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받은 걸로 친다.”
서윤이 그 문장을 소리 내어 읽었다. 지하철역 근처 작은 편집실의 공기는 밤새 켜 둔 난방기 때문에 건조했다. 민석이 가져온 출력물에는 수령 확인의 근거로 ‘무이의 경과’라는 네 글자가 반복됐다.
“저 문장만 기사에 쓰면 누가 봐도 사기 같겠죠.” 서윤은 말했다. “하지만 원문에서 무슨 절차에 관한 단어였는지부터 확인해야 해요.”
세린이 보낸 자문 메일에는 비슷한 경고가 적혀 있었다. 원장이 사용한 ‘확인’은 민사상 채무 변제 확인이 아니라 특정 시뮬레이션의 상태값일 가능성이 높았다. 문제는 그 상태값이 금융상품의 위험 평가와 거래 권유 자료에서 실제 수령 사실처럼 사용됐다는 의혹이었다.
예린은 손으로 만든 작은 표를 탁자에 세웠다. 나무토막 세 개에 ‘신청’, ‘확인’, ‘지급’이라는 글자가 붙어 있었다. 그녀는 첫 번째 토막을 두 번째 옆에 놓고 말했다.
“신청이 들어오면 확인할 차례가 생깁니다. 확인할 기한이 끝났다고 해서 마지막 지급 토막을 여기에 올릴 수는 없죠.”
그녀는 확인이라고 적힌 나무토막만 옆으로 눕혔다.
“그런데 이걸 프로그램에 넣으면서 누가 ‘종결’이라는 단어를 썼어요. 종결이라는 말은 신청 건이 더 이상 담당자의 목록에 뜨지 않는다는 뜻이었죠. 정작 지급됐는지는 모르는 상태인데도요.”
서윤은 핸드폰으로 촬영하려다 예린을 바라봤다. “이 설명을 기사에 써도 될까요?”
“나무토막은 써도 돼요. 실제 피해 사례처럼 보이지만 않게 해 주세요.”
준성은 표 옆에 세 가지 서로 다른 숫자를 적었다. 신청 100건, 확인 종료 80건, 실제 지급 검증 32건. 모두 설명용으로 만든 가상의 숫자였다. 그런데 외부 보고서가 확인 종료 80건을 지급된 80건처럼 표시한다면, 독자가 무엇을 믿게 되는지는 분명했다.
“맞는 산식을 넣어도 이름을 잘못 붙이면 틀린 결론이 나오네.” 민석이 말했다.
준성은 자신의 보고서 검토 기록에 다시 적었다. ‘계산 오류 없음’이라는 옛 메모 밑에 ‘용어 검증 누락’이라는 새 문장을 적었다. 그 문장은 누구에게나 보이는 자료에는 아직 없었다. 오늘부터는 숨기지 않기로 했다.
민석은 문서를 넘겼다.
“누가 이렇게 고쳤습니까?”
“2018년에 변경된 보고서 양식에서 흔적이 나옵니다.” 준성이 대답했다.
그는 노트북 화면을 돌렸다. 당초 2016년 연구 문서에는 ‘응답 없음: 지급 사실 미확인’이라고 명시돼 있었다. 2018년 예외 승인 뒤 외부 보고서에서는 ‘응답 없음: 확인 절차 종료’로 줄어들었다. 그리고 현재 유통 중인 요약 화면에는 한 글자만 남았다.
‘완료.’
“세 번 지워졌네.” 민석이 중얼거렸다.
“정확하게는 세 단계에서 의미가 달라졌어. 첫 단계는 누락, 두 번째는 절차 종료, 세 번째는 수령처럼 보이게 만든 요약.”
“그러면 누가 악의를 가지고 했는지도 아직 모르겠군.”
준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는 일을 빨리 처리하려고 했을 수도 있고, 누군가는 숫자 좋은 상품을 팔려고 했겠지. 둘 다 확인해야 해.”
그날 오후 예린은 오래된 개발 기록을 들고 왔다. 녹슨 클립으로 묶은 회의록에는 보류 기록 P00을 되살릴 방법을 놓고 밤늦게 논쟁한 흔적이 있었다.
“원래 프로그램은 ‘돈을 못 받았다’고 말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한 거였어요.” 그녀가 말했다. “기한 안에 대답하지 못했다고 돈을 받았다는 뜻으로 처리하면 안 된다는 게 원칙이었죠.”
“그럼 지금 이 72시간은 뭡니까?”
예린은 한참 종이를 넘겼다. “오래된 화면에서 본 숫자예요. 초기 시험판에는 ‘상태 재검토 요청까지 72시간’이라는 항목이 있었어요. 지급에 이의가 없다는 뜻은 아니었는데.”
“시험판이 또 실제 서비스가 됐군요.”
“그럴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버튼이 정말 누군가의 돈을 움직이는지 확인해야 해요.”
세린은 즉시 공식 자료 보존 요청을 보냈다. 외부 시험 계정에 뜬 72시간이 실제 거래의 법적 기한과 무관하다는 사실을 문서로 명확하게 해 두자는 조치였다. 민석에게는 이의 의사를 남기되 검은 원장 자체에는 동의하지 말라고 권했다.
“원장 버튼을 누르면 접수했다는 증거가 되나요?”
“오히려 어떤 조건에 동의했다고 해석될 여지가 있습니다. 공인된 창구에 접수하고, 그 접수증을 보관해야 해요.”
민석은 기관에 공식 질의서를 제출했다. ‘지급 내역을 알지 못하며 수령 확인에 동의하지 않는다. 근거 자료와 전송 경위를 공개 가능한 범위에서 확인해 달라.’ 문장은 짧았지만 뜻은 분명했다.
저녁 여섯 시, 백소희가 서윤에게 연락했다.
“기사를 쓰신다면 제 이야기를 마지막에 넣어 주세요.”
“이유를 여쭤봐도 될까요?”
“사람들이 또 제 돈부터 세기 시작할까 봐요. 제가 십 년 동안 요구한 건 얼마를 달라는 말보다 제가 안 받았다고 적은 종이를 봐 달라는 거였어요.”
서윤은 수첩을 덮었다. 그러고는 기사 첫 문장을 고쳤다.
‘받지 않았다는 말이 기록에서 지워진 사람들이 있다.’
그날 밤 민석의 원장에는 남은 시간이 47시간으로 줄어 있었다. 화면 아래에 이름이 없는 작은 줄이 추가됐다.
[수취인 1의 무이의 상태가 변경되면 나머지 10명에게 동일 절차 적용]
민석의 입이 말라 왔다. 그는 열 명을 한꺼번에 구해 주거나 불리하게 만드는 대표자가 아니었다. 그런데 누군가 시스템에 그를 대표자로 등록해 두었다.
다음 메시지는 훨씬 노골적이었다.
[대표 수취인의 응답을 기다립니다]
그는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응답하지 않음’이 어떻게 ‘모두의 동의’가 되는지를 찾는 일이 이제 시작됐다.
제102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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