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투표 안내문은 시작부터 잘못됐다.
[응답하지 않으면 현상 유지에 동의한 것으로 간주합니다.]
릴리는 그 문장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아직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네요.”
에반은 빨간 펜으로 문장을 그었다. “마케팅에서 응답률 높이겠다고 쓰는 수법인데, 이런 심리에선 최악이지.”
심리원은 세 가지를 한꺼번에 묻고 있었다. 신을 믿는가, 기록을 공개할 것인가, 신전 공급 계약에 찬성하는가. 재하는 이것들이 서로 다른 문제라고 주장했다.
하심은 무진 분지의 우편집에 시범 투표소를 만들었다. 글을 읽지 못하는 주민에게 질문을 대신 읽어 주는 사람은 있었지만, 선택까지 대신 표시할 수는 없었다. 자신의 표를 비공개로 확인할 수 있는 방법도 마련했다.
한 노인이 물었다. “모르겠다고 적어도 되오?”
“그럼요.” 릴리가 답했다. “모른다는 것도 답이에요.”
북방 도시 주민들은 기록 정정에는 대체로 찬성했지만 원본 공개에는 반대했다. 무진 분지 사람들은 자동 관리신 배정은 거절하면서도 식수 공급 지원은 원했다.
결과를 본 한 신이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어느 쪽을 지지하는지 도무지 모르겠군.”
재하는 웃었다. “원래 사람들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잖아요.”
반대편에서는 원시 수신권 조합이 주민 의견이 분열되어 있으니 현상 유지만이 해답이라고 선전했다. 에반은 맞불 광고를 하자고 제안했다가 릴리의 시선을 받고 입을 다물었다.
“이번에는 먼저 정확히 설명해야지.” 에반이 말했다.
안내문에는 아직 결정되지 않은 항목을 미정으로 표시했다. 잘못된 내용을 발견한 사람은 정정을 요구할 수 있었고, 신전과 무관하게 독립된 검증관에게 의견을 제출할 수도 있었다.
재하가 직접 마이크 앞에 섰다.
“여러분께 저를 믿으라고 강요하지 않겠습니다. 믿지 말라고도 강요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믿음을 바꿨다는 이유로 예전에 드린 도움을 돌려달라고 하지도 않겠습니다.”
방송을 듣던 노아는 릴리에게 물었다. “그럼 신님을 안 좋아해도 물은 마실 수 있어?”
“그래. 물은 네가 살아야 하니까 필요한 거야.”
시범 집계가 끝나던 날 밤 누리가 경고를 띄웠다.
[중앙 계산기의 무단 집계 변경 시도 탐지]
[반대 의견 일부를 중복으로 재분류하려는 명령 확인]
에반은 낯익은 계산식을 보자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옛날에 만든 구조와 비슷해. 누가 어디를 건드렸는지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몰라.”
재하가 말했다. “원본을 지우지 마세요. 누가 무엇을 했는지 남겨야 합니다.”
중앙 계산실에 검증관들이 모여들었다. 임시 결정까지 남은 시간은 하루도 없었다.
제89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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