 여부는 개별 확인해야.’
편집장이 전화를 걸어 제목을 줄이자고 했다. 서윤은 웃으며 말했다.
“줄이면 또 중요한 말이 없어져요.”
민석은 그날 저녁 부모님이 사는 동네에 들렀다. 오래전 다니던 분식집이 문을 닫고 작은 서점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는 책 한 권을 골랐다. 계산대에서 카드를 내밀 때 문득 휴대전화를 확인했다. 공식 은행 앱의 천 원 입금은 여전히 그대로였고, 송금 경위는 추가 확인 중이었다.
예전에는 미래를 알기 위해 밤을 새웠다. 지금은 아직 확인되지 않은 일을 확인되지 않았다고 두기 위해 노력했다.
서점에서 산 책은 수필집이었다. 표지에는 ‘아직 쓰지 않은 문장’이라는 제목이 적혀 있었다. 민석은 첫 장을 펼쳤지만 몇 줄 읽지 못했다. 2016년의 자신은 세상을 바꿀 거창한 일을 한 적이 없었다. 서류 한 장을 지키라는 말을 들었고, 그 말이 왜 중요한지 이해하지 못한 채 상자 하나를 옮겼을 뿐이었다.
그때 지키지 못한 것도 많았다. 백소희의 문제는 10년 동안 해결되지 않았고, 누군가는 잘못된 숫자를 믿으며 계약에 서명했다. 준성은 자신의 실수를 감당하느라 지쳐 있었고, 서윤은 사람들의 말을 정확히 전하기 위해 기사의 제목을 몇 번씩 고쳤다.
민석은 생각했다. 미래에서 메시지가 온다면 그것은 모든 걸 해결한 영웅의 편지일 거라고 믿었었다. 그러나 미래의 자신이라는 계정이 보낸 문장도 결국 지금의 사람들에게 '서명하지 말라'고 부탁하고 있었다. 미래라는 말이 붙었다고 해서 그 부탁이 정답이 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미 확인된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다짐만큼은 현재의 자신도 할 수 있었다.
그는 수첩 맨 뒤에 적혀 있던 숫자들을 지웠다. 마이너스 백억 원, 천억 원, 이백삼십육 개의 알림 기록. 지우지 않은 건 확인해야 할 일들의 목록이었다. 천 원의 출처, P00 원본을 둘러싼 실제 수령 여부, 2018년 문구 수정의 책임, 그리고 아직 수신자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2036년 명부.
확인되지 않은 것은 그대로 적어 두기로 했다. 세상에서 가장 답답하지만 가장 정직한 문장을, 오늘 그는 겨우 배워 가고 있었다.
집에 돌아와 책상에 앉았을 때, 검은 원장이 켜졌다.
[대표 승인 기능: 중지]
[원천 이의 기록: 개별 대조로 전환]
[마지막 지급 지시: 취소]
민석은 그 세 줄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오랫동안 싸워 온 잘못된 규칙 하나가 최소한 당장은 멈춘 듯했다. 하지만 화면 아래 작은 표시가 여전히 살아 있었다.
[2036년 계정 동기화: 연결 대기]
“아직 끝난 게 아니구나.”
그가 중얼거리자 메시지가 나타났다.
'잘했어. 이번에는 내가 했던 선택을 하지 않았네.'
민석은 숨을 멈췄다.
'하지만 네가 멈춘 건 지급이 아니야. 확인이 없는 지급을 완료라고 부르는 방식이지.'
누구든 과거의 자료를 읽고 이런 문장을 만들 수 있다. 그는 그 점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다음 줄을 본 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다음 조회 항목: 2036년 강민석의 미수령 기록]
[원본 보관자: 한서윤]
[보관 시작일: 2026.12.13]
내일이었다.
서윤은 지금 아무것도 보관하고 있지 않았다. 2036년 기록의 당사자도 아니었다. 민석은 바로 서윤에게 전화했다.
“내일 누가 찾아오기로 했습니까?”
“아뇨. 왜요?”
“무슨 물건을 맡아 달라는 연락도 없었고요?”
“없어요. 무슨 일이죠?”
민석은 화면을 저장하고 설명했다. 서윤은 잠시 침묵했다.
“그러면 내일 누가 와서 기록을 맡기려 할 수 있다는 말이네요.”
“예측인지, 예약인지, 누군가 의도적으로 만든 안내인지 몰라요.”
“그럼 만나기 전에 확인부터 해야겠네요.”
통화가 끝나자 원장에 한 줄이 더 생겼다.
'이번에는 그녀가 받은 적 없는 봉투를, 받았다고 쓰지 마.'
민석은 휴대전화를 천천히 내려놓았다. 내일의 잔액을 보여 주던 화면이 이제 내일의 증언을 예고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드디어 알았다.
자신이 싸워야 할 상대는 미래 자체가 아니었다.
사람이 하지 않은 말을 했다고 기록하는, 그 오래된 방식이었다.
제110화 댓글 0
댓글·공감·신고는 로그인 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전 익명 댓글은 그대로 표시됩니다.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