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한 이전 준비 중이라고?”
서윤은 기사 송고를 멈추고 민석의 화면을 들여다봤다. 검은 원장에 표시된 문구는 전날 밤부터 그대로였다. 민석은 공식 기관에 보완 자료를 접수했고, 본인의 대표 승인 권한이 정당하지 않다는 확인도 요청했다. 그럼에도 원장은 권한을 폐기하는 대신 다른 이름으로 넘기겠다고 했다.
“도대체 누구한테요?”
“그걸 알려주지 않아.”
서윤은 키보드에서 손을 뗐다. “혹시 처음부터 대표가 필요했던 게 아니라 대표가 있다는 표시가 필요했던 거 아닐까요?”
민석은 그 말을 수첩에 적었다. 모두가 결재자를 찾고 있었다. 그러나 서윤이 짚은 것은 결재자의 실제 권한이 아니라, 결재자가 존재한다는 모양새였다.
세린은 긴급 대면 회의를 잡았다. 회의실에는 민석, 준성, 예린, 정태겸이 참석했다. 서윤은 취재상 이해관계를 밝히고 직접 자료를 편집하지 않는 조건으로 자리에 앉았다.
태겸이 입을 열었다.
“시험 계정의 대표 수취인 표기는 상품 평가 자료를 연결하는 기준점입니다. 누군가의 이름을 대표로 지정하면 개별 기록의 대조 결과를 하나의 숫자로 합칠 수 있습니다.”
“당사자 동의 없이요?” 민석이 물었다.
“제가 그 시스템을 만든 건 아닙니다.”
“그럼 만든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야겠네요.”
태겸은 서문재와의 계약서를 꺼냈다. 계약 상대는 수탁 보관 업체였지만, 실무 권한의 일부는 2018년 예외 승인 위원회에 남아 있었다. 위원회의 현재 명칭은 달랐고 담당자도 바뀌었다. 그럼에도 외부 판매 자료에 승인된 것으로 표시된 시각은 늘 같은 자동 처리 일정에 맞춰져 있었다.
예린은 계약서의 부속 문서를 보다가 한 부분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여기 ‘대표 계정 불능 시 직전 유효 계정으로 대체’라고 돼 있어요.”
“직전 유효 계정이면 누구죠?”
태겸이 목록을 살폈다. “2016년 당시 최종 검토자. 원본 보류를 걸었던 사람의 계정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민석은 가슴이 내려앉았다. “김예린 씨입니까?”
예린은 침착하게 고개를 저었다. “제 이름은 개발 책임자였지 지급 검토자가 아니었어요.”
서윤이 물었다. “그럼 최종 검토자가 누구였나요?”
예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낡은 자료철에서 한 장을 뽑았다. 서명칸에는 이름이 아니라 식별 코드만 남아 있었다.
[P00 검토 보류 / 코드: D-H]
“도현 씨?” 준성이 물었다.
“아마요. 하지만 도현은 죽었습니다. 사람이 없는 계정으로 권한을 넘겨서 정산을 승인할 수는 없어요.”
민석은 서류를 내려다보았다. 시스템은 죽은 사람을 대리인처럼 취급하려 하고 있었다. 아직 사실로 확인되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코드가 그대로 남아 있다면 위험한 오류 가능성이 있었다.
회의 참석자들은 도현의 이름 앞에서 잠시 말을 잃었다. 자료 화면에서는 D-H라는 두 글자에 불과했지만, 예린에게는 밤늦게 복도에 놓인 종이컵과 작은 녹음기에 남겨 두었던 목소리가 떠오르는 이름이었다.
“그 사람이 살아 있을 때도 자기 이름을 쉽게 빌려주지 않았습니다.” 예린이 말했다.
그녀는 당시의 일을 천천히 설명했다. 시험 시스템의 오류를 잡기 위해 연구원들이 하루 동안 서로의 계정으로 확인 절차를 진행하던 날이었다. 다들 작은 실험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도현만은 끝까지 자신의 계정으로 누가 무엇을 입력했는지 남겨 달라고 요청했다.
“그땐 다들 예민하다고 했어요. 다른 사람이 대신 테스트해도 상관없는 날이었으니까요.”
“그런데 그 원칙이 나중에 필요해졌군요.” 민석이 말했다.
예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람은 사람이 없어지는 순간 기록이 마음대로 고쳐질 수 있다는 걸 두려워했어요. 이름이 남는다는 건 그 사람이 계속 허락한다는 뜻이 아닌데도 말이에요.”
태겸은 서류를 내려놓고 물었다. “그 메모의 원본은 어디에 있습니까?”
“연구 기록과 함께 보관 중입니다. 원본 제출 여부는 관리 주체와 상의하겠습니다.”
세린은 손을 들어 대화를 멈췄다. “우리 모두 그 메모가 도현 씨의 생각을 보여 주는 자료라는 데 동의하지만, 실제 어떤 시스템 권한이 지금 살아 있는지는 따로 검증해야 해요.”
아무도 반박하지 않았다. 도현의 뜻을 지키려다가 그 뜻을 또 다른 강제 승인으로 만들 수는 없었다.
세린은 즉시 공식 보관 담당 기관에 계정 유효성 확인과 권한 사용 중지 요청을 보냈다. 태겸에게는 승인 표시가 붙은 외부 자료의 배포를 더 이상 재개하지 말라고 요구했다.
회의가 끝나고 예린은 민석을 따로 불렀다.
“도현은 그날 새벽에 이렇게 말했어요. 시스템이 원본을 지우려고 하면 내 이름을 빌릴 거라고.”
“그때부터 알고 있었습니까?”
“확신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남겨 뒀던 서명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가짜로 보일까 봐 누구에게도 꺼내지 못했죠.”
예린이 건넨 것은 도현의 친필 메모 사본이었다.
‘내가 없어도 P00은 보류로 남아야 한다. 내 이름이 승인자로 찍히면 이 문서를 먼저 보여 달라.’
민석은 오랫동안 종이를 바라봤다. 십 년 전 어떤 사람은 자신이 사라진 뒤에도 말할 권리를 지키려 했다. 그가 남긴 것은 허락이 아니라 거절이었다.
밤이 되자 원장에 새 알림이 켜졌다.
[대표 계정 변경 시도]
[대상: D-H]
[처리 결과: 보류]
[보류 사유: 원본 거절 기록 존재]
민석은 처음으로 화면을 보며 안도의 숨을 쉬었다.
곧 다음 줄이 나타났다.
[대체 후보: 2036년 강민석]
안도는 한순간에 사라졌다. 죽은 사람의 이름으로 통과하지 못한 승인 버튼이, 이제 미래의 자신의 이름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제106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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